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18세기 탐라도는 21세기 제주만큼 아름답다[명작의 비밀]

318년 전 제주 타임머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1-07-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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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제주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

    • 제주 지역 풍습과 문화 담은 그림 역사서

    • 생명력 넘치는 제주 풍경도 그림으로 남겨

    • 21세기 제주서 탐라 복원하는 지표로 삼아

    18세기 제주 감귤의 진상 준비 모습을 그린 ‘감귤봉진’(왼쪽). 제주목관아 귤밭에서 벌어진 연희 장면을 그린 ‘귤림풍악’.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18세기 제주 감귤의 진상 준비 모습을 그린 ‘감귤봉진’(왼쪽). 제주목관아 귤밭에서 벌어진 연희 장면을 그린 ‘귤림풍악’.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제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산물 중 하나가 귤이다. 제주 도심의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사적 제38호)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귤밭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가 2002년 제주목관아를 복원하면서 함께 조성한 귤밭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귤이 자란다. 감자, 당금귤, 청귤, 산귤, 당유자…. 제주 원도심 한복판의 문화유적지에서 다양한 제주 귤을 만나다니. 그런데 알고 보니 원래 조선시대엔 이곳 제주목관아 후원(後園)에 귤밭이 있었다. 이를 귤림(橘林) 또는 과원(果園)이라 불렀다. 그럼, 그 당시 제주 사람들은 귤을 어떻게 재배했고 육지 사람들은 귤을 어떻게 즐겼을까.

    조선시대 제주 담은 탐라순력도

    ‘탐라순력도’(1703)의 표지. 제주목사 이형상이 기획하고 제주 화공 김남길이 그림을 그렸다. 1702년 이형상의 순력 모습과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첩이다.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탐라순력도’(1703)의 표지. 제주목사 이형상이 기획하고 제주 화공 김남길이 그림을 그렸다. 1702년 이형상의 순력 모습과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첩이다.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제주도가 귤밭을 복원하면서 참고한 자료가 있다. 보물 제652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703년 제주목사 겸 병마절도사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제작한 순력 관련 기록화첩이다.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관할 지역을 순찰하던 일을 가리킨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제주목사가 전라도 관찰사 역할을 위임받아 행사했다. 1702년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그해 10·11월 제주 지역 순력을 실시했고, 이듬해 5월에 순력과 관련한 내용을 그림으로 기록해 책으로 엮었다.

    화첩을 제작할 때 이형상이 전체적으로 총괄 기획을 담당했다. 그림은 제주지역 화공(畫工) 김남길(金男吉)이 맡았고, 당시 서귀포 대정에 유배 와 있던 오시복(吳始復)이 글을 써 넣었다. 크기는 세로 56.7cm, 가로 36cm이다. ‘탐라순력도’는 그림 41점과 서문 1편으로 구성돼 있다. 이형상이 제주의 여러 지역을 순력하는 모습의 그림, 제주 지역에서 펼쳐진 여러 행사와 제주 지역을 탐승(探勝)하는 모습의 그림, 제주도의 지도 ‘한라장촉(漢拏壯囑)’ 등이 수록돼 있다. 훗날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한 점도 들어 있다. 그림의 하단부에는 그림 내용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의 후손이 비장(祕藏)해 오다 1974년 언론을 통해 그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탐라순력도’의 출현은 당시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제주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979년 보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그 후 20여 년간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탐라순력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계기는 1998년 제주시가 소장자로부터 ‘탐라순력도’를 매입하고 이후 국립제주박물관이 위탁 관리하면서 대중과 만남이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귤 생산량까지 자세히 적혀 있어

    다시 귤 얘기로 돌아가 보자. 탐라순력도에는 감귤나무를 그린 그림이 3점 들어 있다. 제주의 감귤 진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담은 ‘감귤봉진(柑橘封進)’, 귤밭에서 펼쳐진 연희 장면을 그린 ‘귤림풍악(橘林風樂)’과 ‘고원방고(羔園訪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감귤봉진’. 귤을 포장해 중앙정부에 진상하는 작업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사람들이 제주목관아에 질서정연하게 모여 앉아 작업하는 모습을 명료하게 그려놓았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들이 바구니에 열심히 귤을 담고 옮긴다. 줄지어 놓여 있는 바구니에는 귤이 가득하다. 그 옆에선 목수들이 운반용 상자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포장과 운반에 사용할 건초더미를 다듬는 사람도 보인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그 옆 건물에 앉아 감귤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진상 시기와 진상된 감귤의 수량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그 내용을 보니, 진상은 9월 시작해 열흘 간격으로 20회에 걸쳐 이뤄졌다. 진상된 귤은 당금귤 678개, 감자 2만5842개, 금귤 900개, 유감 2644개, 동정귤 2804개, 산귤 828개, 청귤 876개, 유자 1460개, 당유자 4010개, 치자 112근, 진피 48근, 청피 30근이다.

