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제천 ‘서울회관’의 ‘하류 인생’
- “‘미생’ 선수들 ‘완생’으로 키워낼 터”
- “하루하루 배우는 삶, 행복해”
- “프로 진출? 서너 명 눈에 띈다”
‘청춘FC헝그리일레븐’(이하 청춘FC)은 한때 축구 유망주였으나 갖가지 사정으로 꿈을 접고 축구를 그만둔 이들의 패자부활전을 다룬 프로그램. 청춘FC는 청주대에서 선수들과 함께 합숙하고 있다. 처음엔 서울이나 경기도에 숙소를 마련할 예정이었는데, 청주대와 청춘FC를 오가는 이을용의 사정을 고려해 청춘FC가 아예 청주대로 숙소와 훈련장을 옮겼다.
오전에는 청주대 선수들을, 오후에는 청춘FC 선수들의 훈련을 챙기며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는 이을용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청춘FC 선수들을 위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더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한다.
‘진지한 이을용’
그는 일정이 빡빡하다면서 수면 부족을 호소했다. 그런 그를 9월 7일 청주대를 찾아가 만났다. 청주대 캠퍼스를 함께 걸었는데, 그는 이미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달려와 사인 요청을 했다. 기자가 “인기가 장난이 아니네요”라고 하자 “지금은 (안)정환이가 없어서 그래요. 정환이랑 같이 가면 애들이 난 쳐다보지도 않아요”라며 낄낄 웃었다.
▼ 얼굴 살이 쏙 빠졌네요. 먼저 방송 얘기부터 할게요. 이을용 감독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예능과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프로그램에서 시종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청춘FC 선수들을 처음 봤을 때 어린 시절 이을용이 그 안에 섞여 있더라고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축구를 그만둔 선수, 부모님 돌아가시고 동생들 키우느라 축구를 할 수 없었던 선수, 부상으로 일찍 은퇴한 선수 등 사연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안)정환이가 처음에 이 프로그램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주저 없이 ‘오케이’한 데는 솔직히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수들과 몸을 부대끼며 훈련하면서 느낀 것은 제가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선수들을 통해 제가 배우고, 깨닫고 있어요. 오랫동안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고요. 방송을 통해 선수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같이 한 이운재(42), 안정환(39) 씨와 함께 지도하는데, 두 사람도 선수들과 합숙하나요.
“정환이나 운재 형은 바쁘잖아요(웃음). 방송 외에 하는 일도 있고요. 청춘FC가 청주대에서 합숙하는 바람에 제가 할 일이 더 많아졌어요. 새벽 훈련부터 일일이 다 챙기다보니 정작 우리 학교 선수들이 서운해하더라고요. 그래도 조민국 감독님(청주대)이 많이 배려해주셔서 별 탈 없이 두 집 살림을 잘 병행합니다.”
▼ 다른 프로그램이라면 촬영할 때만 뭔가 연출해서 보여주면 될 텐데, 축구는 오랜 기간 선수를 만들고 다듬어 제대로 뛰게 해야 하니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끊임없이 챙겨야 하겠어요.
“맞아요. 촬영할 때, 안 할 때를 구분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는 게 제 스타일도 아니고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합니다(웃음).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방송보다 더 중요한 건 ‘미생’의 선수들을 ‘완생’이 될 수 있도록 키우는 거예요. 촬영 여부는 전혀 고려할 게 아니죠. 함께 고생한 모든 선수가 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축구를 통해’ 돈을 벌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 좋겠어요. 이 선수들이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뛰게 된다면 정환이나 운재 형의 수고와 노력도 충분히 보상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벨기에, 프랑스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더군요.
“훈련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했어요. 선수들뿐 아니라 지도자들도 ‘올인’하려면 한국을 떠나야 했거든요. 청춘FC 선수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본기가 안 돼 있다는 점이에요. 그건 그들을 가르친 지도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수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성장을 멈춰버린 거니까요. 멈춰버린 어떤 것을 깨뜨리는 게 급선무였어요.
