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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종가(宗家)는 양반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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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만사 모든 것이 상속으로 결정되는가. 그렇게 단정할 순 없지만, 상속제도가 초대형 역사적 사건의 숨은 배경이 된 적은 많았다. 상속제도는 인간 사회가 선택한 집단적 생존전략이고, 그에 따라 한 사회의 운명이 결정될 때가 많았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운동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현대 독일의 중소기업도 상속제도와 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동일한 상속제도라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사회 전반에 미치는 결과는 전혀 달랐다. 가령 과거 한국과 중국은 모두 부계 혈연집단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렇다 해도 두 나라에서 종족집단이 작동하는 방식은 상당히 달랐다.

왜 그랬을까. 풍토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그들의 처지에 적합한 생존전략을 세우며, 그 전략을 운용하는 과정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야말로 한 사회의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장자상속제의 반작용

유럽 중세사에 등장하는 십자군운동은 장자상속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많은 역사가가 지적하듯, 게르만 문화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럽 사회엔 장자상속제가 널리 퍼졌다. 장자가 가문의 지위와 재산을 독점하는 것인데,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상속에서 소외된 유럽 귀족층의 대다수 자제, 즉 차남 이하는 존재의 위기를 맞았다. 그들은 불만 세력으로 자라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 서로 영지를 차지하려 각지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교황 우르바노 2세(재임 1088~1099)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한 듯하다.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 교황청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고 싶어 한 그는, 불만 세력을 동원할 궁리를 했다. 만약 동방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면, 자신의 교황권이 막강해질 것이었다. 야심가인 그는 성지 예루살렘 회복을 명분으로 대규모 원정사업을 일으켰다.



출세의 기회를 노리던 유럽 기사들은 십자군운동을 환영했다. 상속에서 배제된 평민 가정의 차남과 삼남들도 병사로 원정대에 합류했다. 1096년 시작된 십자군운동은 200년가량 이어졌다.

그러나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슬람 세력의 저항은 완강했고, 그에 맞선 유럽 기사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교황청이 입은 타격은 컸다. 세속 사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지배력이 약화됐다. 기사들의 위신과 명예도 손상돼 유럽 중세 사회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반면 방어에 성공한 이슬람 세계는 번영을 누렸다. 그들은 ‘성전(聖戰)’, 곧 지하드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불태우며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다. 칼리프가 지배하는 이슬람 세계는 국제 교역의 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런 현상은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대항해 시대가 열릴 때까지 계속됐다.

십자군운동을 통해 이슬람과 유럽의 문화교류가 이뤄지기도 했다. 황금과 향신료를 비롯한 동방의 진귀한 물품이 유럽 세계로 대량 유입됐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 보존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와 함께 이슬람의 수학, 천문학, 화학, 의학도 유럽에 전해졌다. 이는 결국 유럽 근대문명의 초석이 됐다.

십자군운동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에 장자상속제로 인한 유럽 내부의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 독일기업과의 관계

오랫동안 균분상속제가 실시된 곳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독일 서남부 슈바벤 지방이 필자의 관심을 끈다. 그 지역은 재산이 자녀들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상속제도로 인해 빈곤의 굴레에 빠졌다. 대다수 농가는 자급자족조차 어려운 상태가 됐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득을 높이려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도시로 이주해 임금노동자로 살기를 거부했다. 19세기 독일 법률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만 선거권 및 참정권을 주었다. 슈바벤의 영세 농민들은 끝까지 토지를 지키는 게 시민의 권리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중시했다. 그들은 소농에 불과했으나, 누구보다 근면했고 지식과 기술의 연마에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이델베르크대를 비롯해 튀빙겐대와 프라이부르크대 등 독일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이 슈바벤에 위치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슈바벤에선 시골 사람들의 문자 해독 능력이 웬만한 도시를 능가했다.

바로 그곳에서 독일의 전형적인 기업이 등장했다. ‘미텔슈탄트(Mittelstand)’라 하는 중소기업이 그것이다. 그들은 독자적인 상품을 개발해 영국식 대기업이 놓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오늘날 수천을 헤아리는 슈바벤의 중소기업은 세계 굴지의 지위를 자랑한다. 고용 면에서도 대기업을 앞지른다.

