2015년 10월호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특전사 베테랑·신세대 7人의 포효

  • 조성식 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15-09-18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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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군 최초 강하 1000회, 천리행군 완주, 저격수 1호…
    • 고공강하 때마다 죽음 떠올려…“조국에 목숨 바칠 각오”
    • 자살까지 생각한 천리행군…완주 후 눈물 왈칵
    • “낙하산은 우리 생명, ‘낙하산 인사’란 말 쓰지 말라”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이왕이면 강인한 여군이 되고 싶었다.”(박○○ 하사)

    “그냥 여기 오고 싶었다.”(민○○ 하사)

    “빨리 오고 싶었다.”(노○○ 하사)

    특수전사령부(특전사)를 왜 지원했느냐고 묻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더 묻고 따질 여지를 봉쇄하는 깔끔한 단답형으로.

    8월 하순 미국 육군에서 처음으로 여군 2명이 레인저 스쿨을 수료한 사실이 화제가 됐다. 레인저 스쿨은 혹독하기로 이름난 특수훈련 과정. 그렇다면 한국군에는 이런 강력한 여전사가 없을까. 있다. 바로 한국 육군 특전사 소속 여군들이다.



    특전사는 두말할 나위 없는 한국군 특수부대의 간판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훈련과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전투력으로 ‘강한 남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웬만한 남자도 견뎌내기 힘든 이 강골 부대에 수십 명의 여군이 있다니…. 도대체 그들은 왜 거기 있을까. 그들은 과연 얼마나 강할까. 혹시 중성(中性)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고 서울 외곽 특전사 1공수특전여단을 찾았다.

    특전사엔 7개 여단이 있다. 그중 1공수여단은 특전사의 모체이자 선임 부대다. 1공수여단장 방성호 준장은 “오랜 전통에 빛나는 자부심 강한 부대”라고 소개했다.

    이 부대의 역사엔 얘깃거리가 많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는 박정희 소장의 친위대로 나섰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해 신군부 집권에 일조했다. 1960년대 베트남전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고, 이라크 자이툰부대(2004년), 레바논 동명부대(2007년) 등 해외 파병의 선봉에 섰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는 미군이 못다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임무를 완수하고 북한군 초소 4곳을 파괴했다(폴 버니언 작전).

    ‘소녀 전사’들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특전사 1공수여단장 방성호 준장.

    1공수여단에 전투병과 여군이 배치된 것은 올해 초. 사령부 직속 707특수임무대대 여군중대에 소속된 여군들이 예하 여단으로 분산된 것이다. 주 임무가 대(對)테러인 707특임대는 특전사 최정예부대로 꼽힌다. 특전사는 여군 중대를 해체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강조했다. 여군끼리 있는 것보다 남군과 함께 있으면 서로 경쟁심이 생겨 실력이 더 좋아진다는 논리였다. 방성호 여단장은 여군 합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한 예로 태권도 훈련에 여군이 동참하자 남군이 더 잘하려 애쓴다. 여군은 여군대로 남군에게 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한다. 여군은 지적으로 우수하고, 남군에 체력적으로 전혀 밀리지 않는다.”

    특전사 여군은 남군과 똑같은 체력훈련, 전투훈련을 받는다. 다만 평가기록에서 약간 차이가 날 뿐이다. 자원입대인 데다 뽑는 인원이 워낙 적어 경쟁률이 수십 대 일이다. 모두 부사관이다.

    9월 초순 오전 1공수여단 연병장에선 태권도 훈련이 한창이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하루 몇 시간씩 맹연습 중이라고 했다. 격파와 기합, 구령 소리가 연병장을 뒤흔든다. 외발 턴, 오버헤드 킥 등 화려한 고난도 발차기 격파가 파도처럼 순차적으로 펼쳐진다. 태권도복을 입은 수백 명 대원 중 여군은 20명뿐이지만, 그 존재감은 자못 컸다. 남군들의 우렁찬 고함 간간이 그들의 앙칼진 고음이 공기를 찢었다.