벨기에에선 주로 체력훈련만 반복했습니다. 1년, 3년 이상 축구와 담을 쌓고 지낸 선수가 대부분이라 일단 체력을 만들어놔야 전술훈련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일주일쯤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소화하고 나서 전술훈련을 시키니까 선수들이 금세 따라오더라고요. 사실 지도자들에게 해외 전지훈련은 한국에서보다 더 힘들고 지치는 일이에요. 잠을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잤어요. 그걸 버텨내게 한 건 선수들의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열정이 그들에게서 넘쳐났거든요.”
▼ 프로 선수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이 있나요.
“서너 명 정도 눈에 띕니다. 당장 프로에 직행하긴 힘들어도 K3리그나 챌린지리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지금은 가급적 연습경기를 많이 하려고 해요. 방송을 보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이랜드FC나 챌린지리그 팀들이 연습게임 좀 하자고 전화를 해옵니다. 경기를 통해 우리 선수들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야 스카우트 담당자들이 관심을 보이겠죠.”
‘시어머니 안정환’
▼ 안정환 씨와는 역할을 어떻게 나눴나요.
“정환이가 주로 시어머니 역할을 맡고 있어요. 잔소리, 쓴소리를 전담하죠. 저는 운동장에서 선수들을 이끌고요. 운재 형이 없을 때는 정환이가 킥 연습도 시켜요. 서로 워낙 친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정환이, 운재 형과 별 마찰이 없었어요. 힘들 때는 소주 한잔 기울이며 서로 위로도 해주고요.”
▼ 청춘FC가 어떻게 마무리되기를 바랍니까.
“아주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고 있어요. 선수들을 챌린지리그 이상의 팀으로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이 선수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K3나 내셔널리그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 다시 말해 청춘FC란 팀을 실제로 창단하는 거죠. 다만 경제적인 부분이 중요하기에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선수들을 잘 가르치고, 정환이는 밖에서 돈을 모아오면 될 것 같은데(웃음)…. 이따금 상상해보는 그림이에요.”
▼ 아까 말한 것처럼 이을용 코치의 ‘청춘’도 만만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잖아요.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를 졸업하고 울산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는데, 축구팀 선배랑 치고받고 싸우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짐을 싸들고 나온 거예요. 그러고는 충북 제천의 친구 집으로 향했어요. 돈이나 벌겠다는 생각으로 ‘서울회관’이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웨이터 생활을 한 건 아니고요, 업소에서 이런저런 심부름하며 허드렛일을 도왔죠. 그러다 우연히 그 업소를 방문한 축구인이 저를 알아보고는 울산대 최만희 감독님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어느 날 감독님이 서울회관에 딱 나타나셨더라고요. 무진장 혼난 뒤 다시 울산대로 끌려갔죠.”
▼ 붙들려가선 잘 버텼나요.
“웬걸요. 얼마 안 있어 또 정신 못 차리고 팀을 뛰쳐나왔습니다. 8개월쯤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친구랑 대구로 내려가 가스 배관 줄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적도 있고,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하며 돈을 벌었어요. 공사판 일이 수입이 꽤 괜찮았거든요. 하루 일당이 그때 돈으로 6만 원이나 되고 그것도 현찰로 바로 손에 쥐여줬으니까. 돈을 아끼려고 역전 화장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이현창…감독이 아닌 아버지
이을용은 “미생 축구인들의 감독을 맡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손을 잡아준 분이 당시 한국철도 감독을 맡고 계시던 이현창 선생님입니다. 강릉상고 시절, 강릉으로 전지훈련차 오셨다가 제가 뛰는 걸 관심 있게 지켜보셨다고 해요. 울산대에서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다니셨더라고요.
결국 이 감독님 덕분에 한국철도에 입단해 실업팀 생활을 했습니다. 감독님은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차가운 숙소에서 혼자 생활하는 제가 안쓰러워 김치며 이불, 전기장판 같은 걸 챙겨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철도에서 월급을 8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을 제게 안 주시고 따로 관리하시다가 제가 상무로 갈 때 통장에 넣어 건네주셨어요. 통장에는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들어 있었어요. 그 통장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감독님이 아니라 아버지셨어요.”
