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검투사만큼’ 스트레스
- 배역 몰입하다 정체성 혼란
- ‘공인’ 기대에 압박감 시달려
이번에 문제가 된 프로그램 ‘나를 돌아봐’는 ‘성깔’ 있는 연예인으로 통하는 이경규, 최민수, 박명수가 그들만큼이나 성격이 까칠한 다른 연예인들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획 의도에 부합하듯 이경규, 최민수, 박명수를 매니저로 둔 연예인들은 잇따라 사고를 쳤다.
조영남과 김수미는 제작발표회장에서 연예계 원로에게 기대되는 이미지를 걷어찼다. 김수미는 (인터넷) 악플에 충격 받았다며 머리를 짧게 깎고 등장했다. 일부 시청자에겐 기행으로 비쳤다. 이어 김수미는 데뷔 9년차 아이돌에게 “넌 누구냐?”라고 했다. 조영남을 향해선 “조영남-이경규가 나올 때 시청률이 가장 낮다”고 독설을 뱉었다. 이에 조영남은 “이런 모욕적인 말은 처음이다. 방송에서 하차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시청자들은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인지 의아해했다.
연예인의 정신세계는 특이하다고 알려진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은 대중적 인기와 부(富)를 누리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 △인기 유지에 대한 압박감 △많은 이가 자신의 언행을 지켜보며 논평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몰입해 연기한 캐릭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자아정체성 혼란 △유명인사로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존감 등이 연예인의 정신세계를 일반인의 그것과 구별 짓는다.
이은주의 비극
김수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해명을 들어보면 자아정체성 혼란을 겪어온 듯하다. 그는 29세 때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엄마 역을 맡았다. 환갑이 지난 할머니 역할인데, 탁월한 연기력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연기를 너무 잘해도 문제다. 연예계엔 ‘배우는 극중인물 같은 인생을, 가수는 가사 속 주인공 같은 인생을 산다’는 말이 있다. 특히 한 배역에 오랫동안 몰두하면 작품 속 인물과 감정적 동조가 일어나 자아정체성도 그렇게 변한다고 한다. 김수미가 실제 세계에서 가끔 보여주는 괴팍한 행동은 젊은 시절부터 연기한 욕쟁이 할멈 캐릭터가 제2의 천성이 돼 나타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배우들이 작품을 찍고 나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신과 치료에 대한 선입관이 있고 연기자 보호에 대한 인식이 약해 방치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 일어난 비극이 배우 이은주의 자살이다. 그는 한 편의 영화를 찍고 난 후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직업의 세계를 ‘평범의 왕국’과 ‘극단의 왕국’으로 구분한다. 출연료, 저작권, CF출연료 등으로 수익을 얻는 연예계는 극단의 왕국에 속한다. 이는 연예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이은주는 연인과 차 트렁크에 갇혔다 숨지는 역을 맡았다.
극단의 왕국
연예인은 ‘정규분포곡선의 양극단’에 위치할 뿐 중간에 존재하는 법이 없다. 수십억~수백억대 돈방석에 오른 스타가 있는가 하면, 하루 벌어 하루 입에 풀칠하는 대학로의 가난한 배우도 있다. 멜로물 주인공을 도맡는 미남미녀가 있는가 하면, 코미디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외모를 웃음 소재로 활용하는 추남추녀도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연예인은 양극단의 한쪽인 성공한 편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전체 연예인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적 사건이 우리 삶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듯, 소수의 스타가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정신분석 전문의 존 가트너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예인에게선 경미한 상태의 조증(躁症), 즉 과도한 활력, 과대망상, 비정상적 들뜸 등이 나타나기 쉽다. 이들의 성공담은 열정, 신념, 강력한 리더십 같은 미사여구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경조증, 다시 말해 살짝 미친 증상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연예인의 정신세계와 관련해 ‘똘끼는 천성, 자아도취는 기본, 조증은 필수’라는 말도 있다. 한국 연예인들도 예외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 3가지가 없으면 연예인이 연예인답지가 않으니 이 3가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3가지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열정적 무대 매너가 만들어진다.
