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아닌 양육이 문제
아직 창창한데… “나가라”
돈 없는 노년은 궁색하다
2년 뒤 60세 이상 유권자가 40%
한국의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Gettyimage]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삼겹살을 바라보던 Y가 불쑥 물었다. 갑자기 웬 육아 상담인가 했다. 1991년생인 Y는 3년 사귄 여자 친구와 최근 진지하게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 예식 비용이나 살 집, 살림살이 같은 부분에는 전혀 이견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 문제를 놓고 아직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
“아이를 길러줄 사람은 있어?”라는 물음에 Y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가 함께 기르는 것 아닌가요?”
자신이 절반 이상 육아를 도울 거라고 약속하는데도 여자 친구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고 한다. 아이고, 이 순진한 친구야….
“너희 부모님이 아이를 맡아줄 수 없지?”
“네.”
Y의 부모님은 강원 원주시에 계신다.
“여자 친구 집도 그렇고?”
“네.”
여자 친구는 제주 출신이다.
“그러니까 문제지.”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양가 가운데 어느 한쪽 부모님이라도 육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를 낳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해. 네가 억대 연봉자쯤 돼서 여자 친구가 직장을 그만둬도 된다거나 육아 전담 가사 도우미를 둘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지.”
요즘 세태엔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다. 육아는 전쟁과 같다. 낳는 것까지야 생명을 맞이하는 10개월간의 행복한 기다림 정도로 부부가 알콩달콩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혼돈의 문이 열린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해보라.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 병원은 누가 데리고 갈 것인가. 혹시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밤새 병실은 누가 지킬 것이며, 다음 날 직장 업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집안 꼴은 뒤죽박죽 난리도 아니고, ‘내가 이 결혼을 왜 했지’ 하는 회의감까지 밀려온다. ‘신혼 우울증’이 이런 것이다.
어린이집에 맡기면 된다고? 요즘 웬만한 어린이집은 들어가려면 몇 개월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1년 이상 대기해야 하는 곳도 흔하다. 부부 가운데 한 명이 육아만 전담하면 모르겠지만 맞벌이인 경우 역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육아휴직을 하면 된다고? 눈치 보이는 일이다. 어린이집에 들어간다 해도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는 경우까지 챙겨주진 않는다. 어린이집은 쉬는데 부부는 회사에 나가야 하는 날은 또 어떻고. 그런 날엔 어디 맡길 곳도 없다. 부부의 직장 생활이 모두 꼬인다.
10월 4일 김문수 신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마친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옛날엔 들판에서 일하면서도 아이 서넛을 키웠는데, 요즘 부모들은 왜 그리 이기적이냐고? 웬 새마을운동 시절 이야기를 끌어오는가. 나중에 집 사고 노후에 편안하려면 젊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 계급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고. 어느 한쪽이 고액 연봉자가 아니라면 부부가 함께, 힘껏 벌어야 하는 게 현재 한국인의 ‘평균적’ 삶이 됐다.
물론 Y도 이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미 결혼한 친구나 선후배들이 겪는 고충을 옆에서 익히 지켜보았겠지. 하지만 본인이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게 그렇게 힘든가?’ 싶은 것이고, 특히 여성이 아니니 더욱 그러한 것이다. 뚜렷한 대책 없이 애를 낳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두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따라서 출산에 대한 여성의 공포는 남성보다 예닐곱 곱절은 높다. 출산의 고통에 대한 생리적 공포가 아니라 ‘그 뒤’에 잇따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불안과 공포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 됐다. ‘출산’이 아니라 ‘양육’ 대책이 없다. 양육 뒤에는 또 교육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아이가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 질 높은 교육을 받게 해줄 자신은 있는가? 그러니 요즘 젊은이들은 미래의 자식에게 원망을 사지 않으려고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거나 한없이 유예하는 것이다. 대책 없는 일은 애초에 벌이지 않는, 어쩌면 지극히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Y의 여자 친구처럼.
퇴직금 받아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대극 무대를 다른 곳으로 바꿔보자. Y를 만나고 며칠 뒤,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선배 K를 만났다. 청년들에게 취업 희망 기업을 물으면 과거에 늘 1위로 꼽히던 기업이다.5년 만의 만남이었다. ‘갑자기 왜 불쑥 연락하셨나’ 싶어 반갑게 달려갔는데, 그 자리에 가서야 얼마 전 선배가 희망퇴직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회사를 30년 다녔으면 많이 다녔지. 경력 가운데 10여 년을 부장으로 버텼으니 운도 좋은 거고.”
선배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말했지만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숨길 수 없었다.
5년 전 만남에서 선배는 털어놨다.
“요즘 들어오는 신입들 스펙을 보면 정말 놀랄 때가 많아. 우리 때 같았으면 혀를 내두를 능력과 자질을 갖췄지. 그런데 그런 애들이 더구나 사방에 깔렸어. 그 틈바구니에서 부장이랍시고 고액 연봉 받는 것이 늘 두렵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2년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만남에선 “5년을 버텼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선배는 84학번, 65년생, 올해 57세다. 정년까지는 아직 3년 남았다. 그런데 벌써 인생 1막을 마감하는 것이다. 물론 선배는 정년까지 남은 3년치 월급을 한꺼번에 받았다.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까지 챙겼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평생 했던 일이 사무실에서 문서 만들고 기업 내·외부 행사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선배는 소주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앞으로 3~4년은 그냥 놀려고. 그동안 가정에 너무 소홀했잖아. 아내랑 여행 다니고 운동도 하고, 아이들과도 좋은 시간 갖고. 그러면서 차차 다음 계획도 세워봐야지.”