이을용은 한국철도에 입단한 뒤 축구가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축구하는 걸 즐기게 되면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러나 나이트클럽에서 일한 탓에 주변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조직세계’에선 이을용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냈다. 축구에 빠진 이을용은 그들의 손짓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만약 이현창 감독이 이을용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을용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계속 ‘하류인생’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 이현창 감독과는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다면서요.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할 은사님이에요. 최근까지 K3리그 이천시민축구단 감독을 하셨는데, 올해 그만두신다고 하더군요. 제가 부산에서 카파 풋살팀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그곳에서 총감독을 맡아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용돈벌이밖에 안 되지만 이젠 연세가 있어 예전처럼은 활동하기 어려우시거든요. 그래도 가만히 계시면 답답해하실 것 같아 부산으로 모시려고요(웃음).”
▼ 한국철도에서 뛰다가 1998년 부천 SK에 입단했어요.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사람으로선 엄청난 반전이네요.
“한국철도 들어가서 뛰다가 이듬해 군에 입대했어요. 동기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 제대했고요. 그때 정환이가 부산 대우로얄즈, 저는 부천SK에 입단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새벽 훈련을 거르지 않고 매일 나갔습니다. 프로가 됐으니 돈도 벌어야 하고, 어려운 집안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는 부담도 있었죠. 솔직히 제가 프로에 갈 거라곤 자신할 수 없었어요. 나라는 선수를 과연 어느 팀에서 뽑아줄까 싶었죠. 그래도 운 좋게 2순위로 부천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을용은 데뷔 첫해 33경기에 출장해 3득점을 올렸다. 국가대표 데뷔전은 1999년 3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였다.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 선수로 뽑혔고, 폴란드전에서 나온 황선홍의 왼발 발리골, 미국전의 안정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다. 3, 4위전으로 치른 터키전에선 프리킥골을 터뜨리며 축구팬에게 짜릿한 전율을 안겼다. 이을용은 2004년 아시안컵을 거쳐 2006 독일 월드컵을 마치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 ‘월드컵’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나요. 월드컵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지도 궁금하네요.
“대표팀 생활을 11년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라면 아무래도 2002년 월드컵이겠죠. 그때 히딩크 감독님도 스타였고, 대표팀 선수들도 죄다 스타플레이어였잖아요. 지금도 미국전 때 페널티킥 실축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요. 그래서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만(웃음)…. 대표팀 선수들도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오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요. 경기를 치를수록 체력이 고갈됐는데, 이상하게 신바람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한국이 홈어드밴티지를 본 부분도 있었잖아요.”
▼ 히딩크 감독에 대한 추억도 많겠네요.
“그럼요. 축구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죠. 귀네슈 감독을 비롯한 명장들은 비슷한 면이 있더라고요.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120% 뽑아내는 능력이 있어요. 히딩크 감독님은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남일, 박지성, 이천수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했잖아요. 지성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빠꾸’로 불렸는데…. 이유요? 몰라요. 그냥 ‘빠꾸’라고 부르면 지성이가 쳐다봤으니까(웃음).”
히딩크의 ‘러브콜’ 거절
▼ 2002년 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이 에인트호번으로 오라고 제의한 적 있다면서요.
“맞아요. (이)영표나 (박)지성이가 가기 전에 제가 가장 먼저 러브콜을 받았어요. 그런데 테스트를 받고 입단하라는 말에 테스트 받고 가진 않겠다며 협상을 거부했죠. 그 후 피스컵 때인가? 에인트호번을 이끌고 히딩크 감독님이 다시 방한했는데 그때 하얏트호텔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두 번째 러브콜이었죠. 그때는 에이전트 회사에서 거절했어요. 그쪽에서 제시한 협상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후회요? 에이, 그런 거 없어요. 영표와 지성이가 가서 잘했잖아요.”
▼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은퇴를 발표했을 때 주위에선 너무 이른 거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어요. 대표팀에서도 ‘선수 이을용’을 필요로 했고.