    격파 시범이 이어졌다. ‘소녀 전사’ 몇 명이 나와 팔꿈치와 이마로 기와 10장씩 깨뜨렸다. ‘혹시나’ 했지만, 단 한 사람도 실패하지 않았다. 기자가 기와를 만져보니 여간 단단한 게 아니다.

    다음은 외줄 오르기 훈련장. 외줄 오르기는 서킷 트레이닝(Circuit Training)의 한 과정으로, 밧줄을 타고 공중에 오르는 것이다. 여군 2명이 밧줄을 잡더니 5초도 안 돼 10m 높이까지 올랐다.

    이어 11m 높이의 건물벽 모형이 있는 레펠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검은색 대테러복을 입은 대원 2명이 시범을 했다. 밧줄에 의지해 머리를 아래로 해서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역(逆)레펠이었다. 다리 걸어-하강-중지-하강…. 이들은 훈련관의 지시에 따라 자유자재로 속도를 조절했다. 내려오는 속도가 워낙 빨라 보는 사람이 아찔했다. 훈련을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을 보니 분명 여군이었다.

    ◇ 첫 번째 만남 : 베테랑 4인

    훈련 참관 후 특전사의 전설적인 여군 4명과 마주앉았다. 전명순(55) 준위, 최애순(44) 원사, 김정아(44) 상사, 강경희(39) 상사가 그 주인공이다.

    1981년 입대한 전 준위는 몇 가지 기록을 가졌다. 여군으로는 처음 고공강하 1000회 기록을 세웠고, 고공강하 국제심판 자격증도 땄다. 강하를 4000회 이상 한 특전사 여군은 전 준위를 포함해 2명뿐이다. 여군중대 고공팀장으로 활약한 그는 특수전교육단 고공강하 교관을 지내며 후배 양성에도 열성을 다했다. 특전사 여군 최초로 심리전 교육도 이수했다. 내년 1월 전역할 예정이다. 특전사 여군 최초 정년퇴직이라는 새 기록을 세우며.

    미사리 강물의 추억

    ▼ 그만두고 싶은 적 없었나.

    “거짓말 같지만 단 한 번도 없었다. 끝까지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 적성에 잘 맞았나보다.

    “난 잘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딱’이라고 하더라.”

    ▼ 여군을 안 했다면 뭘 했을 것 같나.

    “경찰. 그런데 여군이 낫다.”

    그에겐 ‘전군 1호 준위 부부’ 기록도 있다. 부사관 때 만나 2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는 4000피트(1200m) 이상의 고공강하 전문가다. 저고도 강하에 사용하는 원형 낙하산은 뛰어내리면 자동으로 펴진다. 하지만 고공강하용 사각 낙하산은 조작을 해야 펴진다. 그는 가장 힘들다는 HAHO(High Altitude High Opening · 고고도 활공침투) 훈련에도 참가했다. HAHO 훈련 고도는 최고 2만5000피트에 달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훈련은 공수기본교육이다. 겨울에 온종일 얼차려만 받기도 했다. 이런 걸 사람이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혹독했다. 그런 극한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낙하산을 펼 수 있었다. 그걸 해내고 나니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자신이 생기더라. 사실 나중에 그보다 훨씬 난도 높은 훈련을 받았는데, 처음 들어와 받은 교육이기에 크게 다가온 것 같다.”

    ▼ 첫 강하 때 기분은?

    “미사리에서 강하했는데 강물을 내려다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 잘못하다 죽겠다는 생각은 안 했나.

    “그런 생각하면 집에 가야지(웃음). 사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고공강하 할 때마다 한다. 자동차 운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방어하고 규정을 지키면 안전하다.”

