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보수 표방 양대 진영 극단 대립
한 사람만 바라보는 정치 ‘여가부 폐지’
대통령 생각에 진영 전체가 몰려다녀
지도자 되려는 사람이 밟을 표준 경로 필요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첫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제가 처음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던 정권 말기였습니다. 그때 만난 보수 진영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실망감을 토로하는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명박은 진짜 보수가 아니다. 실리에 따라 움직일 뿐, 추구하는 이상이나 목표가 없다. 그에 비해 박근혜는 구현하려는 가치가 있는 진정한 보수 정치인이다. ‘가치보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적으로 장사꾼에 불과한 이명박과는 분명 다른 리더십을 보여줄 것이다.’
가치보수가 무슨 뜻인지 불분명했고 개인적으로 박근혜라는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전(前) 정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청와대에 들어가자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는커녕 관저에 칩거한 채 장관들조차 자주 만나지 않았습니다. 국정은 최순실에게 맡겨놓고 본인은 뭘 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탄핵이라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 즈음 한국 정치를 바꿀 구원투수로 안철수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한동안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그때 안철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상찬하면서 쓰던 말이 ‘학습능력’이었습니다. 정치 경험은 적지만 워낙 학습능력이 뛰어나 외교, 국방, 경제, 복지 등 국정운영에 꼭 필요한 분야의 지식을 남달리 빠르게 습득한다고들 했습니다. 1시간 정도 전문가의 특강을 들으면 너무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전문가들이 자료를 찾아보게 만든다는 말이 나왔지요. 선거를 앞둔 때라 과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저 나름대로는 뛰어난 자질이 있다는 평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나중에 보니 대선주자들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똑같이 그런 찬사를 보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학습능력 덕분에 문제가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진보진영의 희망으로 떠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긴 했지만 변호사 출신으로 정치나 경제에는 별다른 식견이 없었는데 민주당 인사들은 문 대통령이 워낙 출중한 학습능력이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심지어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김의겸은 경제전문가들과 함께 공부모임을 하던 문 전 대통령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보다 학습능력이 두 배나 뛰어난 것 같다’는 참모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보수도 다르지 않습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선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가 ‘학습능력’이었습니다. 사실 평생을 검사로만 지내온 분에게 국정운영에 대한 비전이나 구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아무리 명석하다 한들 경험을 쌓고 공부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차근차근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올리지 않고 바로 대선으로 직행한다면 외교나 경제 등 몇몇 분야에 있어서는 조력이나 도움을 넘어서 거의 대행에 가까운 역할을 해줄 전문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윤 전 총장 주위에서는 그런 상식적인 고민을 하기보다는 그의 뛰어난 개인적 능력을 칭송하는 얘기만 들렸습니다. 노동문제 전문가인 어느 교수는 ‘윤 총장이 나를 만나러 오기 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유연안정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만난 날 보니 자료에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숙독했더라. 궁금한 점을 미리 정리해 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유연안정성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첩첩이 난관이 쌓인 우리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 어떻게 몇 시간 자료 읽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정치인들마저 ‘내가 보장한다. 학습능력이 탁월하다. 자기 정책으로 해야겠다 싶은 건 바로 흡수한다’라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공동선에 대한 합의 없이 권력 잡는 데만 열중
우리나라 정치는 각기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두 개의 진영이 극단 대립을 하는 형국입니다. 정치를 통해 달성해야 하는 공동선에 대한 합의는 없이 어떻게든 상대편을 꺾고 권력을 잡는 데만 열중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진영 내에 20-30% 이상의 지지율이 나오는 대선주자가 출현하면 무슨 논리를 앞세워서라도 그 사람을 옹호하고 지키려 듭니다. 객관적으로 분명한 단점이나 경험 부족도 개인 자질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다가 당선이 되면 5년간 그 사람만 바라봅니다. 아무도 대통령의 말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가 애초에 가졌던 결점은 임기 내내 고쳐지지 않은 채 우리 사회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저는 이제 한 사람을 선택해서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 사람의 뜻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식의 정치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대통령의 고집이나 무능 때문에 온 국민이 답답해하면서 견뎌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솔직히 대선주자 개개인에 대한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대한민국 현실정치의 장에서 대권 후보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짧지 않은 기간 정치를 경험하면서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대통령 한 명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진영 전체가 합리적 이견마저 내지 못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구조적 병폐를 먼저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 가지 장면을 되짚어보자.
