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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흑역사

‘차별과 배제 넘어 헌법 가치 파괴’

쁠랙크리스트에서 화이트리스트까지

  • 김당 | ‘시크릿파일 국정원’ 저자 dangkim@empas.com

‘차별과 배제 넘어 헌법 가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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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양의 폭로

윤석양이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4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의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 파악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 자료에 따르면, 보안사는 대상자를 A, B, C, D 네 등급으로 나누어 동향을 파악했으며, 사찰 활동을 통해 얻은 동향 첩보를 컴퓨터에 기록했다. 개인신상카드에는 인적사항, 가족사항, 해외여행 관계, 교우 및 배후 인물 등 9개 항목으로 나뉘어 기록돼 있었으며, 자택의 담장 높이, 비상 탈출구,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도 들어 있었다. 사찰 대상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의 정치인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 종교계 인사까지 포함돼 있었다.

윤석양은 당시 보안사가 ‘현실문화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현실초점’이라는 계간지를 냈으며, 이는 기자 신분을 가장하면 취재원인 동향 파악 대상자에게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실제 ‘현실문화사’라는 잡지사 편집장은 보안사 군무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윤 이병은 이 밖에도 “보안사가 정보 수집을 위해 경영하고 있는 위장 술집이 신림동 어디에 있다”고 밝혔는데, 한 언론이 이를 추적한 끝에 보안사 요원(장교는 지배인, 사병은 웨이터로 근무)이 운영하는 위장 카페 ‘모비딕’을 찾아내기도 했다.

군과 관련된 첩보 수집 및 수사로 직무가 제한돼 있는 보안사가 민간인 사찰을 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은어로 ‘대(對)전복’, 즉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한 군에 대한 ‘동향 관찰’이 ‘체제 전복’ 혐의가 있는 민간으로까지 스멀스멀 확대된 것이다. 국가기관의 불법행위가 장기간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군 정보기관이라는 조직의 특성과 끼리끼리라는 패거리 의식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보안사령관은 물론, 국방장관까지 옷을 벗었다. 보안사령관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은 보안사를 기무사로 바꾸고 조직을 개편해야 했다. 사법부도 민간인 사찰을 불법행위로 판결했다. 사건 발생 8년이 지난 1998년 7월 대법원은 보안사의 사찰대상자였던 한승헌 감사원장과 노무현 의원,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 등 14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보안사가 군과 무관한 정치인·교수·종교인·언론인을 부당한 방법으로 사찰한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라며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해, “국가는 한 감사원장 등에게 각 200만 원씩, 모두 2억9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박정희·전두환, 노동계 블랙리스트

이로써 과거 정보기관의 정치사찰 행위가 특정 인물의 사생활을 침해했음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보안사의 사찰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는 점에서, 사법부 판결은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단죄였다. 정치적으로는 군의 정권 사병화(私兵化)에 대한 경종이었다. 특히 ‘체제 전복’ 혐의로 사찰을 받은 재야 변호사 3인이 나중에 감사원장과, 서울시장 그리고 국군을 통수(統帥)하는 대통령에 오른 사실은 보안사가 어두운 골방에서 얼마나 허접한 짓을 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의 후계자들이 승계한 또 다른 공안통치의 자산은 ‘노동계 블랙리스트’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사위)에 따르더라도, 과거 독재-권위주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가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 분야는 노동계였다. 중정과 안기부는 ‘불순 노동운동에 대한 외부세력 차단’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 노동부, 경찰 등과 상호 정보교류 속에서 ‘블랙리스트’를 활용해 해당 근로자의 동향을 감시하고 노조 조직의 와해공작을 전개했다. 국정원이 보존한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로 실체가 드러난 대표적 노동 탄압이 동일방직 사건과 도시산업선교회 사건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어용노조를 탈바꿈시키는 소위 ‘민주노조 운동’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등의 노조가 대표적이다. 노동자 1400명의 동일방직 노조는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주길자)이 당선될 때부터 중정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는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위원장들뿐 아니라 대기업 지부장까지도 중정의 낙점이 없으면 직책을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정은 1975년 두 번째 여성 지부장(이영숙) 체제가 들어서자 적극 개입했다. 농성 중인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 시위’까지 벌이며 경찰에 저항했으나 중정의 공작으로 매수된 반대파 남성들이 ‘똥물 투척’을 하며 공격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끝내 중정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24명의 해고자를 낳고 와해됐다.



