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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피오르에 핀 오로라 유럽 부자들의 관광 상품

노르웨이 베르겐 미술관

  • 최정표|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피오르에 핀 오로라 유럽 부자들의 관광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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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해 50만 명의 크루즈 관광객이 찾는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에는 피오르 못지않게 매력적인 공간이 있다. 4만3000점 이상의 소장품을 가진 세계적인 베르겐 미술관이다. 이곳에서 노르웨이 미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노르웨이는 좁고 깊은 피오르 해안의 나라이고, 피오르 관광의 출발점은 베르겐(Bergen)이다. 피오르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관광 상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베르겐을 찾지만 베르겐에 훌륭한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베르겐 미술관(Art Museum of Bergen)’은 피오르에 핀 오로라다. 많은 경비를 들여 거기까지 갔다가 이를 보지 않고 돌아온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겐은 노르웨이 서쪽 끝의 항구도시다. ‘솔베이지의 노래’를 만든 음악가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1843~1907),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1828~1906) 등을 배출한 예술가의 도시다. 오슬로에 이어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고 인구는 30여만 명이다. 13세기부터 활동한 상인단체 ‘한자동맹’의 본부가 있던 곳으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관광이 주산업이다.



연간 300대 크루즈 정박  

베르겐은 고급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1년에 300여 대의 크루즈가 정박하고 50만 명의 크루즈 승객이 베르겐을 찾는다. 크루즈 이외의 관광객은 통계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크루즈 관광객은 대부분 서양인이고 그중 반 이상이 영국과 독일인이다.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의 관광객이 많은 만큼 베르겐 미술관에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베르겐에 가기 전까지 나 역시 피오르가 주 관심 사항이었고, ‘베르겐 미술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미술관에 가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여느 미술관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는 미술관이고 훌륭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베르겐 시가지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크기인 데다 미술관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내 한복판에 아름다운 호수공원이 있고 그 한쪽 편 건물들이 모두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은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고 입구가 각기 달라 하나하나 따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 건물별로 KODE1에서 KODE4까지 네 개의 간판이 따로 붙어 있는데 이들은 장르별로 구분된 네 개의 전시장이다. KODE는 2013년 사용하기 시작한 베르겐 미술관의 공식 명칭이다. 쉽게 읽히고 기억될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KODE는 7채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3채는 베르겐 출신 음악가들의 박물관이자 연주장이다. 이들은 각기 독립기관으로 운영되다가 2006년 하나의 행정기관으로 합해졌고, 2007년에는 하나의 재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음악가 박물관은 독립적인 이름 아래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베르겐 미술관은 4만3000점 이상의 소장품을 갖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 작가들의 작품도 많지만 노르웨이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뭉크(Edvard Munch), 달(J. C. Dahl), 아스트루프(Nikolai Astrup) 등의 작품이 많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은 1980년대 이후 동시대 작품도 소장하고 있는데 노르웨이 작가는 물론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많다.



줄지은 부자들의 기부

미술관은 부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설립도 어렵고 유지도 어렵다. 공공 미술관조차 정부 예산으로만 끌고 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베르겐 미술관도 예외일 수 없었다. 베르겐의 부자들이 많은 작품을 기증하고 나섰다.

첫 번째 훌륭한 기증은 1889년에 있었다. 사업가 순트(Christian Sundt)가 400여 점의 고품격 작품을 기증했다. 1916년에는 베르겐 미술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증이 있었다. 사업가 라스무스 마이어(Rasmus Meyer·1858~1916)가 당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무려 962점이나 미술관에 내놓았다.

마이어는 당시 노르웨이 최고의 컬렉터였는데 그가 기증한 뭉크 작품은 베르겐 미술관의 최고 소장품이 됐다. 이 덕에  베르겐 미술관은 ‘뭉크미술관’과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다음으로 최고의 뭉크 컬렉션을 갖출 수 있었다. 마이어 기증품은 1924년 궁궐과 같은 신(新)바로크 스타일의 우아한 건물을 따로 지어 거기에 전시했다. 독립 건물은 기증의 전제 조건이었다.