    그는 “지상에 내려온 후 엄청 울었다”고 했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1982년 6월 1일 특전사 공수대원들을 태운 항공기가 기상악화로 청계산에서 추락했다. 이 사고로 특전사 대원 49명, 공군 4명 등 53명이 순직했다. 49명 중 44명이 그의 동기생이었다.

    “2진으로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빨리 낙하산 벗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호기가 추락한 것 같다’고 했다. 부대로 돌아오니 선배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뒤 그는 미사리에서 첫 강하를 했다.

    “동기들을 보내고 나서 올라가려니 몹시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교육단장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국군의 날 태권도 시범 훈련을 하는 여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맥주병’에서 ‘물개’로

    최애순 원사는 다부진 표정과 시원시원한 말투가 인상적이다. 1989년 임관한 최 원사는 특전사의 모든 훈련과정을 마친 최초 여군이라는 기록을 가졌다. 공수기본, 고공기본과정(HALO), 대테러 특수임무, 강하조장 교육(JUMP MASTER), 스킨스쿠버, 낙하산 포장 및 정비교육(RIGGER), 인간정보교육, 심리전교육 등을 이수했다. 입대 후 줄곧 707특임대에서 훈련받은 그는 2006년 이라크에 전투요원으로 파병되기도 했다. 태권도, 특공무술, 격투기 유단자로, 다 합치면 9단이다.

    ▼ 어떤 훈련이 가장 힘들었나.

    “가장 쉬운 게 뭐냐고 물어보라.”

    ▼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대답하려는 건가.

    “예리하시다(웃음). 모든 훈련에는 고통이 따른다. 고공강하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다. 살아남으려면 안전지역에 착지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산악지역이 많아 위험하다. 짧은 시간에 어느 지역으로 침투해야 할지를 판단해야 한다. 대테러 훈련도 만만치 않다. 체력단련은 기본으로 하면서 격투기와 근접전투기술, 장애물 극복훈련 등을 단시간 내에 소화해야 한다. 난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 남군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남들 자는 한밤중에 혼자 다리 찢기, 발차기, 낙법 훈련을 했다.”

    ▼ 체력으로는 아무래도 남군에 밀리지 않나.

    “그건 (기록의) 차이일 뿐이다. 특전사의 체력측정 기준은 일반 부대보다 훨씬 높다. 특전사 여군은 그 모든 훈련을 남군과 똑같이 받는다.”

    ▼ 하긴 최 원사는 웬만한 남군보다 셀 것 같다.

    “지금 부딪쳐도 지지 않을 것 같다. 어깨싸움에서 안 밀리니까(웃음). 남자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신력을 말하는 거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해상침투(해상척후) 훈련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파도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히는 바람에 까무러친 적도 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그는 이 훈련을 거친 후 ‘물개’가 됐다.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뒤엉킨 낙하산

    곱상한 외모의 김정아 상사는 고교 졸업 후 친구 따라 여군에 입대했다. 정작 친구는 탈락하고 그는 특전사로 배치됐다. 그의 특기는 태권도.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3단이었다. 1990년 임관한 그는 여군 최초로 세계군인체육대회에 태권도 대표선수로 2년 연속 출전해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8년 태권도에 에어로빅을 가미한 태권무를 제작해 전군에 보급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전사 여군 최초 부중대장, 최초 천리행군 완주 등의 기록도 그의 것이다. 707특임대 소속으로 이라크 파병에도 참여했다.

    ▼ 남군들 사이에서 힘들지 않았나.

    “그보다는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 남군들 시선이 쏠렸을 텐데.

    “같이 있으면 그런 시선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걸 대처하는 교육을 잘 받았기에 별문제가 없었다. 남군들도 교육이 잘돼 있는 편이다.”

