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쉰 살, 어느 중소기업인의 삶
‘나는 왜 기업을 하는가’라는 질문
기업가 반열 오른 사람들의 공통점
호암의 혜안과 李 회장의 추진력
터널 속에서도 공장 짓고 인재 모으다
삼성은 세 번 망할 뻔한 회사
초격차 기업은 초격차 인재가 만든다
기술이 중요한 기정학(技政學) 시대
신간 ‘이건희 반도체 전쟁’. [동아일보사]
독립한 지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 그는 회사를 연매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알짜 기업으로 키웠다. 다들 주변에선 돈 잘 버는 여성 기업인이라고 부러워한다. 한 겹 더 들어가 그의 일상을 보면 기업을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느껴진다.
그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해외 출장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다녔다. 유럽에서 입국한 다음 날 바로 러시아로 떠나는 식의 강행군도 비일비재했다.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친정 엄마와 함께 젖먹이를 들쳐 업고 바이어와 협상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거래처가 주로 비행시간이 서른 시간 넘게 걸리는 남미에 있다 보니 장시간 출장이 많다. 한국에서는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쁘다 보니 어떤 때는 서둘러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서 라운지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그는 서울에서도 일분일초를 아끼며 사람을 만나고 일을 챙긴다. 체력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마라톤도 뛴다.
육체적 고단함도 고단함이지만 정신적 고단함도 봉급생활자 처지에선 상상을 초월한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사부터 심리 상태까지 신경써야 하고 자금 융통, 세금 문제 등 한마디로 인사·노무·재무 등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연쇄반응이 일어나기에 보통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정신력을 가져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전 세계를 누비는 무역 전사가 바로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존경심도 들지만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중소기업인의 애로를 느낄 때도 많다.
1993년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이 임원진에게 ‘신경영’ 구상을 설명하고 있다. [삼성전자]
애국심 있던 위대한 기업가들
기업활동을 하는 기업인들을 만나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기업 규모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나는 왜 기업을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궁극에는 큰돈을 벌고 싶다는 야심이 있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돈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앞에 소개한 기업인은 자신에게 일은 인격 수양의 도구라고까지 말한다. 직원들이나 거래처로부터 배신도 숱하게 당해 봤고 말도 안 되는 고객의 클레임에 ‘참을 인(忍)’자를 수백 수천 번씩 새길 때도 많았다고 한다. 자금이 융통되지 않아 이대로 문을 닫아야 하나 절망하던 때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진 직원들 생계가 눈에 아른거려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곤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질의 제품을 많은 사람에게 공급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그가 일을 하도록 만드는 동력이다.
모든 기업인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어떻게 경영하느냐는 스타일과 생각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기도 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기업인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외려 정신적·육체적 고단함을 이겨내야 하는 ‘하드코어’ 삶이다 보니 돈에 대한 추구와 함께 가치에 대한 추구도 크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필자는 ‘경제사상가 이건희’(2021년 10월)와 ‘이건희 반도체 전쟁’(2022년 10월)을 연달아 집필했다. 그 과정에서 접한 호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정치를 예로 들어보자.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정치꾼, 정치인, 정치가라는 레벨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생계 수단으로 정치하는 레벨을 정치꾼이라고 한다면 사상과 철학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극단적으로는 목숨까지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을 정치가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장사꾼이 아니라 기업가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돈 이전에 추구하는 가치가 명확하고 이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올곧게 끌고 가는, 그리하여 마침내 결실을 내는 사람들이다. 사실 돈을 버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정직한 행위다. 남을 속여 돈을 버는 것은 순간이다. 남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익이 될 것을 만들고 팔아야 한다.
1976년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가 포항제철을 찾았을 때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경영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포스코]
반도체가 외교·안보·국방인 시대
이건희 회장이 별세한 지 벌써 2년이 됐다. 고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세상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2년 전 ‘신동아’에 ‘경제사상가 이건희’ 연재를 시작했다.살아갈수록 결국 ‘삶이란 밥’이라고 자각하게 된다. 밥벌이의 무거움과 숭고함에 천착하게 되면서 기업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다 고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평가를 덜 받는 분위기로 보여 안타까웠다.
고인의 발자취를 파고들수록 무에서 유를 만든 리더십과 비전, 철학에 심취했다. 깊이 감동했다. 세계 1등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경영진, 연구직, 생산직, 사무직 봉급생활자들의 도전과 헌신, 열정이 떠오르는 장면 장면마다 자주 숙연해졌다.
