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 “서태평양 통제권 넘기라” 요구
- 중국 내해(內海)로 변하는 한국 서해
- 美, 서태평양에서 ‘후퇴’할 수도
- 韓, 체스판 卒 노릇해선 안 돼
9월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항일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
전투기 합동 기동을 전후해 미국 항공모함 전단(戰團)과 B-2 스텔스 폭격기 및 F-22 랩터 전투기의 한반도 전개를 예측하는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치달을 것 같던 DMZ 지뢰 위기는 남북 고위급 접촉 개시와 함께 수그러들었다. 우리 재래식 군사력의 3분의 1, 경제력의 50분의 1도 채 안 되는 북한을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고서야 제압한 셈이다. 여기에서 보듯 우리가 안보 측면에서 의지할 가장 확실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G2로 부상한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화하고 있다. 우리가 안보를 굳건히 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세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최강대국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에서 경기침체와 정치 불안정이 나타나고, 한국의 경제력·군사력이 공업화 진전 덕분에 충실해진 2000년대 초 이전까지 미국은 한국을 제대로 된 군사협력 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주요 행위자로 참가하는 동아시아 체스판의 졸(卒)에 불과했다. 미국은 한국보다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 개발을 추구해온 북한의 동태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미는 여전히 미·영, 미·이스라엘과 같은 정도의 혈맹관계(staunch ties)가 아니며, 미·일관계보다도 긴밀도가 낮다. 미국은 한국의 국익과 직접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한국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가 한국의 영토 통합과 직접 관련된 독도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서라도 더 강력한 동맹인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한국의 탄도미사일 능력 증진에도 부정적이다. 미국이 현재 800㎞인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추가 연장에 부정적인 것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정책 외에도 한국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동의하면 일본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 중국의 저항을 유발할 것으로 본다.
독도에서 한·일이 맞붙으면…
미국은 이렇듯 군사 부문에서 확연하게 차별한다. 한국과 일본은 다 같이 록히드마틴의 F-35 전투기 도입을 추진하는데, 미국은 일본에는 마하 4의 유럽제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 미티어(Meteor)를 장착하도록 허용한 반면 한국에는 불허했다. 우리와 일본 공군기가 독도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이면 우리 공군기가 격추될 공산이 클 수밖에 없게 됐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 달리 한국에는 전투기 기체만 팔고, 무장 통합을 할 기술이나 소스 코드(source code), 정비 권한을 주지 않는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해 중국군이 북한에 진입하고 우리가 이에 맞서 국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전개할 경우 미군이 우리와 함께 중국군에 맞서 싸우려 할지도 불명확하다. 미국은 1951년 1·4 후퇴 때 중공군이 강원도 원주 이남으로 밀고 내려오려 하자 한반도를 포기하려 한 전력이 있다.
세계의 제국 미국은 분명한 외교 우선순위를 갖고 있다. 동맹국이 요청해도 미국의 국익에 합치할 때만 움직인다. 또한 에너지 안보 확보, 이스라엘 방어 등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먼저 끄고 난 다음에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라늄 농축 문제와 관련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끈질기고 강력하게 반발하는데도 지난 7월 이란과 타협한 데서 보듯 세계 각지의 다종다양한 문제에 동시에 개입할 힘도 줄었다. 북한의 안보 위협 저지를 포함해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하는 군사안보 문제에 스스로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동아시아 국제 정치판의 졸로 전락할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 북아메리카 대륙의 중심부를 영토로 하는 면적 982.6만㎢(세계 3위), 인구 3억2000만 명(세계 3위), GDP 16조8억 달러(세계 1위)의 최강대국이다. 기축통화 발권력을 가졌으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체제도 장악했다. 영어와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막강한 문화권력도 지녔다. 미국의 군사력 투사 범위는 옛 몽골제국이나 대영제국보다 넓다. 동아시아, 유럽, 중동 등 대륙과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등 대양의 130여 개 국가에 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개하고 있다.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했으나 영국과 독일 등 유럽 문화를 기원으로 하는 미국은 18세기 말 건국 이래 늘 유럽 우위, 즉 대서양주의에 기초한 대외정책을 취해왔다. 2013년 겨울 베이징에서 만난 주중(駐中) 미대사관의 한 외교관(한국 근무 경력도 있다)은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은 늘 유럽이었고, 중국이 부상한 지금도 유럽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외교안보정책 목표 중 가장 중요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본토를 외침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대량파괴무기 확산을 저지해야 한다. 둘째,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양 날개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함께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자유롭고 개방된 세계경제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넷째, 매장량이 풍부한 대규모 셰일가스전을 갖고 있으나 안정된 에너지 공급선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페르시아 만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다른 나라의 독점적 지위 확보를 막아야 한다.