슈바벤의 중소기업 중엔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보쉬(Bosch)와 메르세데스 벤츠가 대표적이다. 특히 보쉬는 1886년 슈바벤의 중심지 슈투트가르트에서 직원 2명의 기계공작소로 출발했다. 현재는 30만 명의 노동자와 함께하는 세계적 기업이 됐다. 요컨대, 균분제도로 인해 슈바벤의 경제는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도적 단점을 과감히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기업 못잖은 청나라 ‘종중’

서양의 유대인도 그러했지만, 고대 중국인은 장자 중심의 부계 혈연조직을 강화했다.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면 끝도 없다. 이 글에선 청나라 시대에 국한해 상속제도의 몇 가지 특징을 간단히 소개한다.

중국의 상속제도는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시험은 신분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신분 상승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 준비기간이 수십 년이나 요구됐기에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중국의 많은 종족은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결과적으로, 과거 합격의 영광은 당사자뿐 아니라 종족 전체의 공유물이 됐다.

청나라에선 성인 남성의 2%가 신사(紳士)였다. 한국으로 말하면 그들이 양반이었다. 청나라의 과거 합격자는 대체로 상위 10% 이내에 속한 종족집단에서 배출됐다. 그 밖의 절대 다수 종족집단은 희망을 아예 내려놓을 수 없어서 패배가 예정된 경쟁에 뛰어들었다.

16세기 이후 중국의 신사들은 많은 특권을 향유했다. 신사의 대다수는 퇴직관리로 대지주 가문에 속했다. 초시(初試) 이상 과거시험 합격자들도 신사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고전에 대한 박식을 자랑하며, 품위 있고 유족한 생활을 즐겼다. 또한 자신의 종족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지방행정에도 참여했다. 그들이야말로 향촌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신사에겐 다양한 수입원이 존재했다. 그들은 위세를 이용해 전당포를 운영하거나 고리대금업자로 활동했다. 불법적인 상업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급 신사들 가운데는 마을이나 집안의 훈장으로 밥벌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필작가로 활동하거나, 대놓고 상업작가로 출판에 관여하기도 했다. 과거시험 참고서를 출판하거나 상업성이 있어 보이는 출판물의 교정도 맡았다. 다른 사람의 저술에 서문을 써주고 보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신사는 상인단체 임원이 됐다. 향촌공동체 사업에도 간사로 참여했다. 그 밖에 의연금 모금을 주관하거나 수리사업 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신사는 의학이나 법률 전문가로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지식과 명성에 힘입어 종족단체인 종중(宗中)의 대표가 돼 사당의 운영을 전담하는 등 종중 사무를 담당했다. 이처럼 신사의 역할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신사가 많이 나오면 친척들이 여러모로 혜택을 보는 구조였다.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종족기관, 즉 종중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지레짐작과 달리 중국의 종중은 상업에 훨씬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예를 들면, 안휘성 휘주부는 상업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투자자의 상당수가 유력한 종중이었다. 강소성의 남심진은 이름난 비단 산지였다. 다수의 종중이 그곳의 비단 사업에 투자했다. 사천성 남부지방은 소금 산지로 유명해 소금 채취에 거액을 투자한 종중도 많았다. 물론 종중은 농업에도 투자했다. 그들은 광동성 주강 하류의 개간사업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청나라 종중은 현대적 기업 또는 투자기관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었다. 자본이 넉넉해야만 집안의 유망한 청년들을 제대로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중의 투자이익은 간부들에게 큰 혜택으로 돌아갔다. 가난한 친족의 생계를 돕는 데도 사용됐다. 양자강 하류 지방에선 여러 종중이 공동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것을 상인들에게 빌려줌으로써 대부은행과 같은 구실을 했다. 한국의 문중과 달리 중국인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았다. 

종족이란 무엇인가. 조상을 공유한 집단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조상의 성을 바꾸거나 시조를 조작해 명성을 허위로 꾸미는 경우도 있었다. 종중은 공동재산을 소유한 게 사실이지만, 그 편차는 심했다. 상당수 종족은 몇 칸에 불과한 사당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들도 종중의 공동자본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중국인들은 종중의 재산이 흩어지는 걸 수치로 여겼다. 재산이 넉넉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 그 재산의 일부는 아들들이 나눠가졌으나, 대부분의 재산은 공동소유로 묶어 종중 재산으로 만들었다.

