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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빠꾸 人生’ 김경율이 사는 법 “내 삶에 후회란 없다”

  •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노빠꾸 人生’ 김경율이 사는 법 “내 삶에 후회란 없다”

  • ●아내와 결혼하고 싶어 회계사 택해
    ●삶의 분기점 ‘조국 사태’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나는 언제나 진보… 민주당은 진보 표방 세력
    ●하나님과도 같던 아버지
    ●아들아, 그저 자유롭게 살아라


6월 3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만난 김경율은 “‘노빠꾸’라는 말이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6월 3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만난 김경율은 “‘노빠꾸’라는 말이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다. ‘회계사’란 직업에 대한 이미지가 그랬으니까. 사무실에서 ‘어마무시한’ 양의 서류 속에 파묻혀 자릿수가 몇 개인지 세기도 어려운 숫자와 씨름하는, 신속·정확이 생명이라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리라고.

까칠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보인 행보는 마치 ‘송곳’과도 다름없었으니까. 쌍용차, 세모그룹, 다스, 미르재단,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물산, 삼성화재…. 참여연대에 몸담은 시절 그가 찔러 피를 낸 곳이 어디 한 둘이던가. 게다가 2019년 ‘조국 사태’ 이후론 이른바 진보 진영의 ‘내로남불’에 앞장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온갖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5월 9일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보인 ‘싸움닭’ 같은 모습은 또 어땠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관점으로 가득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불편한’ 사람이겠거니했다. 김경율(53·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에게 가졌던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날을 잡기 위해 첫 전화를 걸었을 땐 유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이얼이 돌아갈 때 ‘이왕이면 천천히 받기를…’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당장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은 그런 것. 바람과는 달리 10초도 되지않아 들리는 말. “네, 김경율입니다.”



그런데 웬걸? 소탈한 웃음이 이어진다. 예의도 깍듯하다. 보통 통화할 때 “네” 혹은 “예”를 2번, 많아야 3번 정도 반복하지 않나 싶은데, 대체 몇 번을 하는 건지. “예, 예, 예, 예” 최소 4번은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비굴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니다. 당당하고 시원시원하다. 일정 조율에 1분도 안 걸렸다.

“네, 뭐, 인터뷰 얼마든지 하시죠. 6월 3일은 비교적 일정이 여유롭습니다. 제가 거기로 찾아뵙죠.”

6월 3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난 김경율은 통화 때의 느낌과 다를 게 없었다. 잘 웃고,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근 2년간의 ‘셀럽화(化)’ 덕분인지 사진 촬영 때 제법 익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래도 아직 완벽히 적응한 건 아닌지 웃는 표정은 조금 어색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자연스러운 웃음을 볼 수 있었다. 하얀 이가 드러나며 두터운 눈 밑 살에 밀려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한다. 싸움닭 같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퍽 순수해 보인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다. 특히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땐 영락없는 ‘순박한 아저씨’다.

그렇다고 ‘순한’ 사람은 결코 아닌 것이, 어떤 대상을 비판할 땐 가차 없다. 여러 차례 보여왔던 ‘전투 본능’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거 못 내보겠네’ 싶은 수준의 ‘센 말’을 쏟아낸다. 화가 난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바짝 선다. 수시로 바뀌는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궁금해하다 부질없단 생각에 이내 접었다. 사람은 원래 꽤나 다채로운 존재니까. 어떤 모습이 진짜든 분명한 건 김경율 이 사람, 퍽 재미있는 인물이다. 일단 말에 ‘필터’가 없다. 말주변이 뛰어난 게 아닌데도 이야기하면 시간이 금방 간다. 꽤나 흡입력 있는 ‘콘텐츠’를 가진 사람이랄까.

‘해괴사’가 된 위험한 복학생 오빠

상당히 까칠할 줄 알았어요.

“까칠하진 않을 거예요. 이미지하고 다르다는 말 많이 들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쭉 그랬죠. 친구들이 저에 대해 회상할 때마다 하는 말이 ‘경율이는 항상 장난치고 있었어’ 거든요.”

장난기가 많았나 보네요.

“많이 쳤죠. 농담도, 장난도(웃음).”