1947년에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기증이 있었다. 베르겐의 거상 가문 출신인 요한 테센(Johan Rasch Jentoft Thesen·1867~1945)으로부터 1000여 점의 판화와 드로잉을 기증받았다. 미술관은 7000여 점의 판화와 드로잉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의 기증품은 이 소장품의 핵심이다. 렘브란트, 반다이크, 뒤러, 세잔, 마티스, 피카소 등의 작품이다. 일본 작품도 103점이나 들어 있다. 노르웨이 작품과 16세기 그리스 작품도 있다.

1971년에는 사업가 롤프 스테네르센(Rolf Stenersen·1889~1978)이 동시대 작품을 대량 기증했다. 그도 마이어처럼 독립 건물을 마련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수집품을 기증했다. 정부가 일부 출연하고 민간인으로부터 기부도 받아 새 건물을 마련해 1978년 문을 열었다. 새 건물에는 많은 전시 공간과 사무실 공간이 마련돼 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아스트루프 작품 1100여 점 기증

스테네르센은 1936년부터 컬렉션을 시작해 이미 많은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했다. 이 기증품은 새 건물이 1994년에야 마련돼 그곳에 전시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스테네르센은 노르웨이 동시대 작품과 국제적인 모더니즘 작품으로 눈을 돌렸다. 베르겐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은 이때 수집한 작품이고 피카소, 클레, 아스거 조른, 피에르 아레친스키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때 수집한 뭉크 작품은 미술관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뭉크 컬렉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소장품이 계속 늘어나자 스테네르센 빌딩으로는 공간이 부족해져 시내 호숫가에 새 건물을 마련했다.

2007년에는 베르겐의 한 은행이 개인 컬렉터가 갖고 있던 다량의 니콜라이 아스트루프(Nikolai Astrup) 작품을 구입해 미술관에 기증했다. 작품 수는 무려 1100여 점이나 된다. 미술관은 아스트루프 작품의 주요 관리자가 된 셈이다. 그 이후에도 미술관은 새 세대 컬렉터들과 협조해 노르웨이와 스칸디나비아 작품을 체계적으로 소장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시 예산으로 집행되는 작품 수집에도 하나의 지침으로 작용했다.



삶,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시

베르겐 미술관도 노르웨이가 뭉크의 나라임을 입증하고 있다. 뭉크의 작품이 타 작품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수로도 그렇고 관람객들의 관심도도 그렇다. 이것은 훌륭한 작품을 기증한 마이어와 스테네르센의 덕택이다.

뭉크 작품은 KODE3의 전시실에 배치돼 있다. 뭉크의 예술적 진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해 3개의 방에 전시하고 있다. 첫 번째 방에서는 젊은 시절 뭉크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뭉크의 독특한 개성이 확립되기 이전 작품들이다. 다음 방은 뭉크 고유의 기질과 특징이 한껏 표출된 작품들로 가득하다. 1893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뭉크는 ‘삶의 직조물- 삶,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시(Frieze of Life-A Poem about Life, Love and Death)’라는 프로젝트에 빠져 있었다. 인생, 사랑, 죽음이 작품의 주제였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뇌하면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작품 속에 내재돼 있다. 이 방의 작품은 이 시기의 이 주제에 대한 그림들이다. 세 번째 전시실의 그림은 뭉크가 인간적으로 성숙했을 때의 작품들이다. 주제는 내면의 어둠에서 밝은 바깥세상으로 옮겨왔다. 이처럼 베르겐 미술관은 한 인간으로서, 한 예술가로서 뭉크의 변화 과정을 종합적으로 조명할 수 있도록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많은 뭉크 작품 중 ‘여름밤(Summer Night)’은 미술관 도록의 표지에 등장한다. 뭉크가 26세 때인 1889년 작이다. 그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고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던 그림이다. 한 컬렉터가 젊은 화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그림을 구매했다고 한다. 미술사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 뭉크가 독창적인 화풍을 보이기 시작한 초기 그림이라고 평한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여인의 초상화로 뭉크 작품답지 않게 안정적이고 평범하다. 누이동생 잉거(Inger)가 모델이다. 그래서 작품 제목을 ‘해변의 잉거(Inger on the Shore)’라고도 한다. 처음의 제목은 ‘밤(Evening)’이었다. 제목은 바다보다 밤을 강조하고 있다. 밤에 해안가의 바위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그렸는데 전혀 밤 같지 않다. 북국 베르겐은 백야 현상으로 여름엔 밤 12시도 이런 모습이다. 그림에서는 밤을 느낄 수 없지만 제목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여자 인생의 세 단계