도시산업선교회와 불순세력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이후 해고자 124명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당시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 명의로 각 사업장에 배포한 것이 바로 노동계 블랙리스트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노조 활동으로 해고되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업데이트된 다양한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1986년 8월 인천 경동산업 파업농성 중에 발견된 블랙리스트에는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을 포함해 1662명의 명단과 업체, 성명, 본적, 주소, 주민번호, 최종학력, 활동사항, 근속기간 등이 기재돼 있다. 위장취업자는 A-B-C급으로 분류돼 있다. A급은 사업장 접근 철저 차단과 즉각 해고, B급은 사전에 취업을 제한(자영업 유도)하되 위장취업 시 보직 변경 및 순화하도록 했다.

중정과 안기부는 민주노조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노동자를 ‘도산(도시산업선교회)과 연계해 산업평화를 저해하는 불순세력’으로 규정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이들을 노동현장에서 격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감시했다. 특히 안기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유관기관에 블랙리스트 관리지침을 제시하고 블랙리스트 적용 범위와 대상을 수시로 조정했다. 블랙리스트 작성은 대체로 개별 기업의 제보에 의해 기업-노동부-정보기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작성되어 각 사업장 및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실-정보기관 등에 비치되어 활용되었다.

안기부는 블랙리스트 작성 및 취업 배제가 헌법과 노동법을 침해하는 위법 행위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안기부의 ‘해고도산노동자 최근 실태 및 관리방안 검토’(1984. 1. 10)에 보면, 당시 종교계의 블랙리스트 철폐 요구에 대해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홍보할 것을 중앙노동대책실무회의(노동부, 문교부, 치안본부, 보안사 및 당부)에서 ‘조정’한 내용이 이렇게 담겨 있다.

‘노동부가 종교지도자, 교계신문, TV 등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것을 홍보하고 해명할 것, 125명의 중점 관리대상자에 대해 재분류, 대상자 축소, 원직 복직은 불허하나 일정한 재취업 허용 등의 관리방안을 완화할 것, 사업장 내 도산 활동을 허용하지 않고 강력 규제할 것, 취업알선을 통해 재취업한 자들이 문제 활동 시 지역노동대책회의를 통해 처리방안을 강구할 것.’



박철언이 이끈 종교대책반

안기부의 ‘도산 관련 해고자’ 681명에 대한 관리와 재심사 등은 1982~1984년 사이에 집중돼 있다. 이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1982년 3월 18일) 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개인적 관심사와도 연관돼 있다. 검찰이 방화범 문부식의 배후인 김현장을 검거하면서 김씨를 보호해준 최기식 신부를 구속하자 종교계가 강력 반발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직접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성명을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장으로 규정하고 종교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 후 1982년 5월 10일 전 대통령은 반체제 종교문제를 정무1수석실에서 관장하되 별도의 ‘종교대책반’을 구성해 종합적-체계적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통상적인 학원 및 종교대책은 교육문화수석실 소관이었다.

이에 따라 공안검사 출신 박철언 비서관이 교육문화수석실, 문공부, 안기부의 실무 지원을 받아 종교대책반을 맡았다. 당시 전두환은 박철언에게 자신이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8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의 실태를 파악·보고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당시 자신의 보고를 토대로 박 대통령이 지시해 검찰이 도산을 조사했으나 이론 무장이 제대로 안 돼 실체 파악을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대통령으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이어 “이제야 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박철언을 격려했다.

1982년 당시에는 KBS, MBC, 경향신문 등에서 도시산업선교회의 실체를 알리기 위한 특집 보도가 줄을 지었다. 당시 특집방송과 기획기사에 의하면, 사회 전복을 목표로 하는 도산의 극한투쟁은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도산이 침투한 기업은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와 파업으로 어김없이 부도가 나거나 폐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박철언은 회고록에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안기부가 관리한 ‘도산 관련 해고자’ 블랙리스트와 안기부 보도지침에 따라 기획된 관제 언론의 도산 특집보도는 청와대 종교대책반 활동의 산물로 추정된다. 물론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파악해 보고했던 ‘도산의 실체’에 대한 개인적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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