사실 선배는 행운아다. 퇴직하고 3~4년을 그렇게 ‘그냥 놀’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될까. 정년보다 3년 일찍 퇴직했다고 안타깝게 바라볼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세상에 정년이 보장되는 회사는 또 얼마나 되던가. 누군가는 “버티면 된다”고 말하지만 버틴다고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 최고 대기업이 그러할진대 다른 기업은 말해 뭐 하랴. 정년까지 남은 급여를 한꺼번에 받고 나왔으니 그나마 ‘역시 대기업!’인 셈이다.
지난해 금융업계에서 대대적으로 희망퇴직을 받아들여 큰 화제를 모았다. 억대의 ‘전별금’까지 얹어주면서 희망퇴직자를 접수했는데, 커트라인이 대개 1973년생까지였다. 딱 필자의 나이 또래다. 이제 마흔아홉. 이런 나이에 벌써 ‘퇴직’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될 줄이야!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인생의 내리막길을 상징하는 단어와 마주하는 것이다. 수억 원 퇴직금을 받는 정규직은 차라리 낫지만 계약직은 어떤가. 퇴직과 동시에 막막한 삶의 절벽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으로 수억 원 퇴직금을 거머쥔 사람조차 “이걸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라면서 항변한다. 치킨집, 카페, 편의점 말고는 할 것이 없다. 한국의 또 다른 ‘평균적’ 삶의 풍경이다.
노인 되니 써주는 데가 없다
시대극 무대는 다시 이동한다. 이번에는 노년으로. 필자에게는 ‘멘토’라고 할 만한 어른이 4명 있다. 42년생, 46년생, 53년생, 55년생. 편의상 A, B, C, D라고 하자. 모두 남성이다. 42년생 A는 대학교수, 46년생 B는 기업가, 53년생 C는 일용직 근로자, 55년생 D는 직장인이었다. B는 대기업에서 사장까지 올랐다 퇴임했고, D는 상무 직급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났다.인생 1막을 마무리한 시점은 각자 달랐다. D는 55세에 퇴직했고, B는 65세에 회사 비상임 고문역까지 맡은 후 은퇴했다. C는 68세가 되자 더는 육체노동이 힘들다며 스스로 은퇴를 선언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령자인 A가 사외이사 등으로 일한다. 서류상으론 아직 현역이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점은 55세가 됐든 65세가 됐든 한 10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뒷방 노인’ 신세가 됐다. 과거 장관을 지낸 한 인사가 “60대가 되면 뇌세포가 죽어서 가능한 한 책임 있는 자리에 가지 않고 65세부터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60대는 가장 원숙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 아닐까. 50대 중반 또한 그렇다. 아직 팔팔하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의 원숙한 경험과 판단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배척하는 것은 사회공동체 전체로 봐서 적잖은 손실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다음으로 느낀 바는 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노년도 결국 ‘돈’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A와 B는 현직에 있을 때 모아둔 재산과 연금을 바탕으로 여전히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자녀들도 제법 안정된 사회적 위치에 있어 모든 것이 여유롭다. ‘저런 것이 노년의 이상적인 삶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중에 그들의 자녀도 똑같은 노년을 누리게 될 것이다.
C는 어떤가. 정부에서 받는 노인 기초연금 월 30만 원이 수입의 전부다. 자녀들도 자기 먹고살기 바쁘다. C에게는 단독주택이 하나 있는데, C는 “자식들이 그거 담보로 사업자금 대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사람 좋게 웃는다. 최근에는 정부에서 만든 일자리인 ‘산불감시 요원’에 뽑힌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면서 자랑한다. 막중한 국가적 임무라도 맡은 양 빨간 모자를 쓰고 출근한다. D는 귀향했다. ‘농사라도 지어보려고’ 생각했다는데, 평생 사무실에서 일한 사람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겠는가. “고향 마을로 돌아갔는데도 시골 텃세가 보통이 아냐”라며 오늘도 주절주절 불평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온다. 행복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순댓국에 소주 한 병 마실 수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돈이 없으면 노년의 삶도 궁색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난하고 우울한 노인의 나라
2021년 3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노인들이 모여 있다.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전체 인구 대비 노인 비중이 상승 추세다. 2025년엔 초고령사회 진입 예정이다. [뉴스1]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악 수준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81로 세계 평균(2.32)보다 현격히 낮다. 잠정 통계를 보면 올해엔 0.7 수준까지 떨어지고 있다. 이건 하락이 아니라 ‘추락’이다. 이런 것을 과연 ‘자연현상의 하나’라고 내버려 둘 일인가. 이렇게 급격한 인구 감소가 미래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역별로 보면 서울(0.63)과 부산(0.73)의 합계출산율이 유독 낮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도 유심히 살펴볼 대목이다.
