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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비밀㉓]‘윤두서 자화상’에 귀와 목이 없는 진짜 이유

뒤늦게 드러난 밑그림의 진실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명작의 비밀㉓]‘윤두서 자화상’에 귀와 목이 없는 진짜 이유

  • ● 얼굴만 있어 특별한 윤두서 자화상
    ● 윤두서는 몸까지 그려낼 생각이었을까
    ● 잘라낸 탕건은 정치 구도에 대한 저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부리부리한 눈매와 형형한 눈빛, 한올 한올 불타오르는 듯한 수염, 목도 귀도 없는 육중한 얼굴, 게다가 윗부분이 잘려나간 탕건(宕巾)까지. 극도의 사실성과 대담한 파격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그림,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18세기 초). 그리 크지 않은 이 그림(38×20.5cm)을 많은 사람은 조선시대 최고의 초상화로 꼽는다. 그러곤 “윤두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 것이자 세상을 향한 치열한 응시”라고 평가한다. “엄정한 성격” “옹골찬 기개”와 같은 상찬을 덧붙인다. 

기록에 따르면 윤두서는 검객(劍客)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윤두서의 눈매가 부드럽고 유순한 스타일이었다면, 수염이 별로 없는 깔끔한 얼굴이었다면, “섬뜩할 정도의 자기 성찰” “옹골찬 기개”와 같은 평가를 내놓았을까. 오히려 “맑고 투명한 선비 정신의 표출”이라고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목도 있고 귀도 있었다면 우리는 이 자화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런 상상에 대해 쓸데없는 짓, 무례한 짓이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과연 쓸데없는 상상일까.

윤두서, 해남 윤씨 그리고 南人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해남 윤씨였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증손자였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다. 해남 윤씨는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었다. 13세 때 한양에 올라온 윤두서는 숙종 때인 169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은 서인(西人)에 밀려 권력을 잃었다. 그 후 윤두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두서는 정치 대신 학문과 예술에 열중했고 46세 때인 1713년 해남으로 완전히 낙향해 가업을 경영하며 생을 보냈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자화상을 그렸다. 

윤두서의 친구 담헌 이하곤(澹軒 李夏坤)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이런 글을 남겼다. “육 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다.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으니 바라보는 사람은 선인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풍모는 무릇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그러나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유교 윤리나 보편적 미감(美感)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사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일부를 제거한 채 화폭에 옮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윤두서는 왜 목이 없고 귀가 없는 얼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인가. 탕건의 윗부분은 왜 잘라낸 것인가.



윤두서 자화상에 사실 몸이 있었다?

목도 없고 귀도 없지만 자화상 속 얼굴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래서 더욱 특이하고 파격적이다. 이것이 ‘윤두서 자화상’의 매력이자 미학이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반전(反轉)이 찾아왔다. 

1996년 국립중앙박물관 도서실에서 사진 한 장이 발견되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윤두서 자화상’을 촬영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에 수록돼 있었다. 그 사진 속에서 윤두서는 도포를 입고 있다. 옷깃선이 보이고 목과 상체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자화상과는 분위기가 꽤나 다르다. 섬뜩하다기보다는 비교적 온화해 보인다. 이 사진을 처음 발견한 미술사학자 오주석(2005년 타계)은 이렇게 추정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유탄(柳炭)으로 바탕 그림을 그렸다. 버드나무 숯인 유탄은 요즘의 스케치 연필에 해당한다. 접착력이 약해 수정하기는 편하지만 대신 잘 지워지는 단점이 있다. 윤두서가 미처 먹으로 상체의 선을 그리지 않아 작품이 미완성인 채로 후대에 전해오다 표구 등의 과정에서 관리 소홀로 지워졌다. 유탄으로 그린 상체는 지워지고 먹으로 그린 얼굴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한 것이다…얼굴에 두 귀가 빠진 것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오주석, ‘옛그림 이야기1’, ‘박물관 신문’ 1996년 7월호, 국립중앙박물관) 

원래 밑그림 옷깃선이 있었는데 후대에 지워졌다는 말이다. 

1998년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가 이에 대해 반론을 펼쳤다. 