    ‘귤림풍악’도 흥미롭다. 이 그림은 제주목관아 후원에서 벌어진 연희 장면을 담았다. 귤림은 대나무 방풍림과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람이 불어 한쪽으로 쏠리는 대나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면 가득 채운 귤나무의 풍경이 일대 장관이다. 귤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색 주홍색 빨간색 감귤들. 아름다운 제주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림 하단에는 1702년 제주 지역 세 곳의 총 수확량이 적혀 있다. 당금귤 1050개, 감자 4만8947개, 금귤 1만831개, 유감 4785개, 동정귤 3364개, 산귤 18만5455개, 청귤 7만 438개, 유자 2241개, 당유자 9533개, 등자귤 4369개, 석금귤 1024개, 치자 1만7900개, 기각 1만6034개, 지실 2225개.

    ‘감귤봉진’과 ‘귤림풍작’은 이렇게 18세기 초 제주 지역의 귤 생산과 진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림에 구체적인 수치가 적혀 있다니, 깜짝 놀랄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귤 그림들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런 그림과 이런 기록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것이 ‘탐라순력도’의 매력이다.

    조선시대 제주도 상황 담은 ‘그림 史書’

    ‘탐라순력도’ 화첩은 기본적으로 순력의 모습을 담은 화첩이다. 그림을 통해 순력 과정을 살펴보면 군사를 점검하고 조련했으며 무기, 군량미, 국마(國馬) 등의 상황을 파악했다. 활쏘기 대회, 과거 시험, 양로연(養老宴) 등도 개최했다. 그런데 순력도만으로 화첩을 꾸미는 게 좀 섭섭했는지 이형상은 당시 제주의 일상적인 행사 그림과 제주 지역의 풍광 그림도 포함했다. 성산 일출봉, 김녕굴,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산방산과 같은 명승지를 탐방한 모습이 그것들이다.

    군사훈련을 겸해 시행한 수렵과 방사의 모습을 그려 넣은 ‘교래대렵(橋來大獵)’과 ‘비양방록(飛揚放鹿)’, 제주도의 국마(國馬) 목장을 점검하는 내용의 ‘산장구마(山場駈馬)’와 ‘우도점마(牛島點馬),’ 제주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별시의 모습을 그린 ‘승보시사(陞補試士)’ 등 그림의 내용은 다채롭다. 말을 진상하는 모습을 그린 ‘공마봉진(貢馬封進)’을 보면 말 진상의 절차, 말 진상의 종류와 수량, 관계자들의 모습 등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신당(神堂)을 불태워 버리는 광경을 담은 ‘건포배은(巾浦拜恩)’도 놀랍다. 당시 제주 지역의 민간신앙을 정부가 강제로 통제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탐라순력도’ 그림 41점에는 다채롭고 유익한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그림 두 점이 있다. 성산일출봉 해돋이 풍경을 그린 ‘성산관일(城山觀日)’과 산방산 산방굴을 그린 ‘산방배작(山房盃酌)’이다. 두 그림은 그 독특함과 강렬함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해돋이 관람 모습을 그린 ‘성산관일(城山觀日)’(왼쪽)과 제주 서귀포시 산방산 산방굴 풍경을 그린 ‘산방배작(山房盃酌)’.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제주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해돋이 관람 모습을 그린 ‘성산관일(城山觀日)’(왼쪽)과 제주 서귀포시 산방산 산방굴 풍경을 그린 ‘산방배작(山房盃酌)’.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

    화첩에 남은 제주도의 풍광

    ‘성산관일’은 이형상이 성산일출봉에 올라 해돋이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와 관련해 이형상은 그의 다른 글에서 “연꽃이 바다에서 나와 공중에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바다 수면으로 치고 올라온 태양 빛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꽃을 피우는 모양과 닮았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출봉의 모습이다. 기암절벽의 일출봉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일출봉보다 더 길쭉하게 표현돼 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우리에게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색채도 붓질도 이색적이다. 먹으로 윤곽의 농담을 표현했고 푸른색을 다채롭게 변주해 힘차게 모양을 냈다. 무척 오래된 건축조형물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힘이 넘친다. 힘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원초적 생명력이 느껴진다. 제주 화공 김남길의 어떤 ‘끼’가 녹아든 것 같기도 하다.

    ‘산방배작’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것은 이형상이 서귀포 산방산의 산방굴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담았다. 그림을 보면 산방굴은 고래 한 마리가 입을 벌린 모습 같다. 힘이 넘친다. 산의 표현이 규칙적이어서 다소 도식적이지만, 그 단순함 덕분에 훨씬 더 당당해 보인다. 검은색의 진한 먹선과 푸른색의 조화가 다부진 분위기를 전해 준다. 사람들의 내면을 자극하면서 그림을 보고 또 보게 한다. 김남길은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산방산과 관련해 제주 지역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온다. 제주섬이 처음 생겼을 때, 산방산은 원래 한라산의 정상이었지만 그 정상이 뽑혀나가 지금의 산방산이 됐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됐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의 핵심은 산방산의 원초적 생명력이다. 그런 산방산의 중턱에는 멋진 굴이 있고 그곳에서 이형상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제주 화공 김남길은 그 산방산과 산방굴의 모습을 전설 속 장소로 구현해 냈다. 그렇다면 그것은 김남길의 개인적인 ‘끼’를 넘어 제주 지역의 운명적인 유전자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화풍에 녹아난 제주의 생명력

    ‘탐라순력도’의 그림을 두고 전문가들은 대체로 민화풍이라고 평가한다. 민화풍이라는 것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자유분방하다는 말이다. 기성 화단의 격식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동시에 제주 지역 특유의 관점과 인식이 반영됐음을 의미한다. 중앙 화단의 특정 화법 즉 제도권의 형식에 구애하지 않고 제주만의 화풍. 그래서 ‘제주 지역 민간 화풍을 바탕으로 제주 지역의 고유의 조형 의식과 미감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방 감영의 화공이 그림을 그렸기에 더욱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신선하고 참신할 수 있었다.