이 가운데 우리와 가장 밀접한 것은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독일 등 강국이 위치한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세력균형 유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력균형이 무너지면 미국의 패권도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한국의 국가 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13억5000만 인구의 초대국 중국의 부상과 도전은 독일의 히틀러 제국이나 일본제국, 소련의 도전과는 규모가 다르다. 미국은 지금껏 상대한 나라와는 판이한 규모와 문화를 가진 국가의 도전에 직면했다.
美의 對日 애증 변주곡
미국은 1776년 대서양 연안 13개 주에 나라를 세운 이래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19세기 중반에는 태평양 연안 캘리포니아에 도달했다. 1893년 하와이를 거쳐 1898년에는 타이완 남쪽에 위치한 필리핀까지 손에 넣었다.
필리핀에 교두보를 확보한 미국은 거대 국가 중국에 대한 이권을 놓고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유럽 국가 및 일본과 경쟁했다. 당시 중국 연안에서 제동이 걸린 미국의 관심은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특정 국가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 즉 세력균형 유지로 바뀌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세력균형 유지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적국은 1900년대 초까지는 러시아,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데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한 영·미(Anglo-Saxon) 세력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일본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로 주일(駐日) 미대사관 무관이던 아서 맥아더도 참관한 뤼순(旅順) 203고지 전투 등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직전 미국과 일본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맞교환했다. 영국은 2차례에 걸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을 지원했다.
미국은 러일전쟁 이후 뤼순과 다롄(大連)을 포함한 남만주 이권을 놓고 일본과 갈등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조선 병탄은 약 5년 지체된 1910년에야 완성됐다. 대공황(1929~1939) 발생 직후인 1930년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주요 관심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만주와 중국 본토, 동남아, 서태평양 군도를 놓고 벌어진 미·일 간 갈등은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이어져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종전 후 미국은 장제스의 중국을 지원해 러시아의 확대판인 소련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으나, 1949년 10월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일본을 동아시아 제1동맹국으로 선택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NATO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의 보루인 미국의 양 날개 중 하나가 됐다.
2차대전 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기초가 된 것은 독도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기도 한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초안과는 달리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해야 할 한반도 도서 중 하나로 독도를 명기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불씨가 됐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일본이 포기해야 할 도서의 예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명기했다.
애치슨 라인, 닉슨 독트린
1948년 한반도 북부에 이어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했지만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여전히 낮게 봤다. 미국이 38선 이북을 소련에 넘겨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딘 애치슨 당시 미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미국신문기자협회 연설에서 미국의 서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일본 열도-오키나와 열도-필리핀 열도를 잇는 선이라고 선언했다.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위선 밖에 놓은 애치슨 라인은 북한 공산세력의 남침 욕구를 자극했다.
1950년 6월 25일, 6만여 명의 재만(在滿) 조선인 병력이 주공(主攻)이 된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하자 미국은 일본 방어와 함께, 소련의 서진(西進) 시도와 관련해 서독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으리라는 우려 때문에 전쟁에 개입했다. 전쟁이 소강 국면에 들어간 1952년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부산 정치파동(직선제 개헌)’을 계기로 공산 측과의 휴전협상을 방해하던 이승만 제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16일 서해 공해상을 항해 중인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 F-18 호넷 전투기가 착륙하고 있다.