온 국민이 반도체의 ‘반’ 자도 모르던 시절에 오로지 미래만 생각하며 이 사업에 뛰어들었던 호암 이병철 회장의 혜안과 용기 그리고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불살랐던 이건희 회장의 비범하고 탁월한 의사결정과 추진력에 집필 내내 압도됐다. 지난해 나온 책 ‘경제사상가 이건희’가 고인의 삶과 철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책은 제목 그대로 반도체에 초점을 맞춰 썼다.
우리는 지금 각종 정보기술 덕분에 감염병이 초래한 일상의 어려움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발 빠른 백신 개발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공유하고 싶다.
그 정점에 반도체가 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없었다. 단지 산업의 쌀 정도가 아니라 머지않은 과거에 일어난, 현재 일어나는,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기술혁명의 원천이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모든 산업, 다시 말해 자율주행자동차, AI(인공지능), AR·VR(증강·가상현실), 바이오, 커머셜, 휴대전화, TV 등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300여 개지만 전기자동차에는 2000여 개가 들어간다.
스티브 블랭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21세기 반도체는 지난 세기의 석유와 같다.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제·군사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가 외교이고 국방이고 안보인 시대다.
‘이건희 반도체 전쟁’에서 하고 싶었던 말
대한민국 반도체 역사는 시작부터 불가능한 일을 무모하게 밀어붙여 성공시킨 피 말리는 도전의 역사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는 세계시장에서 압도적 1위 자리를 30년간이나 지켜왔다. 글로벌 경제 전쟁이라는 무대에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업과 제품이 수두룩하다. 세계시장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압도적 지배력을 가진 제품을 대한민국 회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세계시장 점유율은 2021년 기준 7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대한민국에서 세계시장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선도한 수출 품목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막연히 알고 있던 반도체 신화를 차근차근 풀어가고 싶었다.흔히 과학과 기술 이야기라고 하면 컴퓨터나 돈,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기술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 기술을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파고들다 보면 결국 사람으로 귀결된다. 사람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기술 발전을 이끈 동력과 결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무모하고 과감한 도전을 하며 경계를 부순 혁신가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술 관련 서적은 기술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나 설비투자 혹은 생산성 향상 및 비용 절감 등 제조업의 앵글을 활용한다. 정보통신혁명은 제조업의 논리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다.
1980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 [삼성전자]
남의 것을 뒤에서 쫓는 추격자에서 벗어나 맨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조직 문화·교육 방식·상상력을 모두 버려야 한다. 호암과 이 회장은 “반도체처럼 리스크가 큰 사업에 투자하다 삼성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며 모든 사람이 주저하고 반대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사업을 밀고 나갔고 결국 해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개발 기간이 얼마나 걸리고 예산은 얼마나 투입되며 손익분기점은 어느 수준인지 등의 문제보다 반도체가 만들 세상에 대한 비전·가치·철학에 집중했다. 미래세대를 첨단 디지털 세상으로 초대한 것이다.삼성 반도체의 역사는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반도체 입문기’다. 호암이 대한민국 1호 반도체 회사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1975년부터 도쿄 선언을 하기 전인 1982년까지 경기 부천에서 반도체 기초기술을 축적하고 인재를 양성하던 시기다.
두 번째는 ‘메모리 창업기’다. 호암이 도쿄 선언을 한 1983년부터 별세한 1987년까지 기흥사업장이 건설되고 메모리 산업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던 시기다.
세 번째는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신경영 선언을 하던 해인 1989년부터 1993년으로 메모리 분야에서 추격을 완성하고 선두 주자로 나서는 ‘선두 진입기’다.
네 번째는 1994년부터 1999년 세계 1위로서의 도약기인데, 1994년부터 메모리 기술을 선도하는 상황에서 1996년부터 시작된 4년간의 반도체 대공황을 이겨낸 ‘역경의 시기’다.
마지막 2000년부터 2003년에 해당하는 ‘비메모리 사업으로의 재창업기’다. 삼성은 2000년부터 비메모리 글로벌 사업 방향을 재정립하고 본격 추진을 시작해 2003년 비메모리 전용 라인을 건설했다. 말하자면 첨단 파운드리 사업이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실 삼성이 세계 초일류 반열에 굳건히 올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기 시작한 것은 2010년을 넘기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삼성이 반도체 사업으로 세 번 망할 뻔했다”고 했다. 극심한 호황과 불황을 오가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반도체 전쟁을 이끌며 얼마나 피가 말랐을지 보통 사람 처지에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호암과 이 회장은 언제 다시 호황이 올지 모르는 지옥 같은 터널을 지나면서도 공장을 짓고 인재를 모았다. 위암을 이겨냈던 호암은 다시 당신의 몸(폐)을 습격한 암세포와 투병 중이었음에도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기술개발을 독려하며 공장 건설에 매진했다.