    ‘탐라순력도’ 그림은 다분히 민화풍이다. 어찌 보면 거칠고 다소 도식적이다. 그런데 그 도식적 측면은 오히려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토속적이면서 역동적이다. 그것은 ‘날것’의 힘이기도 하다. 그 힘은 ‘성산관일’과 ‘산방배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왜 그럴까. 제주가 가진 날것의 힘은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의 원초적 생명력과 신비로움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주스러움, 제주 스타일이다. 소박하고 평범하고 온순한 듯하지만 때론 저항적이고 때론 거친 면이 있다. 그것은 제주 사람들의 유전자에 운명적으로 녹아 있는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의 원초적 생명력이다. 거친 바다와 함께 살아야 하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재발견된 탐라순력도의 가치

    2020년 11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탐라순력도’ 특별전. [국립제주박물관]

    2020년 11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탐라순력도’ 특별전. [국립제주박물관]

    ‘탐라순력도’는 18세기 초 제주목사 이형상의 순력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 기록화다. 동시에 제주 지역의 지도와 일상 풍속 및 도시 구조, 경관 등을 묘사한 인문·지리적 화첩이기도 하다. 이 화첩에는 ‘18세기 제주’가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관아와 성곽의 구조, 군사 방어 시스템, 공물 진상과 행정 체제, 의례와 각종 행사, 지리와 지형, 건축과 도시 구조, 탐승 문화, 사람들의 복식, 포구 풍경과 해녀의 물질, 목축과 목장, 양로연 모습 등등. 그래서일까. 2000년대 이후 ‘탐라순력도’에 대한 연구는 무척이나 다양한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 ‘탐라순력도’를 대상으로 한 연구 주제를 보면 그림, 지도, 무용, 교방(敎坊) 음악, 양로연, 주악, 복식, 국궁(國弓), 해녀, 건축과 조경, 선박 등 매우 다양하다. 조선시대 그림이나 지도 가운데 이렇게 다채로운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다양한 분야에 반영되고 있다. 제주 지역에서는 ‘탐라순력도’의 내용을 역사문화 복원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림 속 순력 장면을 재현하는 등 문화 콘텐츠의 역사적 근거 자료로 쓰고 있다. 조선시대 건축이나 복식 등을 복원하는 일에도 활용된다. 제주목관아에 귤밭을 조성한 것도 그 일환이다. 지난해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특별전 ‘그림에 담은 옛 제주의 기억, 탐라순력도’와 함께 관련 학술대회가 열렸다. 사실 ‘탐라순력도’는 1979년 보물로 지정되긴 했어도 그동안 대중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탐라순력도’라는 이름이 제주 바다 건너 뭍으로 올라오고 있다. 전문가들의 영역을 넘어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 관점도 다채롭고 활용 분야도 폭이 넓다.

    이러한 변화는 ‘탐라순력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문화재와 미술품의 가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탐라순력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이 변신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가치를 재발견한다. 2020년 11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탐라순력도’를 두고 “그림 목민심서”라고 했다.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 매우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표현이었다.

    탐라의 재발견은 탐라순력도로 시작

    ‘탐라순력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곧 우리 시대 탐라의 재발견과 연결된다. 제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 분위기와도 연결된다. 제주 인기가 ‘탐라순력도’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열심히 귤을 먹는다. 귤의 종류까지는 모르지만 귤을 소비하면서 제주의 향기를 맡는다.

    제주에는 산방산이 있고 성산일출봉이 있다. 물론 한라산도 있고 오름도 있다. 그곳들의 공통점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는 곳이며 원초적인 생명력을 품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제주에 간 사람들은 자는 둥 마는 둥 이른 새벽 성산으로 달려가 일출봉에 오른다. 산방산의 육중한 바윗덩어리 앞에서 말없이 탄성을 지르며 기(氣)를 충전한다. 모두 제주의 원초적인 신성함을 경험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300여 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탐라순력도’ 속의 그림들이 이를 명쾌하게 말해준다. 따라서 ‘탐라순력도’와의 만남은 ‘18세기 제주’와의 만남이다. 300여 년 전 그들도 우리처럼 귤을 즐기고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의 신성함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우리는 ‘탐라순력도’에서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탐라순력도’를 새롭게 만나고 있다. 먼 훗날 누군가 ‘탐라순력도’를 평가할 때, “명작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2020년대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탐라순력도 #제주도감귤 #성산일출봉 #명작의비밀 #신동아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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