2015년 1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배석한 국무위원들을 돌아보고 있다. [동아DB]
“대면보고보다 그냥 전화 한 통으로 빨리 하는 것이 더 편리할 때가 있어요. 대면보고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그걸 늘려나가는 방향으로 하겠지만…. (뒤돌아 장관들을 바라보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이때 뒤에 배석한 장관 중에서 대통령과 직접 만나 정책에 대해 상의도 하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부터 의견도 듣고 때로 애로 사항을 하소연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서면으로 보고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장관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거나 자격미달자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장관이 대통령을 못 만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욱이 박 대통령의 대면보고 기피는 불충분한 정도를 넘어 거의 기이한 수준이었다. 근무지가 떨어져 있는 장관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는 수석비서관마저 회의 때나 대통령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수석은 근무 기간 내내 박 대통령과 독대 한 번 못 해보고 청와대를 떠나는 경우까지 있다고 보도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물론 박근혜 정부 임기 5년 내내 여권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이유
3·9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동아DB]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이유로는 두 가지를 상정해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나 성폭력 등 젠더 이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미미해서 굳이 이 문제를 담당할 부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다. 이때는 그냥 여가부를 폐지하면 된다. 둘째는 성차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기구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다. 이때는 담당부서를 확충하고 보완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 국민의힘이나 선거 캠프의 인사 대부분이 후보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는 점이다.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럴 때 사람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의견을 내놓으면서 토론을 통해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대선후보 혹은 대통령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만 집중한다.
어떤 취지로 한 얘긴지 명확히 알기 전에는 아무도 먼저 얘기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섣불리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가 나중에 앞서 나갔다고 면박을 당한 사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선후보 선거대책본부 관계자들은 언론의 질문에 “(성평등 이슈에 대해) 저희가 따로 공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예정하고 있다. (…) 그냥 한꺼번에 몰아서 하자, 그렇게 돼서 양해를 좀 구하는 것”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시간만 끌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한 인사는 없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오락가락했다. 선거 기간 중에는 첫째 경우인 것처럼 얘기를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라고 답변했고, 정책토론회에서는 “이제 여성가족부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여가부의 과제가 이미 다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때와 달라졌다. 여당이 여가부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제출한 가운데 정부와 대통령실은 여성가족부의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개편 방향 설명회에서 “성평등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여가부의) 기능이 더 강화된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 스스로도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여가부 폐지는 여성, 가족, 아동,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면서 왜 여가부 기능을 강화해야 하는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모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대통령의 말씀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그 말 자체가 왔다 갔다 해도 마찬가지다.
10월 11일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출근길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치밀한 검토 없이 내놓은 공약 지키려 이유를 갖다 붙인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은 구성원 사이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서 나와야 한다. 여가부 폐지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정부와 여당에서 나온 발언을 살펴보면 그런 과정이나 절차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대통령이 후보 시절 치밀한 검토 없이 내놓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그때그때 여론에 맞추어 이유를 갖다 붙인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한 사람만 바라보는 정치의 전형적 모습이다. 지금 온 국민을 짜증스럽게 하고 있는 ‘비속어 논란’도 똑같은 현상이다.이런 문제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대략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첫째는 정당이 정강정책이나 공약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고 널리 알리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는지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고 충분히 홍보가 되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진보, 보수 각각 튼튼한 싱크탱크를 만들어 장기적인 국정 운영 계획을 밝히는 일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정당들은 이런 기본 책무를 게을리했다. 지금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김종인 비대위원장 시절 정강정책을 대폭 고쳤지만 스스로도 별 관심이 없어서 선거 때 그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곤 했다. 아마 지금도 국회의원들 중에 자기 당의 정강정책을 상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여야 모두 연구기관을 두고 있지만, 여론조사를 분석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둘째는 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밟아가야 하는 표준적인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 헌법이 존재하는 한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경험과 능력을 쌓으면서 커리어 빌딩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좋은 이미지나 멋진 일화를 가진 신인을 발굴해서 끝없이 개인적 자질을 칭송해가며 대선주자로 키우고 국정을 맡기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해나갈 수 있는 시기는 훌쩍 지났다.
근본적으로는 개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87년 체제는 여러 면에서 시대를 따라가지 못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권력구조와 국정 거버넌스 시스템에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연속적으로 ‘정부의 실패’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면 구조적인 문제에 손을 대야 한다. 그런 고민이 없이 선거 때마다 ‘그래도 ○○○이 △△△보다는 낫다. 아니다, △△△가 더 낫다’라고 싸우는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비호감 선거’를 치러야 하고, 대통령의 무능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제는 진짜 변화를 추구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