2000년대 들어 세계 강호들이 대전을 벌이던 메모리 반도체 전쟁에서 삼성이 유일하게 승리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 이건희 회장도 암 진단을 받는다. 그야말로 초인적 의지로 신명을 바쳐 일한 두 분이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을 얻기 위해서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도 호암과 이 회장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교훈을 얻어보자는 데 있다.
‘삼성 정신’ 없는 삼성을 보는 느낌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삼성의 DNA에 녹아 있는 강력한 오너십, 헌신적 팔로어십, 초스피드 경영, 절묘한 타이밍 경영, 불황을 버티는 힘이 발견된다. 이는 현재 닥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삼성맨들로부터 들은 플래시 메모리의 역사는 대중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시대가 바뀌면 산업구조도 바뀌고 사람들의 의식도 바뀐다. 그에 따라 각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의 내용도 바뀐다. 기업은 시대 변화를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지금 시대 삼성의 리더십은 호암이나 이 회장 때와는 당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2022년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했다. 그로부터 사흘 만에 삼성은 ‘역동적 혁신성장을 위한 삼성의 미래 준비’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4년간 반도체, 바이오, 신성장 IT(인공지능·차세대 통신)에 45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다. 선제적 투자와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반도체 초강대국’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가슴 뛰게 하는 원대한 사업 구상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삼성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많은 매체가 장밋빛 계획에 박수를 치며 그 내용을 해설하는 데 보도의 초점을 맞췄지만 삼성이 발표한 원문을 보면 미래에 대한 우려와 긴장감이 곳곳에 짙게 배어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미·중의 견제와 추격이 거세지고 있음. (…)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는 경쟁사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선 상황. (…) 삼성의 행보는 간단치 않을 전망. (…)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구조 변화, 경제안보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 등등의 표현으로 고뇌와 위기의식이 강조돼 있다.
이어 결론 격으로 “앞으로 5년은 새로운 미래 질서가 재편되면서 한국 경제의 발전과 쇠락을 가르는 변곡점이 될 것이 예상된다”고도 했다.
지금 삼성 내부뿐 아니라 밖에서도 삼성 반도체에 대한 걱정과 위기의식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 최초·최고는 삼성’이라는 등식이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도 망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삼성도 잘못하면 망할 수 있다”고 위기를 강조하며 ‘신경영 정신으로 진정한 구조개혁을 해달라”고 했다. 삼성의 역사는 끝없이 닥치는 위기에 대한 치열한 대응의 역사이기도 했다.안타깝게도 지금 삼성에는 변화를 향한 뚜렷한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 투자와 기술 얘기는 많이 하지만 경영진, 직원, 국민을 설득하는 시대적 화두가 없다. ‘삼성 정신이 없는 삼성’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작금의 삼성은 이 숙제부터 풀어야 한다.
시대 변화를 읽는 세계의 현자들을 두루 만나 대화를 나눠 통찰을 높이고, 그 내용을 임직원들과 공유하는 ‘삼성 정신 정립’의 과정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집필을 위해 만난 삼성의 전직 CEO들은 호암과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인재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말했다. ‘기술과 투자’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핵심 인재’ 영입에 최고경영진이 총력을 경주해야 할 때라고 본다. 초격차 기업은 초격차 인재가 기본이다. 미국, 일본, 유럽은 물론 인도, 베트남, 대만의 초일류 인재 영입에 혼신의 노력이 필요할 듯싶다.
특단의 분위기 쇄신도 필요해 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삼성맨들로부터 뭔가 주눅이 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오랜 기간 지속된 반(反)기업, 반(反)삼성 분위기를 의식한 심리적 위축감일 수도 있지만 1등에 안주하며 형성된 수직적, 관료적 문화에 대한 답답함으로도 느껴졌다.
요즘 젊은 직원들에게 과거 세대와 같은 사명감, 열정, 도전과 헌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회사나 국가보다는 개인의 욕망과 성취가 우선시되는 시대다. 시대가 바뀌고 젊은이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선대 회장들이 ‘질타와 독려, 도전’의 리더십을 갖췄다면, 오늘날의 경영자는 ‘소통과 동기부여’의 리더십을 갖고 있어야 하는 시대다. 폐쇄적이고 신비화된 리더십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리더십 말이다.