연예인의 영어식 표현인 ‘엔터테이너’는 사전적 의미로 분위기를 북돋우는 사람이다. 이들은 평소에도 보통사람보다 조금 더 흥분되고 고양된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 TV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은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정신감정을 받았다. 6명 가운데 박명수와 노홍철은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았다. 유재석에 비해 두 사람에게서는 산만함이 뚜렷하게 발견됐다고 한다.
박명수는 개그맨이면서 음반을 냈다. 그 후 작곡가와 클럽 DJ를 거쳐 현재는 클럽 사장에 이르렀다. 노홍철은 공대생 출신이다. 대학생 때 여행사와 이벤트 사업, 파티 매니저를 거쳤고 그후 연예인으로 변신했다.
연예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연예인 가운데는 원래부터 독특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많으며, 이들이 연예가의 극단적 환경에 부대끼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유별난 소수가 스타급으로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비범함은 어떤 의미에선 비정상성이다.
연예인들에게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것은 자아도취형 성격장애다. 이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할 때 이를 잘 극복하지 못한다. 최민수의 폭행을 복기해보자. 제작발표회에서 조영남과 김수미가 선제적으로 사고를 쳤다. 최민수는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는 1993년 ‘엄마의 바다’를 촬영하면서 독고영재가 인기를 끌 때 한동안 출연을 거부했다.
자아도취 커플의 치킨게임
자아도취형 연예인 중 몇몇은, 다른 한편으로 연인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동등한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을 우상으로 받들어주는 ‘무수리’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이혼이 잦다는 인식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똑같은 자아도취형 스타끼리 만나기도 한다. 이런 커플의 결혼생활은 누가 더 괴팍한지를 겨루는 치킨게임과 같다.
김지미는 한국의 리즈 테일러로 불린다. 여기엔 중의적 의미가 있다. 그녀가 한 시대를 대표한 미녀라는 칭송, 그리고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것에 대한 조소가 함께 내재됐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더 참고 사는 것이 결혼생활이지만 김지미 같은 최정상의 여성 연예인에게 그런 삶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톱스타 커플로 드물게 결혼생활을 오래 이어가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아내 ‘엄보살’ 덕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우리 연예계에서 역대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는 단연 신성일이 꼽힐 것이다. 그는 팔순을 코앞에 둔 지금도 젊은 시절 자신의 외모를 묘사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베토벤 헤어스타일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다. 평범한 여성이 이런 인물과 같이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왕년의 톱스타 엄앵란은 오직 인내로써 가정을 지켜낸 것 같다.
연예인은 마약이나 도박에 쉽게 빠지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연예인들이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는 것은 왜일까. 이 역시 성격장애로 설명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하니 이를 즉각 이완시킬 수 있는 수단에 쉽게 중독되는 것이다.
‘콜로세움’ vs ‘나는 가수다’
미국 심리학자 아널드 루드빅이 1000명 넘는 예술가의 전기를 분석한 결과, 가수나 배우는 작가나 작곡가에 비해 정신질환 발생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의 성공 여부를 무대에서 즉각 확인한다는 점이다. 우리 연예인들도 자신의 성공 여부를 TV 화면이나 영화 스크린에서 즉각 확인한다. 성취감이 큰 만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스트레스, 실망감도 엄청나다.
‘나는 가수다’ 같은 TV 음악 프로그램은 고대 로마제국의 콜로세움과 같다. 가수들이 노래로 맞붙고, 이들 중 누군가는 방청객들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는 순간 ‘킬’ 된다. 검투사들이 콜로세움의 잔인한 군중 앞에서 목숨 걸고 싸우듯, 우리 가수들도 수십만~수백만의 냉정한 시청자 앞에서 목숨보다 더한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피 말리는 정면승부를 벌인다. 이 스트레스, 정말 장난이 아닐 것 같다.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가수들이 열창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농후하게 성격장애를 보이는 연예인들은 록뮤직 스타들이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마약, 섹스, 자살 같은 단어들로 조합된 인생을 산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필두로 커트 코베인, 존 레넌, 마빈 게이 등 제명에 못 간 스타가 수두룩하다.