‘장난기’는 페이스북에 잘 나타난다. 게시물을 자주 올린다. 하루에 대개 5~6개, 많으면 10개씩 쓴다. 풍자의 묘미가 도드라진다. 예를 들다면 최강욱 의원의 성희롱 발언 의혹에 대해 6월 3일 오전 7시께 다음과 같이 썼다.

“정말 최강욱 의원‘님’께서 그렇게 나불대시다가 침묵 중인 게 넘 안타깝습니다. 그깟 성희롱이 머라고, 민주당에 계시는 여성운동 출신 쟁쟁한 의원ㄴ 들도 단 한마디도 안 하시는 그런 일로 최강욱 의원ㄴ 발목을 잡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저 한마디면 됩니다. 최강욱 의원ㄴ이 한 말은 딸딸이였다 이 한마디면… 아 아닙니다 죄송 짤짤이였다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됩니다.”

이런 모습 때문일까. 페이스북 지인들은 그를 ‘회계사’가 아닌 ‘해괴사’라고 부른다. 퍽 어울린다. 김경율도 이 별칭이 마음에 드는지 경제민주주의21 유튜브 채널에 ‘김경율 해괴사의 일해라 절해라’로 명명한 영상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하고 있다. 회계 지식에 근거해 정치·경제 비리 의혹을 꼬집는 코너다. 좀 해괴하긴 해도 그의 본업은 역시 회계사니까. 그런데 회계사가 된 이유도 좀 해괴하다. 지금 아내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단다.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가 스물일곱 나이에 복학했다. ‘화석’이 된 채 과외로 생활비를 버는 철학도였던 그에겐 CPA(공인회계사·Certified Pubilc Accountant)가 뭘 뜻하는 약자인지조차 생소했다.

지금 아내 때문에 회계사가 됐다고요.

“그런 셈이죠. 시험 준비하기 전까진 회계사가 뭐 하는 직업인지도 몰랐거든요. 사귀던 땐데 어느 날 묻더군요. ‘부모님한테 뭐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느냐’고요. 당시 생업이 과외였어요. 그래서 ‘과외 교사라고 하면 되지’라고 했더니 ‘그러면 딸을 주겠어?’라고 그러더라고요. 뭘 해야 할지 고민했죠.”

왜 많은 직업 중 회계사였나요.

“웅대한 뜻이 있던 건 전혀 아니었어요. 그냥 가장 빨리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을 생각했죠. 주변에 회계사 공부하는 친구가 많기도 했고, 수학엔 조금 자신이 있어서 시작했어요. 1995년 공부를 시작해 1998년 합격했죠. 3년 걸렸네요.”

아내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가요.

“1988년에 입학한 뒤 어쭙잖게 노동운동한답시고 공장에서 생활하고 그러다 1995년 3월 복학했어요. 학교 다니다 아내를 만나게 됐죠.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아내는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원래 이대 후문에서 하숙했어요. 그러다 하숙집이 연세대 정문 서쪽 부근으로 이전했고, 그때 같은 집에 살게 된 거죠. 다섯 살 차이거든요. 처음엔 남녀 감정 그런 거 없었어요. 하숙집 사람끼리 자주 술판 벌이고, 밥 먹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었죠.”

대학가에 ‘복학생 오빠’를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는데(웃음).

“그렇죠. 딱 그런 거죠(웃음).”

노동운동은 왜 했나요. 그것도 입학하자마자.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쭉 자랐는데, 아무래도 ‘광주’의 영향이 컸겠죠. 학업에 매진해 석·박사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1학년 때부터 거의 집회만 나갔죠.”

이른바 ‘586세대’의 끝자락에 위치했네요.

“맞아요. 특히 광주 출신 중에 저 같은 경우는 흔했어요.”

회계사가 된 뒤에는 제법 ‘탄탄대로’였다. 첫 직장이 삼정회계법인(현 KPMG), 다음 직장이 삼일회계법인이었다. 두 곳은 안진회계법인과 함께 ‘회계법인 3대장’으로 꼽힌다. 회계법인계의 ‘김앤장’ ‘태평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김경율은 ‘해괴하게도’ 좋은 조건을 내려놓고 회사를 나와 지금 그의 생업이기도 한 1인 사무소 ‘미래 세무회계 사무소’를 차렸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직후 참여연대에도 가입했다.

좋은 직장을 왜 나왔나요.

