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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상황실장’ 박남선 “죽기 전에 사죄했었어야지…”

[단독 인터뷰] “용서 구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구분해야”

  •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

‘5·18 상황실장’ 박남선 “죽기 전에 사죄했었어야지…”

  • ● “全, 심판 못 받았는데…사죄 없이 죽어 착잡”
    ● 盧 조문? 분노 남아 있지만 아들 사과에서 진정성 봤다
    ● 문전박대당한 노재헌, 이듬해 또 찾아와 사과
    ● 가해자가 잘못 비는데 용서 않으면 나도 괴롭다
    ● 전남도청에서 체포된 뒤 사형선고, 2년 반 복역
    ● 1988년 ‘신동아’에 “광주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나” 手記 기고
    ●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는 정치인들
    ● 5·18 피해자에게 ‘5월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씨.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조문한 이유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진상 규명에 협조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씨.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조문한 이유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진상 규명에 협조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죄를 지었으면 사죄를 한 다음 죽었어야지…”

‘5‧18 상황실장’ 박남선(67) 씨는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에 이같은 심경을 밝혔다. 그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폭력 진압한 1980년 5월 27일, 최후의 순간까지 현장을 지키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10월 27일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다. 신동아는 앞서 11월 4일과 23일 두 차례 그와 대면‧전화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선생님 소식 들으셨나요.

“무슨 소식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늘 아침 8시 45분에 자택에서 사망했답니다.

“아이고...아직 뉴스를 못 봤습니다.”

-심정이 어떠신가요.

“죄를 지었으면 사죄를 한 다음 죽었어야지…학살의 주범이 갑자기 죽었다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조문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제가 왜 그 사람 조문을 갑니까. 사죄도 안한 사람을. (전 전 대통령은) 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해 심판을 못 받았는데 저승에서라도 받을 겁니다.”

-전 전 대통령 부부는 2016년 신동아 6월호 인터뷰(‘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 명복을 빌면서 유족들 울분이 풀린다면 광주에 가서 돌 맞더라도 가겠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당시 군 최고 실력자로서 발포 명령을 내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자기가 그때의 잘못함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진상 조사에 협조하고 용서를 빈다면 피해자들도 용서 안 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진상을 밝히지 않고 잘못이 없다는 투로 말하고, 또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한 수천 명의 시민이 있는데도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하니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이제 사망했으니 광주 사람들한테는 영원히 상처로 남겠죠.”

5·18 당시 상황실장으로 무장 시민군 지휘

-5·18 당시 상황실장으로 무장한 시민군을 지휘하신 걸로 압니다. 어떻게 상황실장을 맡게 되신 건가요.

“그때 제가 지역 예비군 부중대장이었어요. 또래 예비군을 많이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황실장이 된 거죠. 특별히 잘난 점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5·18 전까지는 민주화운동에 큰 관심이 없으셨다고요.

“일찌감치 사업을 시작해 돈을 엄청 잘 벌었거든요. 당시 운영하던 골재업체 규모가 꽤 컸어요. 5·18이 없었으면 지금쯤 재벌이 돼 있었을 겁니다(웃음).”

-20대 중반 겪은 5·18로 인생 행로가 완전히 바뀌신 거네요.

“그때 전남도청에서 붙잡힌 뒤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이후 내란죄·계엄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요. 1·2심에서 다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천주교계가 구명운동을 벌인 덕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됐습니다.”

당시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윤공희 대주교(천주교 광주대교구장)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5·18 관련자에게 선처를 베풀 것을 호소한 끝에 박씨는 무기수가 됐고, 2년 반쯤 수형생활을 하다 1982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출소했다. 하지만 이미 ‘잘나가던 청년 사업가’의 삶은 끝난 뒤였다.

“학살 원흉들이 정권을 잡은 세상에서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회사는 그새 망해 버렸고, 저는 가난한 범법자가 돼 있었습니다. 억울했죠. 그때부터 ‘살인마 전두환 처형’을 외치며 계속 데모를 했어요. 숱하게 잡혀갔고, 지속적으로 감시를 당했죠. 잠시 취업이라도 할라치면 기관원이 회사에 찾아와 ‘저 사람 빨갱이입니다’ 하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사죄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박남선 씨가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조문한 뒤 유족인 노재헌 변호사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위로하고 있다. [뉴시스]

박남선 씨가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조문한 뒤 유족인 노재헌 변호사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위로하고 있다. [뉴시스]

박씨는 “얼마 전 계산해 보니 5·18 이후 지금까지 직장에 다닌 기간이 19개월에 불과하더라”며 “가족들한테 미안한 점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아들이 공부를 제법 잘했거든요. 서울 명문대에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어요. 하지만 생활비를 대줄 여력이 없어 집 근처 대학에 보냈습니다. 아들은 늘 제게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저 미안할 뿐이에요.”

-말씀을 들어보면 5·18은 선생님께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째, 5·18 이후 41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내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 잘못했다. 용서를 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태우 씨 아들(노재헌 변호사)은 2019년부터 매년 광주에 찾아와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라고 하잖아요.”

박씨는 노 변호사가 2019년 처음 만남을 요청했을 때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 변호사는 이듬해 다시 그를 찾아왔고, 아버지가 사과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올해 5월에 또 왔죠. 노 변호사는 아버지 병세가 호전되면 직접 모시고 사죄하러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고도 했고요. 그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계속 사과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노 변호사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조문을 가겠다’고 약속했죠.”

-앞서 노 전 대통령을 조문한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전두환 씨를 포함해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학살 원흉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진상규명에 협조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용서를 구하는 자와 그러지 않는 자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신 건가요.