“적당한 타이밍에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대표팀에서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당시 운재 형도 있었고, 남일이, 정환이가 모두 남았기 때문에 제 은퇴가 빠르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다들 같이 은퇴하자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동참하지 않더라고요(웃음). 결국 다른 친구들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후 자연스럽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은퇴를 서두른 가장 큰 이유는 대표팀에서 더 이상 제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독일 월드컵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탓도 컸지만, 남이 아쉬워할 때 물러나는 게 옳다고 본 거죠.”
2002년 월드컵을 끝내고 이을용은 터키 트라브존스포르로 이적했다. 터키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간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직후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눈앞에 뒀지만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큰 기회가 사라지는 아픔을 맛봤다.
▼ 2006년 독일 월드컵은 회한이 많은 대회일 것 같아요. 본선에서 뛸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이적 문제와 관련해선 속상했죠.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사인만 하면 될 만큼 완벽한 상태로 계약이 진행됐거든요. 기왕이면 월드컵 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그다음 계약해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영국 쪽 에이전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못 보여준 까닭에 입단 조건이 큰 폭으로 수정됐어요. 이전 조건과 심하게 차이가 나니까 결정을 못하겠더라고요. 굳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그곳으로 가야 하나 하는 고민 끝에 포기한 겁니다.”
소원대로 고향 팀서 은퇴
▼ 프리미어리그행이 결렬됐지만 다시 터키로 돌아갈 수 있었잖아요. 트라브존스포르에선 재계약을 원했던 것으로 아는데….
“터키뿐만 아니라 다른 리그에서도 제안이 들어왔어요. 며칠 고민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더라고요. 때마침 FC서울에서 저를 간절히 원했어요. 에이전트까지 나서서 K리그 복귀를 만류했지만 고집을 피웠습니다.”
이을용은 2002년 7월 트라브존스포르에 입단했다가 1년 만에 FC서울로 복귀했고, 이후 또 1년 만에 다시 터키로 이적했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치렀다.
▼ 2009년 강원FC 창단 멤버로 참여했죠.
“고향 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고향 팀에서 뛰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요. 서른여섯의 나이에 소원대로 고향 팀에서 은퇴식을 치렀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할 때도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처럼 주위의 만류가 엄청났습니다. 제 생각은 하나였어요. 미련이 남았을 때 끝내자는 거였습니다.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더 뛰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때 접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수 생명을 1년 더 연장한다고 축구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선수 생활보다 그다음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본 거예요.”
▼ 은퇴 후 지도자 연수를 위해 유럽과 터키를 돌며 축구 공부를 했다고 들었어요.
“2011년 10월에 은퇴했고, 이듬해 3월부터 독일 축구를 둘러봤어요. 독일에서 손흥민·구자철, 영국에선 박지성 등 많은 후배를 만났습니다. 경기도 많이 봤고. 그 후 터키로 들어가 페네르바체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어요. 페네르바체를 이끄는 에르순 야날 감독(전 터키 국가대표팀 감독)과의 인연이 그곳으로 저를 이끈 거죠.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큰 도움이 됐어요. 백수이면서 백수가 아닌 것처럼 생활했는데, 언제 또 그렇게 축구 경기만 보면서 유럽을 활보할 수 있을까 싶어요.”
터키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을용은 강원FC 스카우터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년여 동안 선수들을 가르치다 그만두고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청주대의 반란
▼ 프로 리그에만 있던 사람이 대학으로 눈을 돌린 배경이 궁금해요. 청주대 코치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긴가민가했거든요. 그것도 감독이 아닌 코치로.
“어차피 지도자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프로에만 머물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앞으로의 축구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전엔 내 것만 하기에 바빴어요.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요. 축구인들, 선배 지도자들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프로’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하게 생활했죠.
지금은 대학팀 감독들, 고등학교 감독들과 교류하면서 정보도 주고받고, 아마추어 축구에 대해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청주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이 많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청주대로 온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정도입니다. 여기 안 왔으면 ‘왕년의 스타 이을용’이란 타이틀에 집착하면서 그렇고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 조민국 감독이 이을용 코치에게 직접 전화했다면서요? 같이 일해보자고. 과거에 인연이 있었나요.