“월급쟁이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삼일에서 나온 후 한 벤처기업 전문회계법인에 들어갔어요. 당시 ‘벤처 붐’이 일었거든요. 두 번씩이나 ‘들이받아서’ 그만두게 됐죠. 뻔히 보이는 분식(粉飾)을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데, 죽어도 못하겠더라고요. 쌍욕해 가며 싸웠어요. 이럴 바엔 혼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죠.”

참여연대에 가입한 이유는요. 그곳도 조직이잖아요.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의사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인의협)’가 있는데, 회계사는 그런 게 없었어요. 제가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잖아요. 함께한 사람 중 당시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투신한 상태인 분들이 계세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1998년에 소액주주운동이 활발한 때를 맞아 가입했죠.”

2019년 9월 29일, 그날

김경율은 2019년 9월 29일 페이스북 글을 올리기 이전 약 21년간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회계사로 활약했다. 사진은 2014년 11월 17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 관련 긴급좌담회에서 김경율이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는 모습. [뉴스1]

김경율은 2019년 9월 29일 페이스북 글을 올리기 이전 약 21년간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회계사로 활약했다. 사진은 2014년 11월 17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 관련 긴급좌담회에서 김경율이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물질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내려놔야 했겠네요.

“큰 욕심 버리면 생활엔 그리 지장이 되지 않아요. 회계법인에 계속 몸담고 있었다면 참여연대 활동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후회 없고요. 시민운동 좀 안 한다고 삼성이 저의 고객이 되겠어요, 현대가 저의 고객이 되겠어요. 가늘고 길게 가는 거죠(웃음).”

참여연대에 가입한 김경율은 쌍용차 분식회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 등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참여연대를 상징하는 회계사로 떠올랐다. 2019년 9월 29일은 이런 그의 삶을 바꾼 ‘운명의 그날’이다.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이날 오전 그는 21년간 몸담았던 참여연대에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한 페이스북의 글과 함께. 위선자, 개XX, 구역질 난다, 권력 예비군….

이때부터다. 김경율이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건. 오래된 순대로 포털 ‘네이버’ 기사검색에 ‘김경율’을 검색해 봤다. 2007년 12월 기사가 처음이다. 당시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과 함께 금융감독원을 방문해 삼성상용차·삼성중공업 분식회계 의혹 관련 감리요청서를 제출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시작으로 2019년 9월 29일까지 그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기사는 약 1100개다. 그마저도 30%쯤은 가수 소찬휘의 남편인 베이시스트 ‘로이’가 검색된다. 그의 본명도 김경율이라서 그렇다. 2019년 9월 29일부터 올해 6월 2일까지 검색되는 기사는 약 4700개다. 김경율은 2019년 9월 29일 이전의 12년보다 이후 3년 동안 훨씬 더 유명해진 셈이다. 근래 그를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김경율을 ‘참여연대 대표 회계사’보단 ‘셀럽’ 혹은 ‘논객’으로 여기곤 한다.

‘조국 사태’가 삶의 분기점이 된 걸로 보이네요.

“네.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죠. 2019년 9월 29일 이전엔 ‘김경율’ 하면 연관 검색어에 대개 삼성이 나왔을 거예요. 저와 관련된 사건도 주로 경제·금융 부분에 한정돼 있었고요.”

어쩌다 참여연대와 갈라서게 된 건가요.

“참여연대의 장점은 누가 뭘 하든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각자의 소신과 자유를 존중해요. 예컨대 경제금융팀, 사회복지팀, 사법감시팀 등 여러 팀이 있는데, 각자의 의견을 100%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거죠. 어떤 현안에 대해 입장을 낼 때 ‘터치’하지 않는 게 당연했고요. 그런데 ‘조국 사태’ 때는 달랐어요. 논평을 내려고 하는데 막더라고요.”

참여연대가 변한 건가요.

“일단 제가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감시해야 할 재벌 권력,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는 그대로니까요.”

예전에는 이른바 ‘진보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이젠 다르잖아요. 사실상 ‘보수의 스피커’ 역할이 됐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진보 인사’로서 불쾌함이나 꺼림칙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전혀요.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 WAR(Wins Above Replacement·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 지표를 보자고요. 그간 약 5년 내지의 기간을 돌이켜 볼 때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에 있어 이른바 ‘조중동’보다 WAR가 높은 언론사가 있느냐는 거죠. 한겨레, 경향, MBC, KBS, 오마이뉴스 등 진보 언론 스스로가 되돌아봐야 하는 문제 아닐까요.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참 와닿아요. 살면서 지금까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힌 적이 거의 없었어요.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침묵하니까 저의 입을 빌려 일반 국민의 요구가 분출되는 거죠. 제가 하는 말이 곧 누군가 하고 싶었던 말일 거라고 생각해요.”