“현미경으로 그림을 들여다보면 도포의 넓은 깃선이 종이에 비쳐 흐릿하게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다. 윤두서는 얼굴 정면만 앞면에 그렸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옷주름 선은 유지(油紙) 뒷면에 그렸다. 조선시대 배면선묘법(背面線描法), 배선법(背線法)이다. 1937년 촬영한 사진에 배선이 드러난 것은 앞뒤 양쪽에 보조 조명을 주어 찍었기 때문이다.”(이태호, ‘윤두서 자화상의 변질 파문’, ‘한국의 고미술’ 10호, 미술저널, 1998)

몸과 귀는 누가 그려 넣었나

2006년 적외선 촬영한 윤두서 자화상. 옷깃선이 선명하게 보인다(왼쪽). 윤두서 자화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 옆면에 희미하게 귀를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06년 적외선 촬영한 윤두서 자화상. 옷깃선이 선명하게 보인다(왼쪽). 윤두서 자화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 옆면에 희미하게 귀를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 옷선을 그렸다는 말이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운 사실을 추가했다. 박물관은 한 해 전 ‘윤두서 자화상’에 대해 현미경 검사, X선 투과 촬영, 적외선 촬영 등의 과학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옷깃선과 함께 그 주위로 어두운 느낌을 주는 훈염(暈染) 표현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얼굴에 비해 너무 작긴 하지만 붉은 선으로 귀가 그려져 있는 것도 확인됐다. 연구자들은 “도포와 귀를 표현하고자 한 윤두서의 의지가 명확했음을 확인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천주현 외, ‘윤두서 자화상의 표현기법 및 안료분석’, ‘미술자료’ 74호, 국립중앙박물관, 2006) 

2007년 미술사학자인 강관식 교수가 가세했다. 그는 1993년 해남에서 ‘윤두서 자화상’을 햇빛에 비춰가며 꼼꼼하게 관찰한 결과, 유탄으로 옷깃을 표현한 선묘 자국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1937년 조선총독부 사진은 옷을 그린 선이 매우 선명하다. 그러나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적외선 촬영 사진은 이 선이 흐릿하다…앞면에 그려 넣었던 유탄의 가루가 70여 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가고 유탄 가루 일부가 두툼하고 성근 장지 속으로 배어들어 간 것이다. 그렇기에 적외선 촬영을 해도 1937년 사진보다 흐릿할 수밖에 없다.”(강관식, ‘윤두서 상’, ‘한국의 국보-회화’, 문화재청, 2007) 

2014년, 미술사학자 안휘준 교수는 다른 의견을 냈다. 

“희미한 붉은 선으로 그려진 귀의 모양은 너무 단순하고 어색하며…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뒤진다. 의문이 아닐 수 없다…귀와 옷깃은 누군가가 후에 배선법과 배채법 등을 사용해 보필(補筆)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듯하다.” (안휘준, ‘공재 윤두서의 회화, 어떻게 볼 것인가’, ‘공재 윤두서’, 국립광주박물관, 2014) 

윤두서가 그린 것이 아니라 제3자의 가필(加筆)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앞면인가 뒷면인가

목(옷깃선)과 귀가 없는 줄 알았는데, 목과 귀가 있었다. 1996년 자화상 사진의 출현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윤두서 자화상’ 옷깃선의 실체에 관한 논란. 그 쟁점을 정리하면 ‘옷깃선이 앞면에 그려진 것인지, 뒷면에 그려진 것인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옷깃선이 앞면에 그려진 것인지, 뒷면에 그려진 것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옷깃선의 비밀과 궁금증은 ‘윤두서 자화상’의 뒷면을 조사해 보면 명쾌하게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장황(표구)이 돼 있어 뒷면까지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옷깃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배접지를 해체해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이에 동의할 것이고, 누군가는 굳이 그림을 해체까지 해가면서 확인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할 것이다. 찬반 의견과는 별개로, 배접지를 해체하고 뒷면을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소장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데다 국보이기 때문에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가 있어야 한다.

너무 작은 귀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남 윤씨 가문의 백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남 윤씨 가문의 백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윤두서 자화상’엔 옷깃선과 귀가 없다. 이에 관해 그동안 여러 전문가는 “비본질적이기 때문에 옷깃선을 생략했다”고 보았다. 

“관복과 관모 모두 장식적인 껍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이런 모든 것을 벗어버린 그야말로 자신의 진실된 모습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 부분이 생략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내옥, ‘공재 윤두서’, 시공사, 2003) 

