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쭉 자랐다. 부모님은 나와 달리 경상북도 태생이라 우리 가족의 여행은 대체로 고향을 향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 지역 문화와 언어에 당연히 익숙하다. 그런데 내 코가 도대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서울 한복판에서 경상도 사나이를 만나 남편으로 삼았다. 살면서 웬만한 경북 음식은 먹어봤다고 생각했지만 영덕이 고향인 시어머님 덕에 내가 그려가고 있던 맛의 지도가 몇 뼘이나 넓어지는 중이다. 동해의 남자였던 아버지가 채 가르쳐주지 못하고 떠난 바다의 맛들을 하나씩 더 배워간다.
막장을 문질러 쌈 싸먹고, 물미역에 둘둘 말아도 먹고
두툼하게 썰어 낸 활어회. [Gettyimage]
어머님을 따라 영덕의 작고 작은 항구 앞에 있는 식당에 간 건 7년 전쯤이다. 그곳에서 여태 가장 맛있는 잡어회라고 손꼽는 활어회를 만났다. 젓가락질할 때부터 회를 먹긴 했지만 두툼하게 썰어 내는 활어회나 뼈째 손질된 세꼬시를 만나면 깨작거리기 일쑤다. 잘 숙성한 선어가 아니라면 나풀거리도록 얇고, 보드라운 회만 골라 먹는 반쪽짜리 손님인 셈이다. 당연히 뭐가 씹힐지 모르는 잡어회는 염두에 두는 메뉴가 아니었다.
어머님을 따라 들어간 낮고 작은 어촌 집 방바닥에 앉아 상이 들어오기를 어색하게 기다렸다. 이름도 성도 생김새도 모르는 물고기들이 어머님 친구분 손에 잔뜩 잡혀 와 먹기 좋게 손질돼 차려졌다. 희고 깨끗한 접시에 마치 잡채처럼 막 썰어 낸 회가 수북이 쌓였다. 젓가락으로 소심하게 집어 초장에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려보았다. 두어 번 씹었을까, 빛보다 빠르게 아버지 얼굴이 마음에 떠올랐다. 부들부들한 살은 찰지고, 뼈가 씹히는 부분은 고소해 맛좋은 이 회 한 접시를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당장 나누고 싶었다.
한 젓가락 삼키고 나자 나는 상 앞으로 몸을 당겨 두고 부지런히 회를 먹었다. 한 뭉치 집어 고추냉이 푼 간장에도 찍어보았지만 이 집 잡어회는 이 집 주인이 만든 초장을 묻혀야 제격인 걸 금세 알았다. 몇 입 가득 먹고 나면 가늘게 썬 양배추, 상추, 깻잎을 사발에 그득 담고, 2리터짜리 병에 든 참기름을 넉넉히 끼얹은 다음 초장과 회를 넣고 무치듯 섞어 먹는다. 무침회에 마늘 편이나 송송 썬 고추를 얹은 다음 거뭇한 막장을 문질러 쌈을 싸 먹고, 물미역에 둘둘 말아 바다 향을 더해서도 맛본다. 마지막에는 뭐니 뭐니해도 갓 지은 뜨거운 밥을 무침 회 위에 두어 술 얹고 참기름 찔끔 더해 대강 섞어 먹어야 한다. 밥이 들어가면서부터는 반찬에 손이 가기 바쁘다. 꽁치젓으로 담가 수년을 묵힌 매콤한 묵은지, 양미리만큼 큼직하지만 깡 말라서 씹는 맛이 구수하게 우러나는 곰치 새끼 조림 같은 맛깔스러운 반찬을 먹느라 목이 짠 것도 모른다. 와중에 무를 손바닥만하게 썰어 넣고 끓인 매운탕이 나와 막바지 식욕에 박차를 가한다. 혹시라도 운전대를 잡지 않는 이라면 소주 한 잔이라는 결정타를 잊지 말길 바란다.
꽃다발 같은 음식
수산시장에서 물고기가 팔딱거리고 있다. [Gettyimage]
어떤 생선은 기름 맛으로 먹고, 어떤 생선은 씹는 맛을 즐기고, 어떤 생선은 그저 귀한 맛으로도 사랑받는다. 잡어의 ‘잡(雜)’자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는 것을 뜻하니 알록달록한 과일바구니나 화려한 꽃다발 같은 음식과 다름없다. 잡어라고 하면 가자미 종류, 우럭 종류, 횟대 종류를 비롯해 쥐치, 숭어, 농어, 학꽁치, 쏨뱅이, 줄돔, 성대, 삼세기 등으로 너무나 다양하고,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이 또 바뀌어 무척이나 헷갈린다. 하나하나 알 수는 없지만 여럿이 어우러지며 몇 배나 수북한 맛과 푸짐함을 선사하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잡어회는 자연산 활어로 채워져 싱싱하고 깔끔하며 잡어 전문식당에 가면 토속적인 밑반찬이나 장류가 함께 나오기 일쑤다. 덤이라고 하기엔 아주 큰 기쁨이다. 식당이 아니라도 수산시장 어귀에서 인심 좋은 상인에게 잡어 한 대야를 살 때면 멍게나 개불 같은 해물을 이것저것 두둑하게 끼워주는 것도 일상이다. 겨울 길목에 들어서는 지금이야말로 바다를 한아름 끌어 담아 맛보기 좋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