“변절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지금도 상당히 ‘왼쪽’이에요.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진보 인사’ 혹은 ‘진보 개혁 인사’라고 하는데, 그중 몇이나 자신에게 붙인 그 수식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굉장히 회의적으로 봐요. 민주당이든, 정의당이든 그들이 보수보다 지적·도덕적으로 더 앞서는가? 아니거든요. 진보는 보수보다 조금 더 지적·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 스스로 제가 ‘진보’라고 말하기가 참 부끄럽지만 그래도 전 통념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고 생각해요.”

통념?

“글쎄요. 사실 한국의 진보와 보수, 나아가 좌파와 우파라는 것도 참 희화화·형해화(形骸化)됐다고 느끼거든요. 민주당의 ‘처럼회’ 인사들이 개혁, 진보를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부끄럽잖아요. 보수보다 하나 나을 거 없고요. 홍세화 선생님이 ‘민주 건달’이라는 말을 쓰셨던데,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냥 ‘양아치’라고 봐요. 진보를 ‘표방’하는 양아치요. 이것 말고는 대체할 표현이 없네요.”

그렇다고 보수가 진보보다 더 낫다고 장담할 순 없잖아요. 정권교체를 지지한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으론 ‘윤석열’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었죠.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적폐청산’ ‘재벌 개혁’ 성과를 보면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윤석열의 역할이 상당했거든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재벌 관련 고발·고소를 해왔겠어요. 다른 검찰들은 뜨뜻미지근했지만 윤석열은 달랐어요. 과장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이 그랬으니까. 대통령이 된 후로 점점 우경화되는 모습, 재벌 친화적 모습이 보이는 것도 분명해요. 언젠간 다시 날을 세워야 될 때가 분명히 올 거고,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로남불’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유명해진 후로 달라진 건 없나요. 장점, 단점 다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외향적인 성향이 전혀 없어요. 대학생 시절 집회할 때도 앞장선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남 앞에 서는 걸 즐기지 않아요.”

김경율이 지난해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판교대장동 개발사업 사례의 문제점과 향후 전망 세미나’에서 발제하고 있다. 그는 20대 대선 국면에서 회계 지식을 활용해 ‘대장동 의혹’을 공론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동아 DB]

김경율이 지난해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판교대장동 개발사업 사례의 문제점과 향후 전망 세미나’에서 발제하고 있다. 그는 20대 대선 국면에서 회계 지식을 활용해 ‘대장동 의혹’을 공론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동아 DB]

노빠꾸 人生

지금 모습을 생각하면 좀 의외네요.

“이른바 ‘키보드워리어’ 성향은 있었어요. 온라인 공간에서 날뛰는 거죠. 1990년대 말 ‘천리안’ ‘하이텔’ 등 온라인 공간이 생겼잖아요. 그때부터 그런 성향이 좀 드러났죠. 온·오프라인 성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페이스북으로 ‘이 지랄’을 하고 있고요. 지금 인터뷰도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안 하고 싶어요. 그래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죠(웃음).”

정치는 못 하겠네요(웃음).

“‘정치 세포’가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니죠(웃음). 정치를 권유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2020년 총선 때 이곳저곳에서 제안이 있었죠. 민주당은 아니고요(웃음). 감당하지 못할 듯해 거절했어요. 앞으로도 안 할 생각이에요. 저랑 안 맞아요. 그리고 지금도 전 시민사회 영역에서 정치하고 있다는 생각이고요. SNS 공간에서의 정치가 제 장점이라고 믿어요.”