    특전사 천리행군은 그냥 걷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일주일간 하루 60~70㎞씩 걸으며 갖가지 훈련과 전술을 익힌다. 피로골절, 낙마, 발목 부상 등으로 숱한 탈락자가 나온다. 그는 “너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빠질까 싶어서 대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대대장이 ‘여군으로서 처음이니 더 힘들 거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고 격려했다. 천리행군을 마치고 돌아오자 동료들이 부대 앞 도로에 늘어서서 박수로 맞았다. 내게는 특별히 꽃목걸이를 걸어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육아에 대해 묻자 그는 “나는 나쁜 여자”라며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이 이모인 여동생이 대신 돌봐줬다고 한다. 아들도 특전사를 지원할 생각이다. 그는 “내 자식이라 그런지, 솔직히 말리고 싶다”며 웃었다.

    건장한 체격의 강경희 상사는 직장생활을 2년쯤 하다 뒤늦게 입대했다. 어릴 때 대민지원을 하는 ‘군인 아저씨’들을 멋있게 느꼈던 기억이 그를 군으로 이끌었다.

    ▼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나.

    “(여군학교에서) 임관 2주 전 홍보 비디오를 보여줬다. 특전사 대원의 강하 시범을 봤는데, 나비 같았다.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특전사 갈 생각을 굳혔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공수교육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아버지께 좋은 유전자를 받은 덕분이다. 그런데 고공강하 훈련은 달랐다. 생각대로 몸이 안 움직이더라. 많이 울었다. 세 번 불합격이면 퇴교인데, 두 번 탈락하고 마지막에 겨우 통과했다. 고공을 시작하면서 군 생활이 즐거워졌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번은 여군 선배와 한 조로 고공강하를 하다 서로 낙하산이 포개졌다. 순간적으로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빠르게 빙빙 돌고 있었다. 피가 몰려 발이 터질 것 같았다. 가까스로 선배 낙하산과 분리하고 예비 낙하산을 펴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 순간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너무 끔찍했으나 교관의 지시로 곧바로 다시 올라갔다. 몹시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렇게 공포를 극복했기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

    1990년 9월 15일, 고공강하를 하던 여군 이모 상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군의 날 행사와 관련된 훈련이었다. 최 원사의 회고다.

    “몸이 산산조각 났다. 곧바로 검정 비닐봉지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를 정도로. 사고가 나고 곧바로 훈련할 때가 가장 힘들다. 그런데 그걸 극복하지 않으면 고공을 할 수 없다. 사실 나도 그날 강하를 하다가 허리가 꺾이면서 부상을 당했다. 파라포일이라고 새로 들여온 낙하산인데, 워낙 속도가 빨랐다. 해마다 그날이 되면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를 찾는다.”

    전 준위가 거들었다.

    “고공이 위험한 건 줄곧 일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 통나무처럼 구르게 된다. 그러면 예비 낙하산도 펼 수 없다.”

    강 상사는 고공훈련 때 만난 남군과 결혼했다. 결혼식도 고공에서 낙하산을 펴고 진행했다. 강 상사 부부를 포함한 세 쌍의 군인이 고공결혼식을 하는 장면은 TV 뉴스에도 나왔다.

    특전사 여군의 자녀는 어떨까. 강 상사는 딸만 셋이다. 큰딸이 중학생이 되자 3박4일 특전캠프에 보냈다. 딸도 좋아했다고 한다. 최 원사는 외아들에게 직접 낙법과 권투를 가르친다. 남편도 특전사 원사인 그의 꿈은 아들이 빨리 공수교육을 받아 세 식구가 함께 강하하는 것이다.

    ▼ 특전사를 지원하려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겉모습만 보고 지원하지 않으면 좋겠다. 끈기가 있어야 하고, 조국을 위해 내 한 목숨 바쳐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최 원사)

    ▼ 건의사항이나 희망사항이 있다면?

