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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美 참전 자극한 히틀러 ‘자급자족론’

2차대전은 ‘경제전쟁’ / 독일편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美 참전 자극한 히틀러 ‘자급자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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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 · 영의 독 · 일 견제심리가 2차대전 불렀다?
  • ● 미국, 부도 위기 빠진 독일 ‘지급보증’
  • ● 독일 배상금 ‘미→독→영·불→미’ 선순환 끊기자…
  • ● 히틀러 ‘유럽 신경제질서’ 구상, 유로 체제와 비슷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이다. 한국의 광복 70주년 행사를 비롯해 일본 아베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 중국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행사 등 큼지막한 행사들이 8, 9월에 이어졌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2차대전 종전 후 재편된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국가가 ‘전후 질서’라는 결과물에 어떻게 적응하고 잘 살 것이냐에 몰두해왔다. 최근에는 2차대전 발발의 인과관계에 대해 더욱 몰두하고 분석하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 침략행위 등에 대한 반성과 항변이 각국의 처지에 따라 미묘하게 뒤섞였다.

2차대전은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라는 군국주의·파시즘 신봉자들이 장악한 독일과 일본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각각 수백만,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홀로코스트나 난징 학살 등은 극단으로 치달은 이들의 과오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과 무모함은 인정하고 백번 사죄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데는 복합적인 배경이 있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정치논리와 함께 경제논리를 거론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조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득력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2차대전 발발 원인만 따져보자면 20세기 초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독일과 일본에 대한 초강대국 미국과 대영제국의 견제 심리가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전쟁의 씨앗 ‘부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은 지금의 그리스보다 훨씬 부채에 허덕였다. 전쟁을 치르며 전체 인구의 10%, 영토의 13.5%를 잃은 데다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통해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1320억 마르크라는 막대한 금액을 배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합국 측이 ‘전쟁 피해의 손해배상’뿐 아니라 무기 제조 및 구입비, 병사 월급까지 다 포함한 ‘전비(戰費)의 보상’을 조약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독일이 이를 다 갚으려면 매년 22억 마르크씩 60년이 걸려야 했다. 당시 독일의 1년 세입이 60억~70억 마르크였음을 감안하면, 해마다 국가 재정의 3분의 1을 빚 갚는 데 써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이 마르크화를 무제한 찍어내는 식으로 배상금을 마련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와 환율이 수만 배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화폐와 자산 가치가 폭락한 독일로 몰려든 것은 미국과 영국 등에 포진해 있던 돈 많은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달러와 파운드를 가지고 들어와 부동산 등 다량의 자산을 매입하는 한편 고리대금업을 벌여 시중의 돈을 쓸어갔다. 이런 행태는 훗날 독일 국민이 민주적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을 선택하는 정서적 배경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국가 경제가 완전히 결딴날 위기에 처하자 독일은 지금의 그리스처럼 “이대로는 빚을 못 갚겠다”며 채무 상환을 거부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주체가 1차대전을 통해 세계경제 질서 장악에 나선 미국이다. 미국은 독일이 이른바 ‘도스 공채(公債)’를 발행하면 인수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해주기로 했다. 미국이 독일의 채무 상환에 대해 사실상 ‘지급보증’을 해준 셈이다. 여기에다 이전까지 연합국 화폐로만 지급하도록 돼 있던 보상금을 마르크로 지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방안은 당시 미국 부통령 도스가 제안했다고 해서 ‘도스 안(案, Dawes Pla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1924년 정부가 강제로 은행의 융자를 막고 1조 마르크를 신화폐 1렌탈 마르크로 바꾸는 조치를 취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 강제 화폐교환 조치가 시장에서 먹혀든 것은 독일 부흥에 ‘베팅’한 미국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 안이 채택된 해인 1924년에만 70억 마르크의 외자가 독일로 유입됐는데, 그 중 50억 마르크가 순수 미국 자본이었다. 1차대전 직전까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국이던 독일은 1차 대전 당시에도 본토 피해는 크지 않았던 덕분에 서둘러 공장을 돌리며 경제 회생에 나설 수 있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와 화학산업이다.

‘선순환’ 끊기자 ‘대공황’

미국의 도스 안은 사실 독일의 부흥에만 해당되는 조치는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1차대전 당시 대량 발행한 전쟁공채의 대부분을 미국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이 독일에 투자를 하고, 독일은 그 투자자금으로 경제를 일으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면,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그 돈으로 미국 전쟁공채를 상환하는 ‘선순환’이 이어졌다.

이는 거꾸로 독일이 잘못될 경우 연쇄적인 피해의 끝은 결국 미국을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이 당시 미국에 갚아야 할 전쟁공채는 약 70억 달러로 당시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7%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이 전쟁공채의 부실채권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조치는 타당했다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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