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9-23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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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프랑스로부터 에이커당 42센트라는 헐값에 사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땅의 가장 큰 도시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 이곳에선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 막스 베크만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세인트루이스 포레스트 공원에 자리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미국 중부에는 캐나다 국경 부근에서 발원해 미국을 동서로 나누며 남북으로 흐르는 커다란 강이 있다. 세계에서 4번째로 긴 미시시피 강이다. 강은 미국의 10개 주를 통과하며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내륙 중간쯤에 자리한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St. Louis)다. 도시 서쪽 끝 드넓은 녹지대 포레스트 공원(Forest Park)에 소담스러운 대리석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Saint Louis Art Museum)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인근 지역과 합쳐 3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1673년 서양인이 처음 찾아들었고, 프랑스인들이 미시시피 강을 탐험하다 이곳을 발견해 자연스럽게 프랑스 지배령이 됐다. 1764년 프랑스인들이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정식 행정구역으로 승격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22년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미국 전역의 도시에 미술관 설립 붐이 일던 1879년 만들어졌지만, 당시엔 예술학교 부속기관에 불과했다. 예술학교는 1881년 별도의 조직으로 독립했고, 미술관은 따로 남아 워싱턴대(Washington University) 부속기관으로 넘어갔다. 미술관 건물은 시내에 있었는데 그저 미술관 흉내를 내는 수준에 그쳤다.

    ‘루이지애나 매입 사건’



    그 후 20여 년이 지나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는데, 이를 계기로 미술관은 지금의 포레스트 공원으로 옮겨와 제대로 된 미술관으로 정식 출범했다. 1909년에는 워싱턴대와도 완전히 분리돼 간판도 시립미술관(City Art Museum)으로 바꿔 달았다. 1912년에는 미술관을 관장할 재단도 생겼다. 지금의 이름은 1972년에 붙여졌다.

    미술관은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관람객은 연간 50만 명 이상. 미주리 주는 미국 대륙 중앙에 자리한 내륙 대평원인데, 이 미술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미술관이다. 미 중부 내륙의 빛나는 보석이라 하겠다.

    1803년 미 중부에서는 국토의 ‘틀’이 잡히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 사건’으로 알려진 일이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사들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와 미시시피 강 사이 땅은 대부분 프랑스령이었다. 오늘날 미국 영토의 23%에 해당하는 땅을 사들인 값은 2011년 화폐가치로 2억2000만 달러(약 2300억 원). 1에이커(약 1200평)당 42센트다. 코미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을 해낸 사람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땅을 판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유럽에서 영토 확장을 위해 그 많은 전쟁을 감행한 사람이 미국에서는 자신이 점령한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싼값에 팔아넘겼다. 나폴레옹은 이 ‘거래’를 승인하며 “영국도 이제는 미국 때문에 골치깨나 썩고 조만간 콧대가 꺾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때 나폴레옹에겐 미국을 이용해 영국을 견제하겠다는 얄팍한 심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미국으로 팔린 땅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세인트루이스에서 루이지애나 매입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박람회를 유치한 것이다. 행사는 더 크게 할 목적으로 1년 연기돼 1904년에 열렸다. 박람회의 정식 명칭은 ‘루이지애나 매입 기념 박람회(Louisiana Purchase Exposition)’. 포레스트 공원과 인근 워싱턴대에서 개최됐고, 당시까지 세계 최대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를 위해 예술궁전(The Palace of Fine Art)을 지었고, 현재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해에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제3회 하계 올림픽도 열렸다. 원래 올림픽 개최지는 시카고였는데, 박람회 조직위원회가 행사의 일환으로 별도의 스포츠 행사를 계획하자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이 시카고 올림픽이 박람회 스포츠 행사로 무력화할 것을 걱정한 끝에 올림픽 개최지를 세인트루이스로 바꿔버렸다. 당시 올림픽은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최고의 국제행사인 박람회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올림픽도 포레스트 공원에서 열렸다. 1876년 만들어진 이 공원은 200만 평 규모로 미술관뿐만 아니라 골프장, 자연사박물관, 동물원, 과학관, 각종 스포츠 시설과 호수 등을 갖춰 오늘날에도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의 여유로운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 대회인 ‘데이비스컵’을 만든 데이비스 가문, 저널리즘 분야의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만든 퓰리처 가문은 모두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자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대형 그림 3점이 걸린 전시실.