청나라 조정은 종중이 유교적 이념을 심화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안정시킨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종중을 믿고 장려했다. 그러면서도 조정은 종중의 부작용을 의식해 감시의 눈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종중 가운데는 약자를 괴롭히거나 무리한 개간사업을 벌여 홍수를 초래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종중이 추진한 사업이 사회문제를 낳기도 했다.

청나라는 상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다. 만주족은 본래 동북지방에서 모피 무역으로 돈벌이를 했던 만큼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18세기 청나라의 생활수준은 유럽을 능가했다. 당시 중국의 종중이 현대의 기업체를 연상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종가 문화’로 생존 도모

조선시대의 ‘문중(門中)’도 상속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특히 영남지방에서 발달한 ‘종가(宗家)’와 ‘종손(宗孫)’은 더욱 그러했다. 이는 균분상속제도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장자상속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였다.

영남에서 두드러졌던 종가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집안 재산을 오롯이 이어받은 종손이 문중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재산 분할을 막음으로써 종손은 조상 전래의 지도적 위상을 유지했다. 그들은 다른 집안 종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조상의 사당을 수호함으로써 양반 가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또한 종손은 종토(宗土)를 효율적으로 관리해 문중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안전망을 만들었다. 계속된 인구 증가로 생계를 잇기 어려운 친척들에겐 땅을 빌려줬고, 그들의 경조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거듭된 흉년이나 큰 난리를 겪은 끝이라도 조상을 같이하는 일가친척이 대대로 한 지역을 차지하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종가는 가난에 시달리는 일가를 모두 구제할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문중에 속한 유능한 청년들에게 장기간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만한 여력도 없었다. 대다수 종가엔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엔 기호지방의 몇몇 양반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 다른 양반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도 어려웠고, 합격의 관문을 뚫더라도 이권이 보장된 자리에 등용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세월이 계속되자 대다수 양반은 종가라는 지위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종가란 ‘불천위(不遷位)’가 있어야 했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계속해서 사당 제사를 누릴 신위를 모셔야만 종가가 되는 법이다.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이 없으면,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의 신위가 나오지 못한다. 그러면 이제 종가는 더는 형성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양반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영남지방 양반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려 한 가지 독특한 방안을 마련했다. 이른바 ‘향불천위(鄕不遷位)’라는 존재였다. 한 고장의 양반들이 의견을 모아 불천위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많은 종가와 종손이 새롭게 등장했다. 오늘날 경북 안동 한 지역에만도 이른바 ‘47종택(宗宅)’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0개 종가는 벼슬에 나간 적 없는 순전한 유학자를 불천위로 모신 집안이다.

종택의 성립으로 이어지지 못한 향불천위의 수는 훨씬 많았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祠宇)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위가 존재했다. 그들은 향불천위인 셈이었다. 그 대부분은 문중서원 또는 문중사우에 모셔져 각 문중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권력에서 멀어질수록 양반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각별했던 것이다.

유교 사회인 중국과 한국의 부계 혈연조직은 차이점이 명확했다. 중국에선 ‘종재(宗財)’, 곧 종중 재산을 공동으로 상속하고 공동으로 경영했다. 그 중심엔 과거시험에 합격한 신사들이 있었다. 중국에선 한 마을에 사는 종족이라도 신분과 직업이 다양했다. 신사가 있었는가 하면 농민, 상인 및 수공업자가 공존했다. 그들의 신분과 직업은 노력과 운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달랐다. 권력에서 소외된 양반도 기득권 신분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신분 이동 자체를 금지하려 했다. 종가를 세움으로써 종손이 조상 전래의 인적·물적 자원을 사실상 독점케 했다. 그것이 양반 가문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한국의 ‘종가 문화’는 양반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양반들은 ‘반맥(班脈)’, 곧 양반의 혈통이 맥맥이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받고자 종가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동일한 상속제도라도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독특한 운영 방식을 고안했다. 이것이 결국 저마다의 사회적·문화적 특성으로 발전해갔다. 어떤 경우든지 상속제도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전략이었고, 거기엔 집단의 소망과 지향점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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