윤두서라는 개인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불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화하거나 생략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윤두서 자화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윤두서 자화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 연구에서 드러난 귀를 꼼꼼히 살펴보자. 국립중앙박물관은 “귀를 그린 것”이라고 했는데, 그 귀는 얼굴에 비해 너무나 작다. 실제로 윤두서의 귀가 이렇게 작았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귀인지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렇다면 윤두서가 실수로 그리 작게 그렸을까. 그림 실력이 뛰어난 윤두서가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안휘준 교수의 지적대로 후대의 누군가가 가필했단 말인가.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윤두서가 살았던 곳,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가면 윤두서 가문에서 사용하던 거울이 있다. 17세기 후반 일본에서 제작한 백동경(白銅鏡·지름 24.2cm)이다. 윤두서는 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자화상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윤두서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썼다. 자화상을 보면 눈 둘레에 오랫동안 안경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지 않은 채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면, 거울을 바짝 당긴 채 얼굴을 들여다봐야 했을 것이다. 퉁퉁한 얼굴을 거울에 바짝 댄다면 얼굴은 더욱 더 굴곡져 보일 것이다. 눈코입은 두드러지지만 주변부는 멀어지고 작아질 것이다. 귀도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작고 멀리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귀를 작게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이 또한 상상력 가득한 추론일 따름이다. 어쨌든 이 같은 상황에서 자화상 속 작은 귀를 윤두서의 귀(또는 윤두서가 그리려고 했던 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부리부리한 눈매, 불타는 수염, 잘려나간 탕건

다음은 부리부리한 눈매와 불타는 듯한 수염. 앞서 살펴본 것처럼 눈과 수염에 대해선 “세상과의 치열한 대결” “섬뜩할 정도의 내면 표출”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윤두서는 분명 눈과 수염을 강조하기 위해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수염이 위로 불타오르는 듯 과장해 표현했다. 윤두서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거리가 생긴다. 윤두서의 눈매가 부드럽고 수염이 적었다면, 윤두서가 아무리 의도했다고 해도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눈매와 수염의 극사실적 표현만으로 꿈틀거리는 내면을 완벽하게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윤두서의 타고난 신체적 특징(부리부리한 눈매, 풍성한 수염, 육중한 얼굴)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치열함을 뒷받침하는 좀 더 객관적인 근거는 없을까. 이 대목에서 탕건의 표현이 중요해진다. 탕건의 윗부분을 잘라낸 것은 분명 윤두서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탕건은 관직에 나간 남자들이 망건 위에 쓰는 것이다. 사대부들의 소중한 복식의 하나다. 그런 탕건의 일부를 잘라낸 채 사대부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거나 도발적인 행위다. 조선시대 남자 초상화 가운데 탕건이나 오건(烏巾)을 잘라낸 경우는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강세황(姜世晃) 자화상, 임희수(任希壽)가 그린 누군가의 초상화 등 몇 점에 불과하다. 통상적으로는 초상화 속 주인공의 탕건을 잘라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윤두서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관직을 상징하는 탕건의 일부를 잘라버렸다. 이는 관직제도에 대한 저항 즉 정치 구도에 대한 저항이다. 이기적인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서인 중심의 상황에서 남인의 저항을 보여주는 방편의 하나로 탕건을 잘라냈을 것이란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목과 귀가 없는 것 그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탕건을 잘라낸 것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얼굴을 화면 위쪽에 배치해 화면 전체를 더욱 중량감 있게 만들었다. 여기에 자신의 타고난 눈빛과 수염을 사실적이면서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했다. 윤두서의 절절한 내면 표현은 탕건을 잘라내고 그 얼굴을 화면 위에 배치함으로써 극적으로 성사(成事)됐다. 본질적이지 않아서 탕건을 잘라낸 것이 아니라 윤두서 자신의 내면 표현에 본질적이기에 탕건을 잘라낸 것이다. 

현재 우리 눈에 목(옷깃선)과 귀는 보이지 않는다(귀로 추정되는 것은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보면 그 선이 육안으로 보이지만, 일단 보이지 않는 것으로 설정하자). 그러나 윤두서는 옷깃선과 귀를 그렸다. 그럼 우리는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을 옷깃선과 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상태를 ‘윤두서 자화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왜 굳이 X선 촬영, 적외선 촬영을 하는 것인가. 단순히 연구를 위해서인가, 연구자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인가, 데이터를 확보해 작품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연구와 보존 처리의 궁극은 또 무엇인가. 그건 무언가 정보를 더 얻어내 작가의 의도와 내면을 좀 더 풍요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다. 

옷깃선이 앞면에 그려졌는지, 뒷면에 그려졌는지 아직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배접지를 해체하지 않더라도 실물을 놓고 검증해 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앞면에 그린 것이라면 강관식 교수의 말처럼, 맑은 날 햇빛 아래서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무언가 흔적이 발견될 수도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특이하고 강렬하다. 그것이 매력이다. 목과 귀가 없어 이 그림에 빠졌는데, 목과 귀가 드러나면서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점점 더 복잡해진다. 과학적 분석까지 동원해 그림을 해석해 보지만 궁금증은 더 커진다. 작품의 실체를 놓고 이렇게 흥미로운 논란이 이어지는 문화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과 논란이 보는 이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무엇이 진짜 윤두서인가. 자화상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신동아 2021년 3월호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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