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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오만한 ‘경호실 권력’과 정치군인들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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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차지철 대위가 더 깊은 인연으로 연결된 것은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특수전 교육에 차출되면서다. 당시 정규 육사 출신으로는 전두환(11기), 장기오(12기), 최세창(13기) 등 3명이 차출됐고, 일반 장교 출신으로는 태권도(5단), 합기도(5단), 검도(3단)가 도합 13단인 차지철 대위가 차출돼 미국 특수전 교육(레인저 코스)에 함께 참가한다. ‘죽음의 지옥훈련’으로 알려진 이 교육을 같이 받은 전우는 생사고락 속에서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되는데, 전두환과 차지철은 이때 깊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이다.   

공수단에서 끈끈한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1961년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다. 차지철은 5·16혁명 한 달 전 친분이 깊던 박종규와 함께 명동의 한 다방에서 박정희 소장을 만난 후 5·16군사혁명에 가담해 최고회의 의장 경호단장이던 박종규 소령과 같이 근무했다. 당시 전두환은 최고회의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둘은 다시 인연을 맺는다. 민정 이양 당시 전두환 대위는 군으로 복귀한 후 1973년 1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해 제1공수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차지철 대위는 정치인이 돼 4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4년 경호실장이 됐다.

1974년 경호실장에 임명된 차지철은 경호업무는 대통령의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정권 유지’ 책임도 져야 한다며 경호실을 확대 개편했다. 특히 경호업무는 군 출신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군 출신을 대거 영입해 군단 규모로 경호실을 보강했는데, 경호차장에 육군 소장, 작전차장보에 준장급 장성을 앉혔다. 차지철은 군부 내에 자신의 지지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육사 11기들을 작전차장보에 보직하기로 하고, 전두환 공수여단장을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앉힌 후 그 후임으로 노태우·김복동 장군을 연이어 보직했다. 이로써 차지철과 전두환은 세 번째로 직속상관과 부하 관계가 된다.



차지철의 대권 욕망

당시 주요 정보파트 인사들은 차지철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5·16군사혁명에 참여한 경험에 비춰 자신도 군부의 지원만 받으면 혁명이 가능하다는 대권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경호실 차장으로 정병주·문홍구·전성각·이재전 소장 등 우수한 장성들을 기용해 육군 중장으로 승진시킨 후 요직에 앉혔고, 작전차장보로 이광로·전두환·노태우·김복동 준장 등 육사 출신 장군을 기용해 승진시켜 요직에 진출케 한 것은 군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차지철은 든든한 군부 인맥을 갖추고 김재규 중정부장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위에 언급한 8명의 장성은 차지철 스스로 ‘부통령’ 또는 ‘부각하’가 된 것 같은 영웅심을 갖게 했다. 특히 차지철이 군부에서 가장 신뢰한 인물은 육사 11기 전두환과 노태우 두 장군이었다.

이들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면서 차지철에게 맹종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육사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킨 행위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차지철의 그릇된 영웅심리를 키워 자만심에 빠지게 했고, 결국 차지철이 김재규를 넘어서려다가 10·26사건을 유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말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상자기사 참조).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던 전두환은 1978년 1월 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필자는 같은 6군단 내 사단인 30사단 보안부대 운영과장을 맡아 30사단장과 인접 보안부대 동료들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당시 30사단장은 군단장 회의에 다녀오면 필자를 불러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군단장 황영시 장군과 1사단장 전두환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필자는 그의 말이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주된 내용은 “황영시는 군단장 자격이 없고, 전두환은 군단장보다 상위 장군으로 행세하니 군기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한 예로 군단장이 회식을 준비했는데, 전두환을 제외한 군단 내 모든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도착할 때까지 1시간가량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 군단장이 입구로 달려가 ‘모시고’ 들어왔다. 회식도 그때서야 시작됐다. 이로 인해 다른 사단장 모두가 군단장을 존경하지 않게 됐고, 군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이 정보를 사령부에 보고했다.



대대장 월북사건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1976년 12월 4일 국회 답변 도중 중앙정보부장 ‘영전’ 이 발표되자 여야 의원들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축하하고 있다.

사단장 보직은 통상 2년이 기본 연한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사단장 보직 1년 2개월 만인 1979년 보통 군단장급인 육군 중장이 보직을 맡는 보안사령관에 전격 등용됐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등용에는 큰 사건이 배경이 됐다.

1977년 10월 중부전선 ○○지역 보병 제20사단에서 GOP 철책선 방어업무를 맡은 ○○연대 2대대장 유모 중령이 사단 내 대대급 전술 평가에서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제20사단 보안부대는 유 중령이 담당하던 방책선에 구멍이 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주일 정도 내사했으나 사실 규명이 어려웠다. 보안부대장은 사단장에게 “유 중령 근무 지역 방책선에 구멍이 난 사건이 일어났으니 대대장을 즉시 교체하고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대대장에 대한 인사조치 없이 즉시 사단 참모 2명에게 “현장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단 조사관들이 야간에 62연대에 도착해 “현장 조사를 하자”고 하자 62연대장은 “날이 밝으면 조사를 하자”며 조사관을 사단으로 돌려보내고 유 대대장에게도 날이 밝으면 현장 조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유 대대장은 20사단 보안부대의 내사에 압박을 받아오던 중, 사단에서 현장 조사가 나온다는 통보를 받자 처벌이 두려워 월북을 결심했다. 날이 밝자 대대장 지프에 통신병을 태우고 북방 한계선 가까이 가서는 운전병과 통신병에게 같이 월북할 것을 강요했고, 운전병이 이를 거절하자 다리에 총을 쏴 운전을 못하도록 하고는 통신병과 함께 월북했다.

즉각 상황을 보고받은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1차로 청와대에 “전방 20사단에서 대대장 유○○ 중령과 통신병이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북괴에 납치된 것 같다”고 상황보고를 했다. 그가 ‘허위보고’를 한 것은 북한에 대한 대응책과 우리 군의 사기를 고려해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관계기관과 협의한 후 사건 전말을 보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1976년 12월 4일 국회 답변 도중 중앙정보부장 ‘영전’ 이 발표되자 여야 의원들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축하하고 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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