지난해 7월 1일 민주당은 대선 예비경선 관문인 ‘국민면접’에서 김경율을 ‘국민면접관’으로 섭외했다가 당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정세균 전 국무총리 등 당내 예비주자들의 반발로 2시간 만에 철회했다. 이날 오후 이재정 의원은 페이스북에 김경율을 향해 “저급한 시궁창 일베 단어 쏟아내는 이”라고 맹폭했다. 김경율은 같은 날 밤 페이스북에 “재정아, 내가 바빠서 일일이 답신 못 보내는데 참여연대에서 너 국회의원 됐다고 하니 나오는 소리가 ‘참여연대에서 춤만 추다 가네’였다. 밥 먹고 반려동물 성대모사하는 버릇 좀 고쳐라”라고 맞받아쳤다. 이재정 의원은 민변 출신 변호사로서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운영위원을 지낸 바 있다.

이재정 의원과 거친 공방을 주고받았죠. 같은 참여연대 출신이잖아요.

“이재정 의원은 핵심 멤버는 아니었어요. 참여연대를 스펙으로 사용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참여연대, 민변 등 전형적 코스 있잖아요. 솔직히 이젠 관심도 없어요. 하찮게 보여요. 가볍게, 그냥 똥 치우듯이 생각하고 있죠.”

당시 국민면접관 역할을 쭉 맡았다면 민주당이 바뀌었을 거라 보나요.

“아뇨. 사실 별일 아닌 이벤트잖아요. 그래서 저도 응했고요. 아주 조그만 일을 크게 만들어버린 건 민주당의 호들갑이었어요. 공적 정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사리판’이에요. 대권 잠룡들이 나서서 저를 인격적으로 폄하했는데, 웃긴 노릇이죠.”

5월 9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보인 태도가 주목받았어요. “민주당은 ‘대장동 주범이 윤석열’이라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다’”고 했는데, 꽤 격앙했었나 봐요.

2019년 9월 29일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때 김경율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경율은 이 날, 이 글이 자신의 삶에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율 페이스북]

2019년 9월 29일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때 김경율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경율은 이 날, 이 글이 자신의 삶에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율 페이스북]

“사실 저를 도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심해야지’ 다짐했거든요. 그런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진보 진영의 형해화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더니 김남국 의원이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었어요. 기분이 나빴죠. 하나 더 있어요. 민형배 의원이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위장 탈당’이라는 용어를 썼어요. ‘발작 버튼’이 눌린 건지 계속 저를 노려보더라고요. 이후엔 계속 제 답변 동안 소란을 피우며 방해하고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어요.”

좀 참으면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과거 회계법인에 있을 때나 참여연대에 있을 때도 그렇고요. 참으면 분란도 없을 텐데요.

“후회는 전혀 없어요. 저는 후회를 안 해요. 고민도 그다지 없고요. 인간 자체가 얕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웃음). 2019년 9월 29일에 글을 쓸 때도 고민 하나도 안 했어요. 술 먹고 쓴 것도 아니고요. 그때 청와대에서도 삭제 요청이 왔었고, 사회 원로 인사도 찾아와 지워달라고 했어요. 알겠다고 했죠. 대답만요. 어차피 지울 생각 없는데, 뭐 하러 실랑이해요.”

완고하네요.

“그때 글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달렸어요. 그 중 하나가 기억이 남아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한 고위직 인사가 ‘난 일단 이 사람 믿어보겠다. 김경율은 노빠꾸다’라고 썼어요. 제 삶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도 후회되는 일이 없긴 힘들지 않나요.

“음….”

“경율아, 학교 가지 마라”

김경율의 말이 멈췄다. 대담 내내 보이지 않던 망설임이다. 기억을 반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걸까. 조금 어색했던 정적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딱 하나 있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별로 안 알려진 이야기예요. 그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중2 때 좀 아파서 6개월 간 학교를 쉬었는데, 몸 상태가 회복이 안 돼서 그런지 성적이 나빠졌거든요. 고2 때 아버지가 성적표를 보시더니 ‘학교 가지 마라’고 하셨어요. ‘예. 그만둘게요’ 하고 다음 날부터 학교 안 나갔어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좀 불편하더라고요. 왜 학교를 관뒀는지 묻는 사람이 많아서 설명하기 귀찮아요.”

둘 다 좀 이상한데요. 성적이 좀 나쁘다고 학교를 관두라고 하는 분이나 그렇다고 진짜 관두는 사람이나(웃음).