“전혀요. 감독님이 청주대를 맡고 나서 제게 연락하셨을 때 저도 제 귀를 의심했다니까(웃음). ‘왜 나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나 고민은 잠깐만 했어요. 경험 많은 감독님 밑에서 뭐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에 곧바로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감독님은 제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셨어요. 큰 그림만 그려주시고 대부분은 제가 선수들을 이끌어나가길 바라세요. 그게 힘도 되고 부담도 되더라고요.”
청주대는 올해 1월 조민국 감독과 이을용 코치가 팀을 맡은 후 U리그에서 8전 전승을 내달렸고, 대학연맹전에서도 파란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했다. 비록 8강에서 그 기세가 꺾였지만, 무명이나 다름없던 지방 팀의 반란은 축구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 짧은 시간 동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선수들을 변화시킨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했을까요.
“대학팀은 처음이라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어요. 조민국 감독님의 도움이 컸죠. 감독님은 고려대와 실업팀, 그리고 프로팀까지 경험한 베테랑이잖아요. U리그 대회를 준비하면서 일대일 맞춤형 지도에 들어갔습니다. 선수들과 개별 미팅을 통해 장단점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후 내가 제시한 해법이 그라운드에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잔소리와 격려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축구만 생각”
▼ 어떤 해법이었나요.
“지난봄 통영에서 춘계대회가 열렸는데 3, 4학년 선수들을 제외하고 1, 2학년 위주로 경기를 풀어갔습니다. 기존의 주장까지 빼고 저학년 선수들 위주로 대회를 치렀어요. 선수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1, 2학년 선수들이 게임을 못해도 계속 뛰게 했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주장을 비롯한 고학년 선수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프로 입단을 앞둔 선수들 처지에선 이런 변화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저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팀은 주전 비(非)주전 구분 없이 모두가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요. 안주하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선수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요. 그때부터 선수들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 강원FC에서도 코치를 맡았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프로와 대학이란 환경의 차이 말고요.
“지금은 선수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아요. 이전까지만 해도 ‘왕년의 스타 이을용’을 내려놓지 못했어요. 허울에 갇혀 있었던 셈이죠. 지금은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 들 때까지 축구만 생각하며 지내요. 어쩌면 선수 때보다 축구에 대한 애정이 더 많아졌는지도 몰라요.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이 축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지도자가 이래서 매력 있는 직업이구나 싶기도 하고요. 청주대로 잘 왔다니까요.”
▼ 하루빨리 감독이 되고 싶진 않나요.
“대학 리그에 나가면 상대 팀 감독들이 같이 선수로 뛰던 선후배들이에요. ‘유 감독’(유상철 울산대 감독), ‘이 감독’(이상윤 건국대 감독), ‘설 감독’(설기현 성균관대 감독)…. 저는 ‘이 코치’이고. 그런데 저는 그 타이틀이 갖고 싶거나 부럽지 않아요. 언젠가는 저도 그 자리에 가 있겠죠. 그러나 지금은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계속 프로에만 머물렀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많은 것을 지금 배우고 있으니까요. 청춘FC도 프로에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죠.”
남이 가지 않는 길
▼ 강릉상고가 최종 학력이에요. 학연이 중요시되는 한국 축구에서 대학 간판 없이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청주대에 와서 학연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고 있어요. 고려대 나온 조민국 감독님을 봐도 그렇고요. 선수 때는 몰라도 사회에서 활동하려면 학연, 인맥, 이런 부분이 작용하더라고요. 사실 선수 때는 대학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후회가 돼요. 아무리 선수라고 해도 공부는 필요한 것 같아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뒤늦게 명지대 체육학과에 등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내년에 졸업해요. 대학원까지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이을용은 축구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의 자신을 ‘잡초인생’ ‘하류인생’에 비유했다. 지금의 이을용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며 배움의 인생을 산다. 대학팀 코치로, ‘미생’ 축구인들의 감독으로 그는 충분히 행복해했다. 이을용은 매력적인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