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종전 후 제3국행을 택한 김명복 씨(왼쪽)와 김씨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영화감독 조경덕 씨.
1936년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난 김명복(79) 씨. 1950년 인민군 포로가 된 뒤 1954년 인천항을 떠나 브라질에 정착해 닭을 기르고 채소를 키우다 지난 7월 23일, 6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고향땅을 밟고 싶다는 염원으로 영화감독 조경덕(41) 씨를 따라나선 것이다.
“당시 76명이 중립국행을 택했는데 74명이 인민군 포로였다. 1954년 인도에 도착해 2년 동안 머물면서 갈 곳을 물색했다. 브라질에서 받아준다기에 50명이 그리로 갔다. 처음에는 난민수용소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지금 사는 마투그로수를 소개받았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 뒤로는 네 아이와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 포로들과 연락하지 못했다. 교회 분 소개로 조경덕 감독을 만났는데 진실해 보여 따라나섰다. 평생 소원이 조국에 한 번 가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났지만 동행인이 있어 용기를 냈다.”
현재 김씨와 조 감독은 서울에서 함께 숙식하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간다. 줄거리는 ‘6·25전쟁 종전 후 중립국을 택한 전쟁포로가 60년 만에 마지막일지도 모를 귀향길에 오르며, 고향을 떠나온 경로를 거슬러간다’는 것. 김씨는 올해 5월 12일 집을 떠나 아르헨티나, 인도,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왔다. 최종 목적지는 고향 평안도 용천.
조 감독은 2년 전부터 북한 주재 브라질 대사, 브라질 주재 북한 대사, 북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등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 줄기 희망은 브라질 정부가 “북한 당국이 비자를 발급하면 할아버지의 여정을 에스코트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조 감독이 이 여정에 남과 북을 모두 넣은 이유는 뭘까.
“조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포로들이 남과 북의 땅을 밟으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접근 방식은 화해를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는다.”
조 감독은 2009년 11월 상파울루 영화제에서 장애인의 성과 인권을 다룬 다큐 영화 ‘섹스 볼란티어’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현지에서 “제3국으로 온 포로들이 생존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이번 작품을 시작한 계기다.
2010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2012년 인도, 2013~2014년 브라질, 2015년 미국을 돌면서 그들을 찾아갔다. 절반은 잠깐밖에 만나지 못했다. 트라우마가 심하거나 북에 남은 가족을 걱정하는 분들이었다. 절반은 촬영 중 타계했다. 그러다 한 번도 고국에 와보지 못한 두 분을 모시고 고향 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한 분이 준비 과정에 돌아가셔서 화장한 유해만 갖고 왔다.”
길동무가 없으면 여행이 외로운 법. 그런 점에서 김씨와 조 감독은 행운아다. 집 전세금을 빼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조 감독의 무모한 행동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많은 교포와 지인, 관계자들이 두 사람의 좁은 길목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프로젝트의 마지막 관문인 ‘북으로 가는 길’은 일반인이 밀어젖히기에는 버거운 장벽이다. 60년 넘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이명준’의 말을 누가 들어줄 수 있을까.
“북에 가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저 고향에 한 번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