작금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통계에서 종종 누락되는 대목이지만 한국은 자살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당 2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5명)의 곱절을 넘는다. 지난해에만 자살한 사람이 1만3352명. 하루 평균 36.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농담처럼 하는 ‘코로나19 방역보다 자살 예방에 국가적 에너지를 쏟는 편’이라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통계다.
노인 자살률에 이르면 통계는 더 우울해진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80세 이상 자살률은 무려 61.3명에 이른다. 뒤이어 70대(41.8명), 50대(30.1명), 60대(28.4명) 순으로 자살률이 높다. 이번엔 노인 빈곤율을 보자. 2020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38.9%에 이른다. 그나마 떨어진 수치다. 통계 이래 40%대 빈곤율을 기록해 한국은 세계에서 노인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2011년에는 노인 빈곤율이 46.5%까지 올라갔다가 재작년 처음으로 30%대로 떨어졌는데, “기초연금 제도의 성과가 드디어 나타나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반색할 정도였다. 그래봤자 OECD 평균(13.5%)보다 여전히 3배가량 높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데,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굶주리는 노인, 자살하는 노인의 국가가 됐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통계가 등장한다. 2025년이 되면, 그러니까 앞으로 딱 2년 후가 되면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 국민의 20%를 넘는다.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것이다. 선거로 따지면 유권자 가운데 40% 정도를 60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게 되는데, 여기가 가장 우울한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지점이다. 정치에서 특정 세대가 유권자의 40%를 차지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하게도, 그들이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말로는 “30대 장관이 나와야 한다” “40대 대통령이 등장할 차례”라느니 떠들썩하지만 실제 30~40대를 선발하는 정치적 권한은 전적으로 노인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는 30~40대가 선출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생리적 나이만 30~40대일 따름이지, 30~40대의 정치적 대변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60세 이상 노인이 자기 세대가 당면한 이익을 포기하고 ‘젊은이를 위한’ 나라를 만들어줄까? “보수정당 처지에선 노년층 유권자가 늘어나는 현상이 나쁠 것 없다”고 말하는 황당한 정치인도 있는데, 그 ‘노년층’ 대부분이 가난하고 회의적이고 분노로 가득하니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잠깐 반짝하고 몰락하는 나라
2020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실업급여과가 구직자들로 붐비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희망퇴직을 권하는 기업이 많아지는 등 고용불안이 커지고 있다. 이는 노인의 구직난을 더 심화시킨다. [뉴스1]
흔히 빚(부채)을 ‘미래 지불 능력을 미리 끌어 쓰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한국 서민경제 성장 역사는 ‘미래는 생각지도 않고 현재를 키워온’ 셈이다. 그 ‘현재’는 바로 자식들이었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을 ‘미래의 지불 능력’으로 여겨왔다. 아니,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로부터 보상 같은 것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헌신했을 따름이다. 어쨌든 그리해 그 ‘지불 능력’을 되받은 부모가 있고, 그렇지 못한 부모, 지불 능력을 마련한 부모, 둘 다 이룩한 부모가 있다. 그에 따라 지금 노년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부양받지 못하는 부모’가 된 사람들의 무능함이나 불운을 탓할 것인가. 사회가 책임질 영역이다. 유권자의 절반가량을 노인이 차지한 세상이 됐으니 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정치권은 노인 기초연금을 40만 원으로 올리는 간단한 문제 하나를 놓고도 갑론을박이다. 노동개혁이나 연금개혁, 교육개혁처럼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부분은 소수 정부인 윤석열 정부에서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이고, 이런 것이라도 빨리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는 맞아야 할 회초리’라면 말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최병천 씨가 최근 펴낸 ‘좋은 불평등’은 그간 민주당의 경제정책이나 현실에 대한 관점을 일견 반성적으로 되돌아본 책이다. 내용 가운데 하나가 역시 ‘노인 문제’다. 최씨는 가난한 노인에 관한 문제가 당분간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로 정치판을 뒤흔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우회하며 썼을까 싶지만 이런 문제만 등장하면 밑도 끝도 없이 “포퓰리즘 척결!”만 외치는 이른바 ‘보수 진영’에 비하면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진단 하나는 정확한 셈이다. 보수는 진보를 이기기 힘들 것이다.
덧붙이자. 출산과 양육 문제도 그렇고, 노인 빈곤 문제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을 해결하는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는 ‘노동개혁’이다.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리고 노동개혁은 세대-계층 간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얽혀 있기 때문에 고도의 정치력과 통합 능력, 설득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끈다고 해도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분야다. 이 또한 삼척동자라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념의 저 극단에 있던 김문수를 타협을 주도할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장으로 세워놓았으니 윤석열 정부가 정말 노동개혁을 할 생각은 있는 건지, 아니면 지레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것인지, 쓴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한국은 성장의 정점에서 잠깐 샴페인을 터뜨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저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만 같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노인에 압도되는’ 나라. 한때 ‘일본 침몰’을 비웃었으나 이 대로라면 이제 한국이 침몰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