한국과 남베트남 등 동아시아 연안(rim)으로 군사력 전진 배치를 추구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교착 상태에 놓인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제2의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다시 한 번 서태평양 열도선(오키나와-괌)으로의 후퇴를 선언했다. 닉슨 독트린은 1970년대 초 △미·중 및 중·일 수교 △오키나와 행정권 일본 반환 △제7사단 한국 철수 △미군의 남베트남 철수로 이어졌다. 닉슨 독트린은, 중·소 분쟁을 이용해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제공해 소련과의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재정과 무역의 쌍둥이 적자가 누적되고,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하며, 9·11테러가 상징하듯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의 도전이 첨예화하면서 일대 위기를 맞았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이란과의 계속된 대립 등으로 인해 중국의 부상에 제대로 대응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는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의 도전도 도전이지만,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한 전통적 경시도 큰 몫을 했다. 미국은 서부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과 함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가진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을 집중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2008년 경제위기로 전 세계가 불안정에 처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경제성장은 지속됐다. 2014년엔 구매력(Purchasing Power Parity) 기준으로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추월했다. 일본마저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두고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대만,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 한국 등 인근 국가를 경제적으로 포용하는 한편, 해·공군력 증강을 통해 남중국해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얀마,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세이셸, 탄자니아 등의 인도양 항구들을 목걸이 형태로 연결하는 군사전략, 이른바 ‘진주목걸이 전략’으로 아프리카 동해안을 포함한 인도양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했다. 우리의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는 중국의 내해(內海)로 변해가고 있다. 중·일 갈등의 진원지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도 중국의 동진(東進) 추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중국은 센카쿠 열도 분쟁을 국가통합과 서태평양 진출의 전제조건인 해·공군력 강화 기회로 이용한다. 또한 미국에 ‘신형대국’ 관계를 주장하면서 서태평양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줄 것도 요구한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에서 지배적 위치가 흔들리자 2009년 2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설을 통해 ‘아시아 회귀(re-balancing to Asia)’를 선언했다. 레이 마부스 해군장관은 2014년 6월 척당 33억 달러에 달하는 1만5000t급 스텔스 구축함 3척이 건조되면 태평양 지역에 우선 배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늦은’ 아시아 회귀
하지만 때늦은 결정이었다. 1980년 미국-동아시아 간 무역액이 이미 미국-유럽 간 무역액을 능가했으며, 2000년에는 동아시아로부터의 수입액이 미국-유럽 간 무역액을 추월했다. 초대국 중국의 부상이 1970년대 말부터 시작돼 2000년대 초에는 도약 단계에 들어섰는데도 미국은 여전히 대서양주의(유럽 우선주의)에 빠져 있었다. 미국이 동맹국과 우호국에 제공할 경제·안보자산은 점점 줄어든다. 향후 미국의 최대 과제는 재정 부족과 동아시아 동맹국이 미국에 대해 갖는 신뢰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될 것이다.
미군을 ‘전략적 유연성’ 개념의 기동군 형태로 개편하는 것도 해외 곳곳에 고정된 군부대를 주둔시킬 재정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국가와 역사’에 따르면 로마제국도 국력이 쇠퇴하는 말기로 가면서 전략적 유연성에 기초해 라인 강, 도나우강, 브리타니아(영국), 다키아(발칸 반도) 등 곳곳의 전선에 주둔군이 아닌 기동군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을 변경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도 마찬가지다. 대영제국이 1950년대 중반 이후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 등을 제외한 수에즈 운하 인근의 해외 군사기지를 포기한 것도 결국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2013년 기준 매년 1500억 달러 안팎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중국은 2014년부터 연 10% 넘게 국방비를 증액했다. 8~9년 후에는 미국과 유사한 수준의 국방비를 지출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되면 20년 후 중국은 적어도 규모 측면에서는 미국과 유사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할 전망이다. 산업화한 초대국 중국의 군사력 증강 속도는 그만큼 빠르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일본, 영국 등이 축적한 것과 같은 전쟁 경험이 없다. 같은 첨단무기로 무장해도 훈련만 한 군대와 실전을 경험한 군대의 차이는 크다. 중국의 군사력은 이 점을 감안해 평가해야 한다. 중국의 우주전력도 세계 최강 미국에 비해 크게 열세다. 전통적 육군 국가인 중국의 해·공군력 역시 미·일에 비해 취약하다.
중국의 연안 지역을 직접 겨냥할 수 있는, 백령도-평택-제주도를 연결하는 한국 서해안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과 관련해 ‘비등점’은 동중국해, 남중국해와 함께 서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는 중·일 간 충돌의 현장인 동중국해와 함께 국가 운명과 직접 관련된 서해가 특히 중요하다. 현재의 국력 증강 속도를 감안하면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15~20년 후에는 적어도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 패권국가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제2도련선’
그렇다면 미국은 중국의 부상과 도전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 지난봄 다롄에서 만난 중국 선양군구 소속의 한 장군은 “미국과 같은 세계제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도전국을 선제공격하는 것이다. 패권국이던 티무르 제국이 1402년 7월 앙카라에서 신흥제국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오스만투르크는 황제 바야지트 1세가 티무르 제국군에게 사로잡히는 등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후 국가 재건에 수십 년을 소모했다.