그림에서 바닷가의 바위들은 따뜻하게 묘사돼 있는 반면 바다는 차갑게 그려졌다. 둘이 대비되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인은 안정된 모습이지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하얀 옷과 미모의 얼굴이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시절부터 뭉크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누이동생의 외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를 파헤치고 싶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미술관에서는 또 하나의 뭉크 그림이 특히 눈길을 끈다. 크기가 164×250cm인 대작이고 제목도 ‘여자 인생의 세 단계(Woman in Three Stages)’로 아주 특이하다. 여자의 모습이 세 단계로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 끝에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894년 작으로 ‘삶의 직조물(Frieze of Life)’에 몰두해 있을 때의 작품이다.

맨 왼쪽의 여자는 소녀의 모습이고 그다음은 성숙한 여인의 누드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나이 든 여인이다. 누드 여인은 아주 자신에 넘친 자태를 취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최고 전성기를 뽐내고 있다. 누드 왼쪽의 소녀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이고, 오른쪽 여인은 검은 옷에서 이미 황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시들어가는 인생에 대해 번뇌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여자 인생의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티와 달이 만든 미술관

맨 오른쪽에 배치한 남자는 나무틀 속에 가두어두었다. 뭉크는 다양한 구성과 다양한 모습으로 수없이 많은 형태의 남자와 여자를 그렸다. 인간의 번뇌, 남녀 관계의 고뇌를 담아냈는데 이 작품도 그 연장선상의 그림이다.

베르겐 미술관을 탄생시킨 산파는 정치인 크리스티(Wilhelm Frimann Koren Christie·1778~1849)와 베르겐 출신 화가 달(Johan Christian Claussen Dahl·1788~1857)이다. 크리스티는 1814년 노르웨이를 덴마크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고, 달은 노르웨이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노르웨이 화가다.

크리스티는 1820년대에 건강이 나빠지자 정치 일선에서 퇴진해 국가를 위한 새로운 미션에 매달렸다. 바로 훌륭한 미술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나라가 독립하려면 문화예술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25년부터 작품 모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목표는 노르웨이를 넘어 스칸디나비아 전체에서 최고의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까지 둘러본 것을 보면 미술관에 대한 그의 포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티가 당대 노르웨이 화단의 거물이던 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독일과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달은 크리스티에게 자문을 많이 했고 해외 작품의 수집에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크리스티의 작품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미술관 설립이 붐이었는데, 달은 거기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 크리스티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거기에다 달은 자기 작품은 물론 수집한 다른 작가의 작품도 크리스티 미술관에 기증했다.

크리스티는 어렵사리 미술관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베르겐에서는 아직 미술관이 낯선 시절이었다. 크리스티의 베르겐 미술관은 회원에게만  사전 예약에 한해 개방했다. 일반 시민은 아직 미술관에 관심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노르웨이 특성 살리다

1838년에는 달의 주도하에 ‘베르겐예술협회(Bergen Art Society)’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2년 앞서 1836년 오슬로에서 예술협회가 만들어졌는데 달은 오슬로에서처럼 예술협회가 주도해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크리스티에게 조언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미술관을 참고는 하되 노르웨이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은 베르겐예술협회를 내세워 작품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수집되는 대로 작품을 정리해나갔다. 1839년까지 170여 점이 수집됐다. 그렇지만 독립된 미술관은 갖추지 못했다. 이후 베르겐 시 당국이 크리스티의 ‘베르겐 미술관’과 ‘예술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무려 40여 년이 더 걸렸다.