“천만에요.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죠. 다만 가해자가 잘못을 비는데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담고 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뿐 아니라 나까지 괴롭잖아요. 그래서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박씨는 1988년 5월 ‘신동아’에 “광주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나”라는 제목의 수기를 기고한 일이 있다. 당시는 노태우 대통령 임기 첫해로, 아직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때다. 그는 “5·18의 실상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용기를 냈다”고 회고했다.

박씨 수기에는 광주 시민들이 항쟁 도중 계엄군 포로를 붙잡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당시 군인들이 저지른 폭력에 가족과 이웃을 잃고 분노에 차 있던 시민들은 “저들에게 우리가 당한 만큼 갚아주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박씨는 “계엄군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대했다고 해서 똑같이 보복하면 안 된다. 포로 처리 문제는 내게 맡겨달라”며 동료들을 다독였다. 이후 군인에게 밥을 먹이고 군부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한 셈이다. 이번 노 전 대통령 조문도 그 연장선에 있는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태우 조문 비판하는 사람들 심정 이해한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무장한 시민과 공방을 벌이고 있는 계엄군. [동아DB]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무장한 시민과 공방을 벌이고 있는 계엄군. [동아DB]

-선생님이 노 전 대통령을 조문한 뒤 5·18 관련 단체들이 “희생자나 유족 뜻과 무관한 개인 행동일 뿐”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습니다.

“저는 그분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5·18 유공자가 저를 포함해 4500명 정도 돼요. 대부분이 1980년 이후 큰 고통 속에 살고 있죠. 생활고로 자살한 사람이 80명이고, 600명 정도는 기초수급대상자예요. 저도 차상위계층으로 살림이 넉넉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병든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5월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이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가해자가 용서를 빌지도 않았으니 분노가 쉽게 사라질 수 없어요.”

-노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면 피해자 및 유족들 반응이 달랐을까요.

“달랐을 겁니다. 광주 사람들이 그렇게 막혀 있거나 편협하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했어요. 이번에 조문을 다녀온 뒤 ‘잘했다’는 격려 전화도 300통 가까이 받았습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지난 11월 10일 광주를 찾았다.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그는 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며 “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당시 윤 후보는 오월 어머니 5명과 시민들에 가로막혀 추모탑까지 가지 못했다. 박남선 씨는 5.18민주묘지로 향하는 윤 후보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광주 5.18민주묘지 참배할 당시 옆에 계시던데요.

“후보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묘지에 참배하고 내가 5.18 유적지인 상무대 영창 둘러볼 예정인데 안내 해줄 수 있냐고 물었죠. 윤 후보 방문으로 광주가 시끄러웠는데, 반발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제가 안내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큰소리가 안 났는데 묘지에서 어머니들이 목소리 내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생떼 같은 자식들이 죽었는데 화내시는 걸 이해해야죠.”

-5·18 관련자들의 삶이 여전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1990년대 이후 5·18보상법, 5·18유공자법 등이 제정되지 않았나요. 그 덕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실상은 다릅니다. 국가유공자법에는 대상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규정돼 있어요. 반면 5·18 관련법은 피해 정도에 따라 책정된 보상금을 한 차례 지급하도록 할 뿐입니다.”

박씨에 따르면 국가유공자법 적용을 받는 4·19 부상자의 경우 상이1급 판정을 받으면 매달 약 300만 원에서 800만 원 정도의 연금을 수령한다. 반면 두 다리를 잃은 상이1급 5·18 유공자는 일시금 9800만 원을 받는 게 전부라고 한다. 박씨는 “공무원 시험 응시자에게 주는 가산점도 수혜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5·18 유공자 자식 가운데 3분의 1은 아예 대학에도 못 가는 게 현실이거든요. 정치권에서는 필요에 따라 5·18을 민주화의 초석이라 치켜세우지만, 정작 유공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야 모두 5·18 이슈를 소홀하게 다룬다고 여기시나요.

“그렇습니다. 다 똑같아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개인적으로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그분은 위대한 정치인이지만, 집권을 위해 호남 사람들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와 화해했거든요. 대선후보 시절이던 1997년 ‘집권하면 전·노를 사면하겠다’고 공약했죠. 당선 뒤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두 사람 사면을 건의했고요.”

-‘광주의 5월’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문턱에 선 가해자들이 어서 사죄하고, 진상규명에 협조하길 바랍니다. 희생자들의 피해 복구도 필요하고요. 이 모든 과정이 끝나기 전까지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어요. 가해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고 교훈을 남길 때 비로소 5·18은 역사의 한 장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실린 박남선 씨 수기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왼쪽)’와 2016년 6월호에 실린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 기사.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실린 박남선 씨 수기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왼쪽)’와 2016년 6월호에 실린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 기사.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박씨는 ‘신동아’ 1989년 1월호에 실린 505보안부대원 허장환 씨 수기 이야기를 꺼냈다. 505보안부대는 5·18 당시 시위 진압과 주동자 수사 등을 담당한 부대다. 허씨는 신동아에 실린 글에서 당시 자신들이 5·18 관련 사실을 어떻게 조작하고 왜곡했는지에 대해 생생히 고백했다. 그의 원고에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숨져간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영혼 앞에 사죄하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위대원이었던 나 같은 사람이 겪은 사실을 그대로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박씨는 “허씨가 이 글을 쓴 건 아들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허씨 아들이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실린 박씨 기고문을 읽고 아버지에게 “이게 사실이냐”고 물은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허씨는 “어린 아들에게마저 진실을 호도할 수는 없었다”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박씨는 “이번 노 전 대통령 조문을 계기로 허씨처럼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남선 #5·18광주민주화운동 #노태우 #신동아



신동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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