둘째, 도전국을 봉쇄하는 것이다.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미국의 대(對)소련 봉쇄정책이 그런 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는 한편, 이후 소련과 중국 간 갈등을 이용해 중국을 끌어들인 뒤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셋째, 도전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들과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 도전국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다. 현재 미국이 추진하는 한국·일본·호주·베트남 등 동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동맹 강화, 일본, 호주, 베트남, 싱가포르 등과의 환태평양자유무역협정(TPP)을 포함한 경제협력망 구축 시도가 그런 유형이다.
넷째, 후퇴해서 세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상황이 유리하게 변화할 때 도전국을 응징하는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가 촉한(蜀漢) 제갈량이 공격해오자 일단 후방인 위수(渭水) 유역으로 후퇴해 있다가 제갈량이 병사하고 촉한이 약해지자 대군을 보내 일거에 촉한을 멸망시킨 것이 그러했다. 닉슨 독트린도 여기에 해당된다.”
미국은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수준의 상호 핵무장과 경제의존 때문에 도전국 중국을 향해 선제 군사공격을 가하거나 경제봉쇄정책을 펼 수 없다. 경제력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중국의 팽창을, 상대적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하는 미국은 일정한 선까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미국은 또 ‘후퇴’할 것인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군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해군제독 류화칭(劉華淸)은 1980~1990년대 중국의 중장기 해양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세계 물동량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해양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대양해군’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오키나와를 기점으로 우선 대만, 필리핀, 보르네오에 이르는 선을 제1도련선(第一島련線)으로 정하고, 2010년대에는 이 해역에서 미군을 축출한다는 것이다. 이후 2030년까지는 항공모함 편대를 구성해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를 연결하는 제2도련선 해역에서 중국의 제해권을 수립하는 것이 주요 글자다.
제2도련선은 2차대전 때 일본의 태평양 최대 팽창선과 상당 부분 겹친다. 2012년 중국 해군의 양이(楊毅), 인줘(尹卓) 제독 등은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관관계에 비춰볼 때 미국 해군은 머지 않은 장래에 제2도련선 밖으로 후퇴를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세력 보존을 위해서라도 서해-오키나와 제도-대만-남중국해 라인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제2도련선 이동(以東)의 하와이 라인으로 후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로버트 카플란은 ‘중국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Chinese Power)’에서 미국이 국력을 회복하려면 중국에 서태평양을 양보해 하와이로 후퇴하고, 일본이나 한국 등 동북아시아보다는 인도양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앞으로 신(新)고립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중국이 주도하고 일본, 인도, 한국, 호주, 베트남 등이 참가하는 새로운 체제에 아시아를 맡겨놓고, 활동범위를 동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으로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더 깊어가는 한국의 고민
미국은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패권을 포기하고 하와이 선으로 후퇴하더라도 유라시아 대륙의 서반부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동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 등 세계 육지와 해역의 3분의 2 이상을 계속 통제하면서 중국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 자원 부족이라는 약점을 지닌 중국이 미국의 견제와 일본, 러시아, 인도 등의 저항을 뚫고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서 확고한 패권을 수립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미국은 일본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팽창하던 1930~1940년대 초 짧은 기간 하와이 라인(line)으로 후퇴한 경험이 있다. 일본은 1931년 만주, 1937년 중국 본토의 화북·화중 일부, 1941년 홍콩을 점령했고 동남아를 거쳐 인도를 향해 진군했다. 1941년 12월 항공모함 기동대를 앞세워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데 이어 1942년 4월에는 필리핀 마닐라만(灣) 바타안 반도에서 필리핀 주둔 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전성기 일본은 웨이크 섬, 솔로몬 제도, 길버트 제도 등 하와이 이서(以西) 서태평양 거의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국토 면적, 인구, 경제력 등 여러 측면에서 기본 국력이 약한 일본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전쟁을 통해 크게 팽창했다가 결국 패배하면서 현재 규모로 축소됐다. 그러나 중국은 19~20세기 전반기의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 경제력을 배경으로 서서히 팽창해 나가기에 속도는 완만해도 일단 팽창하고 나면 세력을 오래 유지할 것이다.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2차대전 전승절 기념행사 때 드러났듯 우리 대통령과 국가안보실장, 외교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 담당자들의 고민이 한층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