1878년에 와서야 비로소 ‘베르겐 시립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시내에 미술관 건물이 마련되고 수집품들이 전시됐다. ‘베르겐 미술관’으로부터 280점의 그림이 들어오고, ‘예술협회’로부터 그림 34점, 조각 11점, 수채화 1점, 드로잉 1점이 들어왔다. 1896년에는 새롭게 더 좋은 건물이 마련돼 소장품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오늘날의 베르겐 미술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화가 아스트루프

니콜라이 아스트루프(Nikolai Astrup·1880~1928)은 노르웨이 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노르웨이 안에서는 매우 유명한 화가다. 뭉크와 동시대 작가로 노르웨이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작가다. 베르겐 미술관에는 그의 전시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물론 소장품도 많고 전시 작품도 많다.

그는 고향 풍경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린 화가다. 객지를 떠돌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오래 살았고 고향 주위의 풍경을 밝고 강한 색채로 그려냈다. 색깔만 밝은 것이 아니라 그림의 분위기도 밝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닥불(Bonfire)’은 그런 그림 중 대표작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여름 밤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은 풍경화이면서 민속화다. 크기가 136×196cm로 이런 그림 중 가장 큰 작품이다. 노르웨이의 한여름 밤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커다란 바위산 아래는 호수이고 산 위에는 한여름인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산 아래는 푸른 초원이다. 백야의 나라인지라 밤이지만 대낮같이 밝다.

초원 위에 큰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이 각자 취향대로 이를 즐기고 있다. 모닥불 주위에서는 남녀 쌍쌍이 춤을 춘다. 한쪽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모닥불을 바라다보고 있다. 임신한 아낙네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모닥불 연기가 호수 쪽으로 내려 깔리고 있다. 저 멀리 이곳저곳에서도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매우 평화스러운 노르웨이 산간의 한여름 밤 정경이다. 

아스트루프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스트루프는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오슬로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파리와 독일 등에서도 잠시 살았다. 아스트루프는 신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는 1905년 첫 전시회가 개최됐고 1900년대 초부터는 노르웨이 최고의 화가로 군림했다. 노르웨이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인 터라 2016년에야 런던에서 첫 전시회가 열렸으며 이 전시회는 독일로도 이어졌다. 여기에는 9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그의 그림은 경매에서 5억 원 이상에 팔리고 있다.


여성 화가 키란드

세계 미술사에서 여성 화가는 많지 않다. 유명한 화가는 더 드물다. 지금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화단에 여성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남녀 구분이 무의미해졌지만 옛날에는 그랬다. 이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의 문제였다. 노르웨이에서도 유명한 여성 화가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시대에나 재능 있고 끼 있는 여자는 있었다.

키티 키란드(Kitty Lange Kieland·1843~1914)는 노르웨이의 1세대 여성 화가다. 베르겐 미술관에는 ‘야에렌의 토탄 습지(Peat Marshes at Jaeren)’라는 그의 풍경화가 걸려 있다. 노르웨이의 독특한 농촌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토탄(peat)을 파서 해안가 늪에 쌓아놓고 있다. 파낸 자리에는 물이 고여 있다. 이 토탄은 말려서 연료로 사용하는데 당시 농촌의 중요 땔감이었다. 멀리 토탄을 싣고 가려는 마차도 그려져 있다. 평화로운 농촌을 그린 풍경화다.

키란드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교양 차원에서 그림을 공부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넘어서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본격적인 그림 수업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늦깎이 화가다. 주로 독일에서 화가 수업을 받았다. 키란드는 스승의 권유로 노르웨이 남부 해안마을 야에렌을 방문해 그곳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곳을 자주 방문했으며 이곳을 그린 풍경화가 그의 브랜드가 됐다. ‘야에렌의 토탄 습지’도 그런 그림 중 하나다.

키란드는 개방적이고 사회참여적 여성이었다. 1879년에는 회화의 메카 파리로 가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10년을 머물렀다. 여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태에 반항했다. 여권운동에도 나섰고, 여권신장을 위해 공개 토론에 나서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간다.




최 정 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前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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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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