    퓰리처의 고향

    새뮤얼 데이비스(Samuel C. Davis)는 호러스 스워프(Horace M. Swope)와 함께 1940년 미술관의 소장품 목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의 창시자인 드와이트 데이비스의 형. 그는 1893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미술품 수집을 위해 세계 여행을 다닐 정도로 미술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202점이나 되는 중국 도자기를 포함해 수많은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호러스 스워프 역시 하버드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700점이 넘는 인상파 작품을 비롯해 광범위한 장르의 작품을 미술관에 넘겨줬다.

    퓰리처상(Pulitzer Prizes)은 유명한 저널리스트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의 손자 조지프 퓰리처 주니어 역시 세인트루이스 태생의 저널리스트로 1940년대 후반부터 50여 년간 변함없는 미술관 후원자였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현대 작품을 많이 기증했다.

    이처럼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이 지역 부자와 명사들의 기여로 명문 미술관으로 성장했다. 미술관 설립 초기인 1917년에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큰 담배회사를 경영하다 작고한 대니얼 캐틀린의 부인이 바비종파와 헤이그파 그림을 30점 기증한 바 있다. 1920년대에 와서는 주물공장과 철도사업을 운영하던 윌리엄 빅스비가 중국 작품들을 미술관에 헌납했다. 그는 미술품 수집을 목적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까지 여행했다.

    제약업으로 부를 쌓은 제임스 발라드는 카펫에 미친 사람이다. 그는 카펫을 수집하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40개가 넘는 나라를 찾아다녔다. 1929년 70여 장의 카펫을 미술관에 기증했고, 딸에게 물려준 카펫 중 일부도 그 딸이 1972년 미술관으로 보냈다.

    1950년대에는 변호사이자 은행가인 제이 라이언버거 데이비스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균형 있게 수집한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해 소장품 목록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 또한 중개회사 점원으로 시작해 투자중개업 등으로 대부호가 된 마크 스타인버그는 아내와 함께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유럽의 근·현대 회화와 조각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부부의 딸과 사위도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로 활동했다.

    시드니 쇤버거는 백화점과 금융업을 하면서 큰돈을 번 사업가다. 그는 1955년 쇤버그 재단을 만들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큰돈을 기부했다. 미술관은 이 돈으로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등 2차 대전 후의 미국 현대 그림을 대량 구매할 수 있었다. 그의 두 아들도 미술관 후원을 이어나갔다.

    베크만과의 인연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막스 베크만, ‘푸른 재킷을 입은 자화상’, 1950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다(미술사가들은 베크만을 표현주의로 분류하지만, 화가 스스로는 표현주의라는 사조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미술관은 큰 전시실 하나를 그의 작품으로 가득 채워놓았다. 이는 베크만과 세인트루이스 사이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고, 모튼 메이(Morton D. May)라는 부호 덕분이기도 하다.

    베크만은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매우 지적인 화가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이미 크게 성공한 화가였고, 렘브란트와 피카소처럼 한평생 자화상을 그려온 작가로도 유명했다. 1925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예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던 그의 인생은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헝클어지고 말았다.

    1933년 베크만은 문화 반역자로 몰려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1937년부터는 그의 작품도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몰수됐고, ‘타락 작품’이란 딱지가 붙여진 채 별도 전시되기도 했다. 베크만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0여 년간 가난에 찌들린 채 숨어 살았다. 미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44년, 심장병으로 고통받던 이 60대 노인은 군대로 소집될 뻔도 했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암스테르담 시절 작품은 이전 작품에 비해 치열한 인생이 녹아 있다고 평가받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베크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바로 여기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돼 그의 많은 작품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남게 됐다.