    “결혼한 여군은 군인이자 주부다. 육아 문제에 대해 좀 더 정책적으로 배려해주면 좋겠다.”(전 준위)

    “언론엔 화려한 모습만 비치고, 고생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남군보다 몇 배 노력한다는 걸 알아주고 지원해주면 좋겠다.”(강 상사)

    최 원사의 다음 말에 모두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연금이 많다고 하는데, 목숨 바쳐 일하는 것을 금전적 잣대로 재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기분 참 안 좋다. 낙하산은 우리의 생명이다. 왜 그런 데 사용하나. 앞으로 ‘낙하산’이라는 말을 빼주길 정중히 부탁드린다.”

    ◇ 두 번째 만남 : 신세대 3인

    접견실에 들어선 특전사 20대 여군 3명은 영락없는 소녀였다. ‘중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셋 다 하사로, 입대 연도가 한 해씩 차이 난다. 나이도 한 살 터울이다. 미소년 이미지의 박○○ 하사가 22세, 허스키한 목소리의 민○○ 하사가 21세, 앳된 얼굴의 노○○ 하사가 20세다(세 하사는 부대 측 요청에 따라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훈련이 뭔가?” “가장 쉬운 훈련은 없다!”
    ‘무박7일’의 쪽잠

    이들은 여군훈련소나 여군학교를 거친 선배들과 달리 처음부터 특전사 부사관 시험을 봐서 들어왔다. 훈련기간은 15주. 군인화 교육 5주에 공수기본 교육 3주, 신분화 교육 7주다.

    사격선수 출신인 박 하사는 여군 저격수 1호다. 체육중학교와 체육고교를 다닐 때 전국 대회를 휩쓸었다. 특전사 입대 후 3주간 특수교육을 받고 여군 최초 저격수라는 영예를 안았다. 실력을 묻자 “1㎞ 거리의 표적을 맞힐 수 있다”고 한다. 그는 707특임대 여군중대에서 1년가량 근무했다. 거기서 초급 특수전 교육을 마치고 저격수에 필요한 위장 특기 교육을 받았다.

    경기도 하남에서 자란 민 하사는 어릴 때 공수대원들의 고공강하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노 하사는 특전사 군인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오빠도 특전사 소속이었다. 아버지를 끔찍이도 좋아하고 존경한 터라 아버지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특전사를 지원했다고 한다.

    민 하사는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특전교육단에서 남군과 똑같은 교육을 받고 천리행군을 마쳤다. 남군과 똑같은 무게의 완전군장을 한 채. 노 하사도 마찬가지다. 무박7일의 중무장 전투행군. 취침시간이 따로 없었다. 식사 후 휴식시간에 길가에서 5~10분씩 쪽잠을 자야 했다.

    ▼ 정말 끝까지 했나.

    “남군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악착같이 했다.”(민 하사)

    ▼ 행군 마쳤을 때 기분은?

    “감격적이었다.”(노 하사)

    부상 여부를 묻자 세 사람 다 “무릎이 아프고 발에 물집이 생겼다”고 말했다. 다른 데는 이상이 없었다고 하니 놀라운 체력이다. 여군 탈락자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남군 중에 낙오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민 하사는 “정신력”, 노 하사는 “오기”라고 설명했다.

    ▼ 여군이 남군보다 낫다는 건가.

    “전투는 체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박 하사)

    박 하사는 2013년 2월, 무려 60대 1의 경쟁을 뚫고 특전사 여군 부사관 시험에 합격했다. 같이 사격하던 친구 몇 명도 지원했는데 다 떨어지고 혼자 붙었다고 한다.

    ▼ 굳이 특전사를 지원한 이유는?

    “사격밖에 잘하는 게 없으니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 사회에서 취직이 안 될 것 같아 특전사로 온 건 아닌가.

    “그럴 거면 좀 더 편한 부대로 갔겠지. 여긴 너무 힘드니.”

    저격수의 고통

    박 하사가 받은 저격수 훈련은 특별한 체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K-14 저격용 소총은 부품 무게를 합하면 8㎏이다. 거기에 위장복과 기타 장비를 합하면 군장 무게가 40㎏이나 된다. 그 몸으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어간다.