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 경계성 성격장애다. 이들은 보통 사람과 달리 오랜 시간 뒤에 돌아오는 보상을 기다리지 못한다. 이것은 그들을 무대에 오르게 하는 원동력이자 마약에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다. 도박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은 복권을 사고 일주일 동안 기다리는 기대감으로 작은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이들 연예인에겐 그런 인내심이 없다. 일확천금이 즉석에서 오가는 도박을 통해서만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밤하늘에서 별이 지듯, 스스로 빛을 발산하던 스타들은 이런 장애로 인해 끝없이 추락하기도 한다. 아니면 마음 한구석에 추락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산다. 이때 이들이 출구로 찾는 것이 종교다. 여러 연예인은 이색 종교에 곧잘 빠져든다. 리처드 기어는 티베트 불교의 신도로 유명하다. 미국인에게 불교는 동양의 이색 종교로 비친다. 1960년대 미국 히피들은 불교,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에 심취했다. 점잖아 보이는 리처드 기어의 신앙도 사실은 히피 성향의 발로다. 마돈나와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유대인의 카발라 사상에 심취했다. 톰 크루즈와 존 트래볼타는 신흥종교인 사이언톨로지에 빠지기도 했다.
한국에선 신내림을 받았다는 연예인이 더러 나왔다. 중견연기자 안병경과 정호근이 대표적이다. 김수미는 빙의 현상으로 고통받다가 씻김굿을 받았다고 한다. 무당과 연예인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연기자가 배역에 빠져 있는 상태는 무당이 접신한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무당은 인류 최초의 공연예술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선 연예인에게 ‘공인’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그래서 연예인들에게 보통 사람보다 더 모범이 되기를 요구한다. 바른생활형 연예인은 이런 상황에 잘 적응한다. 하지만 부를 가진 스타가 보통사람보다 더 금욕적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여기엔 심리적 억압 기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국민 MC’의 영화 취향
‘국민 MC’ 유재석은 바른생활형 연예인의 전형이다. 그가 처음부터 지금의 캐릭터였던 건 아니다. 스무 살에 개그 콘테스트에 등장했을 때는 선배들에게 따로 불려가 혼이 날 정도로 건방진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 후 10년 간의 무명생활을 거치며 사람들이 원하는 반듯한 모습의 연예인으로 변해갔다. 술도 못 마신다는 그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까. 뜻밖에도 그는 도끼나 칼로 사람을 난도질하는 슬래셔 무비나 피가 흥건한 고어 무비의 마니아로 알려졌다. 물론 영화감상 그 자체는 건전한 취미다.
김제동은 ‘힐링 전도사’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연예계의 소문난 주당이다. 그는 어느 날 만취 상태로 귀가한 후 야구 배트로 샌드백을 100번 넘게 두들겼다고 한다. 억압된 심리 상태의 표출로 읽을 만하다.
바른생활형 연예인들이 괴로운 것은 실수를 하면 곱절로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김장훈은 각종 사회봉사활동에 열렬히 참여하는 소셜테이너로 꼽힌다. 그런데 포털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뜻밖에 ‘관종(관심종자)’이 뜬다. 그가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사람들이 꼭 곱게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김장훈은 기내 흡연과 불법 다운로드로 구설에 올랐다. 그가 지금껏 행한 봉사활동을 감안하면 비판을 자제해줄 법도 한데 대중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의 ‘건전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실망감을 표출한 것이다. 그가 이런 현실을 잘 받아들인다면 다행일 텐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김장훈은 몇 차례의 자살 미수와 공황장애 경험을 갖고 있다. 바른생활형 연예인의 내면은 미국 록스타처럼 타들어가는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연예 콘텐츠 수출대국이다. 연예인의 독특한 성향과 창조성은 비례관계일 것이다. 똘끼 있는 연예인은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대중은 스타를 더 관대하게 이해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