“제가 늦둥이예요. 아버지가 마흔다섯 살에 절 낳으셨고,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건설업에 종사하셨는데, 건축기사라곤 하지만 사실상 ‘세미 노가다’셨어요. 말수도 별로 없으시고 외향적인 분은 아니셨죠. ‘청소해라’ 같은 그 흔한 잔소리 한번 안하셨고요. 그런 분이 ‘학교 가지 마라’고 하시니 전 받아들인 거죠. 이런 걸 보면 아버지 성격을 이어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를 참 좋아했어요. 아니 정말 존경했어요.”

존경한 이유가 있나요.

“폴 오스터의 소설 중에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인 줄 알았다’가 있어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딱 그거 같아요. 하느님 같은 존재였죠. 체격이 크셔서 커 보였던 존재도 아니고, 학력이 높으신 것도 아니었지만 뭐라 말씀하시든 전부 믿고 따랐어요.”

아버지에게만은 ‘노빠꾸’가 아니었네요.

“그랬죠(웃음). 아버지가 잔소리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면 오히려 잘 안 따랐을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아버지가 ‘하느님’이었기에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웃음).”

김경율이 말한 ‘하느님 같은 아버지’의 의미를 곱씹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란 존재는 절대적이다. 원하는 걸 사준다. 모르는 걸 알려준다. 무한한 사랑을 준다. ‘슈퍼맨’ 같다. 그러나 몸이 자라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스로 많은 걸 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이 아버지에게 배운 것과는 꽤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나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그리 잘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렇게 아버지의 권위는 점차 빛이 바란다.

김경율은 1남 1녀를 뒀다. 첫째가 2000년생으로 군대에 있다. 인터뷰 전날(6월 2일)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둘째는 2003년생이다. 지난해 수능을 보고 올해 재수 중이란다. 김경율은 씁쓸한 표정으로 “나는 아이들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다. 권위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마냥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자식들에게 미안한 아버지

하느님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섭섭한가 보네요.

“음…. 가끔 생각해 봤어요. ‘내가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을 왜 내 아이들은 못 느낄까’ 하고요. 아버지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에게 농담도 자주 하고 장난도 많이 쳐요. 신비감이 없다고 해야 할지(웃음). 스마트폰의 영향도 있는 것 같고요. 검색만 하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잖아요. 애들이 현실 인식이 빨랐던 거죠(웃음). 전 애들한테 미안해요.”

왜요?

“정치적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주목받은 게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어요. 참여연대 활동을 할 때는 제 삶에 대해 아내가 이렇다 저렇다 관여한 적이 없지만 얘기가 달라진 거죠. 아내가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자라 저와 갈등이 생겼어요. 아이들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됐죠. 또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 아들이 저에게 ‘아빠, 힘내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는데, 이게 참….”

울컥했나요.

“그런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단 ‘애가 댓글을 다 보는구나’ 싶었죠. 참 미안하더라고요.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반성하는 게 하나 있는데, 저는 제 아버지가 저에게 그랬던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이것도 참 미안해요. 하느님 같은 아버지로 남고 싶다는 생각보단 미안함이 크네요.”

권위는 없지만 편안한 아버지도 괜찮잖아요.

“내심 자식들에게 제 아버지처럼 인식되길 바란 걸 수도 있죠. 그런 게 미안해요. 저는 운동권 세대예요. ‘자유’라는 말은 금기어 중 하나였거든요. 마르크스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을 되새길 때나 쓰곤 했죠. 이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편안하게 해요. 자유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가치처럼 여겨지거든요. 아들이 자유롭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제가 자유를 많이 해쳐서 미안하고요.”

10시 30분께 시작한 인터뷰를 마치니 어느새 12시 40분이 돼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근처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다. 김경율은 리조토를 시켰다.

“원래 면을 좋아하는데 건강 생각해서 일부러 밥을 먹어요.”

먹는 것도 ‘전투적’이다. 속도가 빨랐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곤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했다. “2시에 인천 청라에서 ‘결정적 제보자’와 만나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만나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다고 했어요. 사회적으로 꽤나 큰 이슈가 될 것 같아요.”

김경율은 ‘송곳’이다. 참여연대든 경제민주주의21이든, 변절한 것이든 아니든,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날을 세운 채 찌를 곳을 찾는다. 부리나케 밥을 먹고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등 돌려 길을 갔다.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봤다. 앞만 보며 나아간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서두르는 그의 모습이 마치 돌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무언가를 들이받으려는 듯이.



신동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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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빠꾸 人生’ 김경율이 사는 법 “내 삶에 후회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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