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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지, 호박범벅, 호박버무리… 푸짐한 박 요리 어때요?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박고지, 호박범벅, 호박버무리… 푸짐한 박 요리 어때요?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 것이 좋다. [Gettyimage]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 것이 좋다. [Gettyimage]

날이 뜻밖으로 쌀쌀해지니 뜨끈한 국물이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다. 무와 대파를 듬뿍 넣고 고춧가루를 풀어 만드는 소고깃국, 황태를 참기름에 볶아 끓이는 황태국, 미역에 밑간해 바락바락 주물러 푹 고아 만드는 미역국 등을 끓여 며칠을 돌려가며 먹었다. 그러나 아침 찬바람이 이렇게 갑자기 불 때면 딱 먹고 싶어지는 국물은 따로 있다.

지난달에 실컷 끓여 먹었던 박을 썰어 넣은 맑은 소고깃국이다. 우연히 큼직한 박 한 덩어리가 시댁에 굴러들어와 서울 사는 우리 집까지 몇 쪽이 전해졌다. 박은 우리 동네 마트에서는 통 볼 수 없는 채소다. 애호박이 자란 것도 아니고, 늙은 호박이 덜 늙은 것도 아니다. 박은 그냥 박이다. 은근한 연두색의 커다랗고 둥근 박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껍질이 너무 딱딱해지기 전에 수확해 먹는다. 반으로 쪼개어 가운데 씨 부분을 파내고 껍질은 칼로 치거나 필러 같은 것으로 긁어 벗긴다. 참고로 박은 꼭지와 꽁지 부분이 단단하므로 쪼개기 전에 위아래를 뚜껑 따뜻 칼로 잘라 없애면 썰기가 수월하다. 씨와 껍질을 제거하고 큼직하게 조각낸 다음 자주 요리해 먹는 모양으로 썰어 무나 대파처럼 냉동해두면 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수분이 많은 재료라 냉장실에 두면 쉬 무를 수 있다.

고들고들 달착지근 박고지, 경계 없는 친화력

박의 살을 띠처럼 길게 깎아 말린 박고지. [Gettyimage]

박의 살을 띠처럼 길게 깎아 말린 박고지. [Gettyimage]

박을 납작하게 썰어보면 결을 가진 무처럼 아삭하지는 않다. 껍질을 벗겨낸 부분은 풋사과처럼 산뜻한 초록이고, 안쪽으로 갈수록 참외처럼 살이 희며 연하고 매끈하다. 시원한 향이 나며 익으면 연하게 단맛이 오르고 부드럽지만 쉽게 무르거나 부서지지 않아 음식을 해놓으면 모양도 맛도 정말 깔끔하다. 양지머리를 작게 썰어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납작하게 썬 박을 넣어 우르르 끓으면 불을 줄여 고기 맛을 우리고 간을 맞추면 박소고깃국이 완성된다. 중간에 파나 버섯을 썰어 넣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진 마늘을 조금 풀어 자극을 더하기도 한다. 운이 좋고, 때가 맞으면 송이버섯 한두 개를 가늘게 찢어 넣을 수도 있다. 박은 여느 호박처럼 볶아서 나물처럼 먹기도 하고, 수제비나 칼국수에 넣어도 좋으며, 가을 낙지나 주꾸미로 탕을 끓일 때 썰어 넣으면 궁합이 딱 좋다.

가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박 한 덩어리를 더 구해두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박처럼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지만 박고지라는 것으로 아쉬움을 조금 달래볼 수 있다. 박의 살을 마치 띠처럼 길게 깎아 말린 것이다. 나는 박고지를 처음 본 날 무슨 노끈 같은 걸 파는 줄 알았다. 끈처럼 길고 코코넛 말린 것처럼 뽀얀 박고지는 다른 말린 채소나 묵나물처럼 물에 불리고 삶아서 요리한다. 고들고들한 식감과 달착지근한 맛을 가진 박고지는 양념에 볶거나 무쳐서도 먹지만 찌개나 탕, 조림에 넣으면 훨씬 별미다. 건더기가 색다른 씹는 맛을 느끼게 하며, 깨끗한 색 덕에 어느 재료와도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국물에 시원하고 깊은 맛을 더해 감칠맛이 난다.

속살 꽉 찬 늙은 호박, 푸근하고 너그러운 센스

늙은 호박. [Gettyimage]

늙은 호박. [Gettyimage]

바람처럼 왔다가는 젊은 호박인 박과 달리 늙은 호박은 우리 곁에 많이 있다. 우리가 늙은 호박이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크고 딱딱하고 둥글 넙적하며, 울룩불룩 굴곡지고 탁하면서 연한 살구색이 나는 것이다. 이 호박의 본래 이름은 맷돌호박이다. 껍질이 연할 때 먹어야 하는 호박들과는 달리 늙은 호박은 껍질이 단단하게 익을수록 속이 달게 여문다. 잘 익은 늙은 호박을 힘겹게 쪼개면 눈부시게 예쁜 주황색, 말 그대로 호박색의 살이 가득 차 있다. 대체로 엄청나게 큰 이 열매 하나를 손질하면 10가지 요리는 두둑하게 해먹을 수 있다. 가족이 함께 하더라도 늙은 호박 하나 손질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니 생생한 조각을 바로 채 썰어 전을 부쳐 먹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가을 낙엽처럼 색이 고운 부침개가 얼마나 달고 구수한지 간장 낼 새 없이 먹어치우기 바쁘다. 써는 김에 고지로 만들 것도 납작하게 다듬어 한쪽에 두고 말리기 시작하면 좋다. 늙은 호박살은 단단해도 수분이 꽤 많아 말리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말리는 중에 조금씩 걷어 떡이나 찐빵을 만들 때 넣어도 좋고, 다른 채소와 섞어 튀김을 만들어도 맛있다.



죽보다 수프가 쉬워

호박범벅. [Gettyimage]

호박범벅. [Gettyimage]

호박을 설렁탕집 깍두기처럼 큼직하게 썰어 푹 찐 다음 삶은 콩이나 밤 같은 걸 섞어 범벅을 만들어 뚝뚝 떠먹을 수 있다. 이때 너무 질고 무르면 밀가루 물을 개어 여기저기 슬쩍 뿌리며 찌면 조금씩 되직해진다. 호박범벅은 식어도 별미다. 잘게 썬 호박과 쌀가루를 켜켜이 섞어 찌면 쑥버무리처럼 호박버무리를 금방 만들 수 있다. 우리 엄마라면 호박으로 당장 죽을 끓이겠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쉬운 수프를 택하겠다. 납작하게 썬 호박을 양파와 함께 푹 익도록 오일에 볶은 다음 갈아서 버터와 우유를 넣고 부드럽게 끓이면 끝이다. 이 역시 차가워도 꿀맛이다. 소금에 살짝 절여 김치처럼 버무려도 되고, 밥에 몇 쪽 얹어 곱게 쪄 먹기도 하며,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그저 구워 먹어도 된다. 늙은 호박은 제 맛이 워낙 진하고 좋아 솜씨가 부족한 이일지라도 얼추 맛있게 음식으로 차려낼 수 있게 해주는 푸근하고 너그러운 식재료다.



신동아 2022년 11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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