    “저격수는 매복해서 쏜다. 적에게 안 들키려면 기어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해야 한다. 벌레한테 배를 물려가면서. 군장한 채 언덕을 기어오르는 게 너무 힘들다. 정말 집에 가고 싶을 정도로. 일반 군인은 10~20발 쏴서 목표물을 제압하면 되지만, 저격수는 딱 한 발로 사살해야 한다. 8시간 동안 엎드려 한 곳만 보는데 타깃이 딱 한 번 올라오기도 한다. 1분 정도 시간을 주는데 바람까지 계산해 정확히 맞혀야 한다.”

    민 하사는 가장 힘든 훈련으로 천리행군을 꼽았다.

    “잠도 못 자고 계속 걸으니 걷는 건지, 자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노 하사에겐 생존훈련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천리행군 전에 생존훈련을 한다. 3박4일간 산에서 굶고 지내야 한다. 너무 배가 고파 진달래 따 먹고 도토리 구워 먹었다.”

    공수훈련을 하면 다리를 다치는 사람이 많다. 박 하사 말대로라면, 한 번 할 때마다 10명 안팎의 부상자가 나온다. 다행히도 세 사람은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빨리 고공(강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본강하 10회 이상을 해야 고공강하 교육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 기본강하는 특전사 대원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고, 고공강하는 자원해 교육을 이수한 사람만 할 수 있다.

    여군 부사관의 의무복무기간은 3년. 남군은 1년 더 길다. 세 하사는 모두 장기복무를 희망한다. 내년에 정년퇴직하는 전명순 준위를 거론하며 “정년까지?”라고 묻자 한목소리로 “예” 한다. 신참이라 그런지 두 하사는 박 하사에 비해 말이 짧다. 긴장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다. 주로 박 하사가 대답한다.

    ▼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너무 힘들게 들어와서 나가고 싶지 않다.”

    ▼ 한창 꽃다운 나이에 남자도 견디기 힘든 곳에 들어와 왜 사서 고생하나. 포기해야 할 것도 많을 텐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다.”

    ▼ 어릴 때부터 선수생활을 해 단체생활에 질릴 법도 한데.

    “오히려 단체생활을 안 하면 불편하다. 스무 살 돼 몇 달 놀다보니 나태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빨리 들어왔다.”

    ▼ 특이하다.

    “내가 생각해도 특이하다(웃음).”

    민 하사는 “배우는 게 많아 좋다”고 했다.

    “친구들이 밖에서 노는 게 부럽긴 하다. 하지만 가치를 따져보면, 여기서 얻는 것과 배우는 것이 더 많다.”

    고졸 학력인 세 하사는 모두 군에서 대학을 다닌다. 부대 내 야간대학으로, 외부 교수가 와서 강의한다. 주거지는 여단 주변 여군숙소(아파트). 3명이 한 아파트를 쓴다. 직업군인이라 출퇴근한다. 보통 7시 출근에 6시 퇴근이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어디를 가든 부대로 한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군인의 길 걷지 않았다면…

    여군으로서 불편한 점을 묻자 훈련 중 ‘볼일 보기’를 꼽았다. 남군들 눈이 있으니 멀리 안 보이는 데(보통 200m)까지 갔다 와야 한다며. 그 밖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바로 조치해주기 때문에 별 불편함 없이 생활한다. 여군 선배들이 많이 고생하면서 해결해준 덕분이기도 하다.”(박 하사)

    영화 ‘연평해전’ 얘기를 꺼냈다.

    ▼ 전투 장면 보면서 느낌이 어땠나.

    “참전하고 싶었다.”(박 하사)

    “군인으로서 사명감을 느꼈다.”(민 하사)

    “실제로 전쟁 나면 나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노 하사)

    갓 스물인 노 하사는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소방공무원에 도전했을 것 같다”고 수줍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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