    또한 백화점 부호 모튼 메이는 5100점이 넘는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는데, 그중에는 베크만 작품이 많았다. 모튼은 ‘메이 백화점’ 설립자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면서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의 첫 수집 작품이 베크만의 것으로, 그는 이후 독일 표현주의에 깊게 매료되었다.

    미술관이 소장한 베크만의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푸른 재킷을 입은 자화상(Self-Portrait in Blue Jacket)’이다. 그는 죽기 직전인 1950년에 이 그림을 그렸다. 담배를 꼬나문 채 어느 한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이지적이고 사색적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가 보이는 것 같다.

    드물게 인정받는 非동부 작가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조지 칼렙 빙엄, ‘뗏목 위의 사람들’, 1847

    미술관은 미주리의 전설적 화가 조지 칼렙 빙엄(George Caleb Bingham)의 작품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빙엄은 2011년에 탄생 200주기 행사가 거창하게 치러진, 19세기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버지니아의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온 가족이 ‘신천지’를 찾아 미주리로 이주했다. 그 바람에 학교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독학으로 화가가 됐다. 동부 출신이 아닌데도 드물게 미국 최고 화가로 칭송받는 작가다.

    그는 미주리 강을 따라 펼쳐진 신개척지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았다. ‘카드 놀이하는 뗏목 위의 사람들(Raftsmen Playing Cards)’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뗏목 위에 여섯 사람이 있는데 둘은 카드놀이를 하고, 둘은 이를 구경한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또 한 사람은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 두 사람은 맨발로, 구두가 뗏목 위에 나뒹굴고 있고 술병도 보인다. 그림을 보는 이도 뗏목에 동승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편안한 분위기의 그림이다. 당시 이 지역의 평화로운 생활상을 대변하는 그림이다.

    빙엄은 목사나 변호사가 될 생각을 했다. 그러나 19세 때 그린 초상화가 20달러에 팔리자 자기 재능에 대해 용기를 갖게 됐다고 한다. 27세인 1838년에 세인트루이스 지역에서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줄지어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는 ‘고객’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진출해 여러 공직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단 5%가량만 사인이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진위 논쟁에 유달리 시달린다.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척 클로즈,‘키드’, 1970

    전시실을 여기저기 돌다보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대형 그림(320×400cm) 3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의 유명한 현대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가 그린 작품들이다. 그림 한 점이 두 폭으로 이뤄져 6폭짜리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다. 제목은 ‘11월(November)’, ‘12월(December)’, ‘1월(January)’. 대형 캔버스에 무질서하게 뿌려놓은 먹물이 아래로 쭉쭉 흘러내리는 듯한 추상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해인 1989년의 작품이다.

    리히터는 동독 드레스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두 달 전에 가까스로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통일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고 한다. 제목을 통해 이 그림들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리며 그는 자신과 독일의 과거(11월), 현재(12월), 미래(1월)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리히터는 현재 미술시장에서 매우 인기 있는 작가다. 2004년 연간 거래액이 1억2000만 달러를 넘어섰고, 2010년 경매에서는 낙찰가 7600만 달러가 넘는 작품도 나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 독일 밖의 미술 애호가들이 리히터의 작품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대형 작품들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 화가인 척 클로즈(Chuck Close)의 대형 초상화 ‘키드(Keith)’ 역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275×213.4cm나 되는 대형 초상화가 그처럼 세밀하게 그려졌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은 클로즈가 1968년에서 1970년까지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그린 7개의 대형 그리자이(grisaille) 초상화 중 하나다. 그리자이는 회색만 사용해 돋을새김으로 그리는 화법. 그리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은 후 그 이미지를 대형 캔버스로 옮겨서 그린다. 이 작품은 사진과 그림이 동시에 이용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클로즈는 이처럼 세밀하면서도 매우 큰 초상화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폴레옹의 ‘착오’가 낳은 美 내륙의 ‘보석’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클로즈는 워싱턴 주에서 태어나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를 졸업했다. 1964년 예일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유럽에 건너가서 한동안 살기도 했다. 1970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그의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됐다. 1979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초대 작가가 됐다. 현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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