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제게 이런 심리적 거리를 전혀 느끼지 않게 해준 서양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입니다. 고야의 그림은 다소 독특합니다. 처음부터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낯섦, 불쾌함, 고통스러움을 안겨주는 그림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에서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이 인간 존재와 삶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서일까요? 고야가 작품을 발표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제 눈에는 그의 그림이 여전히 현재적이고, 또 미래적이기까지 합니다.
평생 동안 ‘변화’ 모색
고야를 서양 회화의 특정 유파로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럽 회화를 이끈 나라는 프랑스입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프랑스 회화를 주도한 것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입니다. 절제와 균형을 목표로 한 신고전주의 회화와 비교해 고야의 작품은 오히려 자유로운 감정을 중시한 낭만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야를 낭만주의 회화에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그는 평생을 거쳐 변화를 모색했고, 그 변화 속에 도달한 세계는 우리 인간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안겨줬습니다.
고야의 회화는 다채롭습니다.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화도 있고, ‘카를 4세의 가족’ 같은 궁정화가의 면모를 드러낸 작품도 있습니다. 또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 같은 시대적 사건을 담은 뛰어난 역사화를 제작했습니다.
회화와 함께 고야는 몇 개의 판화집을 발표했습니다. ‘전쟁의 참화’와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는 대표적인 화집으로 꼽힙니다. 오늘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작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1799)’는 ‘로스 카프리초스’의 43번째 작품입니다. 에칭과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제작된 ‘로스 카프리초스’는 총 80장으로 이뤄졌습니다. ‘로스 카프리초스’는 ‘일시적 기분’ 또는 ‘변덕’을 의미합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성이 잠들 때 우리는 갑자기 미지의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비합리성, 불안, 폭력, 광기와 같은 그 괴물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결국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잠자는 이의 주변에 나타난, 고양이·올빼미·박쥐 등의 형상을 한 괴물들의 표정은 기이하고 섬뜩하며, 또 간교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괴물들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합니다.
고야는 1792년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해 결국 귀머거리가 됐습니다. ‘로스 카프리초스’는 1790년대에 제작됐는데, 이 화집은 당시 계몽주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고야는 낙후된 스페인이 발전하려면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이성이 왜 우리 인간 삶의 중심적 거점이 돼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 고발
이 작품을 볼 때면 저는 이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성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능력입니다. 흔히 감성과 대비됩니다. 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본질적인 특성으로도 정의합니다. 이성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발견한 철학자로는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가 손꼽힙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이 생각하는 힘과 능력이야말로 이성의 중핵을 이룹니다.
이성에 담긴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합리성입니다. 합리성이란 이치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여러 이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결과를 설명할 때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생각하게 되는데, 원인과 결과가 이치에 맞는다면 그 생각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합리적 생각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의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성은 사람들 간 소통의 출발점을 이루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선 서로 주고받는 주장이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소통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성이 과도하다면 상담학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만은 않습니다. 이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감성입니다. 감성은 성공적인 인간관계의 핵심 요소인 공감을 만드는 원천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대부분의 경험은 차가운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성과 더 관련 있음을 고려할 때, 이성과 감성이 적절하고 균형 있게 발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야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검은 그림(Black Paintings)’ 연작입니다. 귀머거리가 된 고야는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흔히 ‘귀머거리의 집’으로 알려진 별장에 살면서 1823년까지 집 안 벽면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중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진 이 작품들은 당시 고야의 내면세계를 생생히 담았는데, 음울하고 기괴하며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14점의 연작 가운데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모래 늪의 개’ ‘성 이시드로의 축제’ 등은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곤봉 결투(Fight with Cudgels·1820~1823)’도 그 하나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두 사람이 모래 또는 늪에 서서 싸웁니다. 모래 또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선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공격합니다. 이 싸움은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이 작품을 놓고 어떤 이들은 당시 유럽 국가 간 전쟁 또는 스페인 내전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을 통해 고야는 인간에 내재된 광기와 폭력성을 비판하며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비이성에 대한 풍자
‘검은 그림’ 연작은 187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국제적으로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관람객들은 이 작품들을 미친 화가의 작품으로 여기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상파 화가들만이 이 연작을 주목했는데, 어둡지만 강렬한 이미지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야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들이 인상주의 화가들만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화가들도 작지 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화가이지만, 고야는 20세기적 감각을 가졌던 셈입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을 산 고야가 우려한 것은 이성의 과잉이 아니라 이성의 과소입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영국, 프랑스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발전 속도가 느렸습니다. 고야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이 이성보다는 종교적 열정에,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적 의례에 관심이 더 큰 것을 불만스러워했습니다. 이웃 나라 프랑스의 대혁명을 이끈 계몽주의에 공감한 고야는 당시 스페인의 비이성적인 현실에 대한 회의와 풍자, 고발을 ‘로스 카프리초스’에 담았습니다.
제가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와 ‘곤봉 결투’를 주목하는 이유는 고야 이후의 시대적 변화에 있습니다. 고야가 죽고 난 다음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한 계몽주의는 역사에서 승리했습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국가 대다수는 발전 목표를 이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짧은 시간에 모범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궈냈습니다.
‘곤봉 결투’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승리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현대사회에서도 비합리성·광기·폭력과 같은 괴물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뒤흔들어놓습니다. 도리어 오늘날 불확실한 정보나 편견을 기반으로 해 다른 이를 비난하고 배척하며 낙인찍는 폭력적 행위가 더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매일 모 방송사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해 하루에 일어난 주요 사건사고에 대해 평론을 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 시대 각종 사건 및 사고가 하루하루 더 잔혹한 형태로 진화한다는 점입니다. ‘이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제의 기대가 오늘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 마음이 매우 착잡해집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선한 존재일까요,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요.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천국에 가까운 곳일까요, 아니면 지옥에 가까운 곳일까요.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따뜻한 관계가 인간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상담사인 저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긍정성을 놓고 싶지 않지만, 타인의 목숨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의 범죄성을 목도할 때면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는 절충적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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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지없이 편견, 광기, 폭력으로 인한 사고가 신문과 인터넷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며 고야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모색한 화가입니다. 고야 시대의 제어되지 않는 광기는 긴 역사의 강을 넘어 현재에 더 활개를 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무엇이 부족해 이렇게 병든 사회가 되어버리는 걸까요. 고야의 메시지처럼 우리의 이성이 잠들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아니, 이성뿐 아니라 우리 안의 사랑도 너무나 깊이 잠들어버린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