미중 전쟁에 드리운 미일 반도체 전쟁 데자뷔
1987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 당시의 모습. [삼성전자]
미국은 반도체 패권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반도체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은 일본, 장비는 유럽, 위탁 생산은 한국·대만이라는 글로벌 분업 공식을 흔들고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다.
천문학적 규모의 실탄도 마련해 놓고 있다. 8월 9일 공포된 ‘반도체산업 육성법’은 자국 반도체 기술 및 산업 발전을 위해 2800억 달러 규모(약 366조 원)의 투자를 추진하고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25%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도 2025년까지 자국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70%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반도체 굴기(崛起) 2025’ 프로젝트 아래 국가 차원에서 약 200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한다.
대만의 안보는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분야 세계 1위 기업 TSMC가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TSMC에 쏟는 대만 정부의 애정은 여러 번 증명됐다. 지난해의 경우 가뭄이 들자 하루 약 16만t의 물을 쓰는 TSMC에 농업용수를 먼저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도 첨단 반도체 생산 공장 투자에 7740억 엔(약 7조5000여억 원)의 직접 보조금을 편성해 뒀다.
지금 미국은 중국과 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첨단기술이 중국에 흘러가지 않도록 촘촘하게 규제하고 있다. 10월 7일(현지 시간)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반도체 메모리칩 생산업체인 YMTC(양쯔메모리)를 비롯해 중국 기업 31개사를 수출통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들 기업들과 거래하려면 물품을 보내기 전에 실사를 통해 합리적 사업인지 확인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부에 미리 추가로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미국은 그동안 중국의 시스템 반도체업계를 겨냥해 첨단기술이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촘촘한 제재를 해왔다. 이번 규제의 타깃은 메모리 분야에서 약진 중인 YMTC와 창신메모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YMTC의 경우 최근 애플 아이폰용 낸드플래시 공급사가 됐다는 보도가 나와 화제가 됐다. 미국 정부 처지에서는 이들 메모리 업체가 낸드플래시를 넘어 고성능 D램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더 성장하기 전에 조치를 취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 지형의 판이 안보 지형의 판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미국은 국제질서에서 미국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은 40년 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대표되는 미일 전쟁의 데자뷔(déjà vu)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반도체 기술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주요 재무장관들을 불러 강제로 엔화 가치를 올렸다. 이것은 훗날 일본 반도체가 시장에서 무너지면서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의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심지어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는 이념동맹국이자 군사동맹국이다. 이런 나라도 이렇게 무참하게 무너뜨렸는데 중국은 오죽하겠는가. 기술 전쟁의 본질을 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는가.
50대 문송이 아줌마의 반도체 입문기
8월 4일 양향자 무소속 의원이 반도체산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일명 ‘K칩스법’을 발의했다. K칩스법은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총 2건의 패키지 법안이다. 하지만 여야 정쟁과 정치권의 위기 불감증 탓에 뒷전으로 밀려 있다. 수도권 대학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려달라는 업계의 오랜 목소리도 국회의 벽을 못 넘고 있다.이번에 ‘이건희 반도체 전쟁’을 쓰면서 반도체가 첨단산업의 핵심 소재를 넘어 핵심 안보 자산이 됐음을 새삼 절감했다. 미국과 중국이 왜 반도체 기술 패권을 놓고 각축하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지정학(地政學)과 더불어 기술이 중요해지는 기정학(技政學)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대만의 안보도 군(軍)이 아니라 세계 최고 파운드리 업체인 TSMC에 달렸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실리콘(반도체) 방패’가 안보로 직결되고 있는 현실을 오롯이 보여준다. TSMC가 멈추면 미국 첨단 반도체 회사들도 멈추기 때문이다.
기술 중심으로 신냉전의 국제질서 판이 짜인 상황에서 미국은 이른바 ‘칩4 동맹’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반도체 분업 체제의 중심 국가로 대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강대국에 휘둘리는 새우 신세가 아니다. 국제질서의 주요한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다. 반도체 덕분이다.
필자는 전형적인 ‘문송이(문과라서 죄송합니다)’다. 기술과 반도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책 집필을 시작했다. 비전문가 입장에서 당치 않은 도전이라는 생각도 자주 들었지만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기술을 설명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하드코어 MBA 과정을 이수한 느낌이다. 이 책이 대한민국이 반도체 선도 국가로 가는 데 작은 역할이나마 담당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