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44일 만에 사임을 발표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AP 뉴시스]
트러스 총리가 사임하게 된 결정적 이유론 부자 감세, 국채 무제한 매입 등 ‘경제 정책 실패’가 꼽힌다. 트러스 총리는 세금을 줄여주면 투자로 이어져 경제 전반이 성장한다는 ‘낙수이론’을 신봉했다. 9월 23일 사전 교감이나 재정 전망 없이 450억 파운드(약 72조 원) 규모 감세안이 포함된 미니 예산안을 발표했다.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45%→40%),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20→19%), 법인세율 인상 계획 철회, 주택 구매 세금 인하 등이 골자다.
세계 시장의 긴축 흐름에 역행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거셌다. 영국도 중앙은행(BOE)이 지난해 12월 0.15%포인트 인상(0.1%→0.25%)을 시작으로 올해 9월 22일 2.25%포인트까지 꾸준히 기준금리를 인상해왔다. 미니 예산안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파운드화 가치와 영국 국채 가격이 폭락했다. 국채에 레버리지 투자를 한 영국 연기금의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및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험이 높아졌다.
9월 27일 국제통화기금(IMF)은 “고소득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감세가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며 영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 현 시점에서 크고 목표 없는 재정 패키지를 권장하지 않는다”며 경고를 날렸다. 다음날 BOE는 금융 시장 혼란에 대한 대책으로 ‘무제한 국채 매입’이라는 ‘양적 완화’ 수단을 꺼내며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치솟는 물가는 생활고를 유발했다. 10월 1일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영국 전역 50개 도시에서 생활고에 대한 해결책을 촉구하는 동시다발적 시위가 열렸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에 따르면 9월 28일~29일 기준 노동당 지지율은 54%로 21%를 기록한 보수당에 33%나 앞섰다.
여론 악화에 10월 3일 트러스 총리는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앞세워 감세안을 전면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1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JP 모건은 보고서를 통해 트러스 총리의 대규모 감세 정책이 촉발한 국채 금리 급등으로 영국 연기금의 손실이 최대 1500억 파운드(약 242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14일 트러스 총리는 시장 혼란의 책임을 물어 콰텡 장관을 경질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입지는 계속 불안했다. 콰텡 장관의 후임으로 취임한 제러미 헌트 장관은 트러스 총리의 경제정책을 대부분 폐기했다. 19일엔 수엘라 브레이버먼 영국 내무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압박했고, 결국 다음날 트러스 총리는 사임을 선택했다. 사임 발표 직후 시장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1%포인트 가량 하락했고, 파운드화 가치는 0.5% 오른 1.12달러 대를 기록했다.
트러스 총리는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직전 기록은 19세기 초반 취임 119일 만에 사망한 조지 캐닝 총리다. 트러스 총리는 1996년부터 보수당에서 활동했다. 2010년 총선에서 사우스 웨스트 노포크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며 의회에 입문했다. 이후 당내 여러 보직을 거쳐 2014년 환경장관으로 임명됐고, 2년 뒤 법무장관이 됐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취임한 후론 국제통상장관, 여성·평등장관을 거쳐 지난해 9월 외무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1년 만에 총리가 됐다.
영국 최초 40대 여성 총리로 ‘제2의 마가렛 대처’가 될지 눈길을 끌었다. 트러스 총리 역시 그를 롤 모델로 해 복장과 포즈를 따라하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 전 총리는 11년 208일 간 재임한 바 있다. 트러스 총리의 후임으론 존슨 전 총리, 헌트 장관과 수낵 전 재무장관, 벤 월리스 국방장관,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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