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엄마 얼굴 떠오르는 뭉클하고 푸근한 시래기 된장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10-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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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래기를 넣어 구수하게 끓인 된장국. [Gettyimage]

    시래기를 넣어 구수하게 끓인 된장국. [Gettyimage]

    지난주부터 점심 약속이 줄을 잇고 있다. 일 때문에 만나는 이도 있고, 오랜만에 자리를 마련한 친구들도 있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의 회사 근처, 아무개의 집 근처를 기준으로 식당을 정해 모였다면 지금은 아니다. 미쉐린가이드에 오른 파인다이닝, 뉴욕과 도쿄에 이어 서울에 세 번째 지점을 연 브런치카페, 어느 셰프가 새롭게 선보이는 비건 레스토랑, 간판도 없이 숨어 있는 비밀의 맛집, 리큐어와 디저트의 마리아주를 제안하는 디저트 가게, 예약자만 들어갈 수 있는 전망 좋은 카페 등이 약속 장소의 물망에 오른다.

    단체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추천 장소를 공유하고 정한 다음 빠르면 2~3주, 늦어도 한 주 전에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예약을 완료해야 한다. 이렇게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문턱조차 넘을 수 없는 식당이 대부분이다. 그 덕분에 점심때마다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보며 까르르 물개 박수를 치고, 사진을 부지런히 남기며, 음식에 대해 조목조목 의견을 나누어 경험치를 더하는 중이다. 나는 폭죽이 터지듯 신나는 시간이 끝나면 이상하게도 기운이 쏙 빠져 한낱 쭉정이가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이 자극적이고 즐거운 만큼 그에 반응하는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식사 시간 내내 긴장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나는 그만한 피로가 함께 쌓이는 게 확실하다.

    시래기와 된장의 만남

    시래기는 무청을 데쳐 바람에 말린 것이다. 다양한 음식에 쓰인다. [Gettyimage]

    시래기는 무청을 데쳐 바람에 말린 것이다. 다양한 음식에 쓰인다. [Gettyimage]

    이럴 때면 고집스럽도록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여 먹거나 갓 지은 쌀밥에 바삭하게 구운 돌김이나 젓갈 찔끔 얹어 한 그릇 뚝딱 비우는 거로 피로회복제를 대신한다. 물론 요즘처럼 바람이 차가워질 때는 그 냄새만으로도 따스함과 구수함이 밀려오는 시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된장에 주물렀다가 자박하게 끓여 만드는 시래기찌개를 먹어 왔다. 누구에게나 엄마 얼굴이 절로 떠오르는 뭉클하고 푸근한 음식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된장 그중에도 시래기 된장이다.

    시래기라고 하면 가을 무김치 담글 때 따로 떼어 둔 무청을 데쳐서 바람에 말린 것을 말한다. 집에서는 소소하게 열무나 총각무로 김치를 담글 때 억센 줄기를 따로 떼어 시래기로 만들어두기도 한다. 무엇이든 시간을 들여 해와 바람에 말리면 본래의 맛과 다른 방향으로 깊어지고, 영양도 깃들며, 식감과 색이 달라지고, 향도 바뀐다. 대체로 더 맛있어진다. 그중에도 무청과 시래기 풍미의 간격은 특별히 넓다. 풋풋하고 아삭하던 초록의 무청이 누렇게 되고 버석하게 마르면서 산뜻함과 색이 퇴색되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것 같은 마른 잎 즉, 시래기가 된다. 이걸 다시 물에 불려 삶아 요리하면 웬만한 조미료나 맛가루, 향신료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풍미가 나온다.

    아련한 흙내음, 오래 묵은 장에서 날법한 콤콤함, 고기 같은 구수함, 마른 채소 특유의 익은 내가 두루뭉술하게 어울려 난다. 이러니 시래기에 된장만 넣고 주물러 푹 끓이기만 해도 꿀맛이 날 수밖에 없다. 고추, 마늘, 파라도 다져 넣으면 칼칼한 맛이 보태져 한층 입맛을 돋우고, 마른 멸치를 한 줌 더하면 감칠맛이 진해진다. 양념한 시래기에 무와 소고기를 조금 넣고 물을 넉넉히 넣고 푹 끓이면 밥 한 덩이 풍덩 말아 국물까지 몽땅 먹게 되는 장국을 만들 수 있다. 삶은 시래기에 집된장을 넣고 꼼꼼히 주물러 한 끼 먹을 만큼씩 나눠 냉동실에 넣어두면 가을 겨우내 어지간한 밀키트를 대신할 수 있다.



    무심함 뒤 백 가지 여유

    시래기와 어울리는 게 된장뿐일까. 무심함을 가장한 시래기는 백 가지 재료와 만나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고등어나 꽁치를 가지고 찌개를 끓일 때 김치와 함께 시래기를 듬뿍 넣고 조림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김치 빼고 시래기만 바글바글 끓여도 충분히 맛있다. 기름진 생선 대신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찜 만들 듯 시래기찜을 해도 좋다. 감자탕에 우거지 대신 넣으면 한결 구수한 풍미를 더해주고, 매콤한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이는 닭볶음탕과도 잘 어울린다. 콩가루를 묻혀 살짝 찐 다음 액젓으로 간을 맞춰 먹거나, 간장양념과 함께 프라이팬에 빠르게 볶아 내면 따뜻한 찬거리가 된다. 물론 식어도 맛있다. 마지막으로 햅쌀 나는 요즘에는 삶은 시래기의 물기를 꽉 짠 다음 먹기 좋게 썰어 밥 지을 때 듬뿍 올려 먹어야 한다. 갓 지은 한 그릇 밥만으로도 식탁에 맛좋은 가을을 초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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