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채 전 밴쿠버 영사가 수단대사관 근무 시절 고아원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 5월, 수단 최대 반군 조직(JEM)이 정부 전복을 목표로 수도 카르툼을 향해 진격하자 반격에 나선 정부군은 전투기를 동원한 융단폭격을 예고하며 지역 거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현지 교민 보호에 비상이 걸린 한국대사관이 긴박하게 비상연락을 취하던 중 공습 예고 지역(옴두르만)에서 한국인 선교사 1명이 미처 못 빠져나오고 숨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출 2시간 뒤 격전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고, 태극기를 단 외교차량을 이용해 선교사를 구출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내가 가서 데려오겠다”는 이병국 당시 대사를 만류하고 박 전 영사가 나섰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일단 그쪽 지리를 잘 아는 운전기사부터 구해야 했다. 현지 (주)대우에 부탁해 20년 근무 경력의 운전기사를 구하고, 서병화 대우 전무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서 전무는 수단에서 15년간 생활해 현지 사정에 밝았다.
대사관에서 옴두르만까지는 약 4㎞. 정신없이 달려가는 동안 일행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 그대로였다. 도로 곳곳에 부서지고 불붙은 차량과 탱크가 널렸고, 길가 군데군데 조각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기관총을 들고 탄띠를 둘러멘 정부군이 길목마다 검문소를 차려놓고 지켰다.
통행허가를 받고 수차례 검문소를 통과한 끝에 선교사를 찾아낸 일행은 공포에 질린 선교사를 달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차에 태워 출발했다. 검문소를 지키던 정부군이 “한 시간 내로 빠져나오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기 때문. 일행이 생사를 넘나든 구출작전에 성공한 지 불과 두 시간 뒤 반군과 정부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200여 명이 사망했다. 박 전 영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니 죽을 수도 있었다. 대사관으로 무사히 돌아오고 나서야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겁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외교관으로서 그게 내 일이었고, 다시 그 상황이 닥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대다수 우리 외교관들도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남북 공관원 합동 탈출작전
뜻하지 않게 소설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외교관이 또 있다. 소말리아 내전이 한창일 때 그곳 대사관에 근무한 강신성 전 대사는 1991년 1월 정부군이 반군에 패해 치안 능력을 상실한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기 위해 공관 직원들을 이끌고 황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처 이탈리아 대사관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그들의 구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었던 강 대사 일행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북한 대사 일행을 만났다. 군사전략지인 공항에선 언제 격전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강 대사 일행은 북한 공관원들을 설득해 함께 대사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사관에서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사흘을 보낸 뒤 극적으로 비행기를 구해 남 · 북한 공관원 20여 명이 함께 총알이 빗발치는 ‘생지옥’을 뚫고 케냐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30대 초반의 북한 3등 서기관이 심장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공항에서 대사관으로 돌아오던 일행의 차를 반군의 자동차로 오인한 정부군이 집중사격을 퍼부은 것. 강 전 대사는 공직생활을 마친 후 당시 경험을 소설 ‘탈출’(한강출판사)에 담아 펴냈다.
최재근 전 총영사는 우간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1982년 2월, 대사관을 나서 캄팔라 시내로 차를 타고 가던 중 무장강도 4명의 공격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와 왼발에 전치 3개월의 관통상을 입은 그는 영국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귀국했다. 최 전 총영사는 “끔찍한 과거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그려지는 외교관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와인 잔을 든 채 화려한 연회장을 누빈다. 많은 사람이 외교관을 특권층 내지 적어도 일반 국민의 삶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인식한다. 현실은 어떨까. 남상욱 전 대사(현 외교협회 사무총장)의 말을 들어보자.
“외교관이라는 개념은 중세, 근세 이래 이탈리아에서 생겨났는데, 그때는 외교관이 국가 간 친선뿐 아니라 전쟁에도 관여하는 중책을 맡다보니 최상류층 귀족이 외교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교관은 최고 엘리트다. 숫자가 매우 적고 입부(외교부)하기가 힘들며, 접수국(주재국)에서 면책특권 등을 누리다보니 일부 국민에게 특권층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후진국, 개도국이었을 때는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의 재외공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당시 외교관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열악한 형편의 재외공관이 훨씬 많다. 한국이 잘살게 된 시기부터 역설적으로 우리 외교관들의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재외공관 수는 163개. 이 가운데 ‘특수지’, 일명 ‘험지’로 불리는 공관은 61개로 3분의 1이 넘는다. 험지 분류 기준은 현지 치안, 기후, 국민소득, 의료 및 교육수준 등이다. 험지 중에서도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예멘 4곳은 ‘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1~3년에 한 번씩 순환 근무가 원칙인 외교관들은 재외공관을 ‘냉탕’과 ‘온탕’에 비유한다. 외교관들은 “천국과 지옥을 절반씩 오가다보면 외교공무원 생활이 끝난다”고 말한다. 영화 속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환경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삶은 외교관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