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아직도 일본이 두려우냐고 묻고 싶다”

박훈의 전환시대 일본론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3-09-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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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 박정희·김대중 자신감 계승해야

    • 민족주의 버려야 민족이 산다

    •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 모자라서가 아니다

    • 1세기 전 ‘촛불시위’ 만민공동회 실패의 교훈

    • 정율성·홍범도·이승만… 역사전쟁 계속된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박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 연구 분야는 메이지유신을 비롯한 일본의 정치 변혁과 문화, 일본인의 대외 인식 등이다. [박해윤 기자]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박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 연구 분야는 메이지유신을 비롯한 일본의 정치 변혁과 문화, 일본인의 대외 인식 등이다. [박해윤 기자]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1965년 6월 2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결과에 대한 국민 담화문 중 일부다. 일본을 향해서는 “정무 조인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침통한 표정과 착잡한 심정으로 과거의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이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남겼다.

    그로부터 33년 뒤인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함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채택한 뒤 일본 의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한일관계 ‘헌법’이 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 지배 35년간입니다. 이렇게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이는 그 장구한 교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두 나라의 선조들에게, 그리고 장래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지탄받을 일이지 않겠습니까.”

    당시 공동선언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문구도 포함돼 있었다.



    2023년 3월 일제에 의한 강제 징용 배상 해법과 12년 만의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한 윤석열 대통령은 59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담화문과 2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의회 연설을 언급하며, 두 전직 대통령이 한국 사회의 강한 반발에도 일본과의 협력을 추진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3·1절 기념사를 쓰고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과 취지가 흡사해 나도 놀랐다”고도 했다.

    3년 전 ‘한일관계, 1998년처럼’(동아일보 2020년 11월 19일자)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한일관계의 ‘헌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일본근대사 전공)가 최근 ‘위험한 일본책’(어크로스)을 펴냈다. 그는 이번 책에서 “한국의 일본 비판은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 뼈 때리는 비판이 돼야 한다”며 “이제 식민지도 후진국도 아닌 한국은 반일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 법치와 인권, 평화와 복지의 담론으로 좋은 아시아를 만드는 데 선도국가가 돼야 한다”고 했다. 9월 4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박훈 교수를 만났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담화문과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했다.

    “둘 다 자신감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제2의 을사조약이 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으니 한번 해보자’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33년 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는 경제와 민주주의에서 괄목한 성장을 이룬 자신감이 더욱 드러난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 크게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전후 일본이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니 이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지금보다 국력이 훨씬 약했던 25년 전에 이런 ‘커뮤니케’를 이뤄낸 것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가. 전후 일본은 전쟁을 안 하고도 강대국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한국은 지난 80년간 제국주의를 하지 않아도 선진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엄청난 성취를 이룬 두 나라가 나아갈 바를 일찍이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두 지도자가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을 계승했다고 하는 민주당이 대일 정책에서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고 있다. 보수에겐 박정희 담화문을, 박정희가 싫다는 사람들에겐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문’의 일독을 권한다.”

    반일 민족주의는 왜 위험한가

    욕먹을 각오로 “이제 민족주의는 그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뭔가.

    “‘위험한 일본책’에서 ‘예전의 민족주의가 한국인들을 단결시키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면, 지금은 우리를 배타적·폐쇄적으로 만들고, 과학과 학문이 제시하는 곳과는 다른 길로 오도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민족주의, 민족주의자는 긍정적 의미가 크지만 영어로 내셔널리즘은 국수주의에 가깝다. 결코 긍정적 의미가 아니다. 세계주의와 공존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민족을 망치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대표적 사례가 주체사상의 나라 북한이다. 지구상에서 북한만큼 민족주의적인 나라도 없지 않나. 북한식 맹목적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들을 괴롭히고 세계적 흐름에서 뒤처진 국가로 전락하게 만든다. 일본도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천황을 숭배하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2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군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과 중국을 적으로 돌리고 미국과 영국에 도전했다가 나라가 망할 뻔했다. 민족주의를 버려야 민족이 산다.”

    광복한 지 80년이 돼가지만 ‘반일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민족주의가 일치단결하는 지점이 ‘반일’이다. 자존심 강한 한국인이 남쪽 왜구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크다 보니 설령 그 주장이 과장, 왜곡, 심지어 은폐·날조됐더라도 눈감아 준다. ‘반일무죄(反日無罪)’론인데 이런 식의 일본 악마화는 국내에선 박수를 받겠지만 국제 무대에선 웃음거리다. 그럼에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반일 비즈니스’가 횡행하고 있다. 일본 비판은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 뼈 때리는 비판이 돼야 한다. 그래야 세계인도, 일본인도 납득하고 존중한다.”

    식민 지배,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하면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일본이) 무릎 꿇어라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발언이 논란이 됐다. 더는 일본의 사과가 필요 없다는 뜻인가.

    “식민지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이니 더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이다. 전 세계에서 식민 통치에 대해 사과한 나라가 없다. 사과를 했다 해도 식민 통치 과정에서 이루어진 학살 등에 대한 것이지 통치 그 자체가 아니다. 왜 그럴까. 전 세계 열강이 식민 지배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문제는 국제사회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과를 했다. 반성 뒤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망언이 튀어나오는 건 유감스럽지만 어쨌든 여러 차례 사과했다. 한국은 식민 종주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그걸 외교문제로 삼는 ‘센’ 나라다. 하지만 언제까지 ‘가해자-피해자’ 프레임으로 사과만 요구할 것인가. 최근 한일 대학생들의 토론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한국 측 학생이 역사 문제를 한일 양국의 틀에 가두지 않고 제국주의 시대를 같이 겪은 전 인류의 반성 소재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한 공동 투쟁을 촉구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좋은 전략이다. 한일 간의 문제가 죽창가나 보이콧, 혐한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명백한 이상 우리는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다른 나라가 다 일본을 무시해도 우리는 무시하면 안 되고, 다른 나라가 다 일본을 경계하지 않아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일본한테 또 당하지 않으려면 일본을 알아야 하고 북한, 중국에 대응하려면 일본과 협력해야하기 때문이다. 지난 정부에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을 때 신문사로부터 ‘해결 방식’에 대한 문의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한일관계의 교착은 ‘해결 방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해결할 의지’가 없어서다. 양쪽 정부 모두 교착상태가 지지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마이너스는 아니라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일본은 더는 선진국이 아니라는 인식마저 확산됐다. 큰코다칠 일이다. 나는 우리가 일본을 너무 일찍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안하다.”

    1870년대생들이 꿈꿨던 근대국가

    박 교수는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되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1910년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본을 증오하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넘쳐흘렀고, 일본을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사방에 빽빽했다. 모자랐던 것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40여 년간 일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게 우리의 운명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 교수는 1898년을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으로 본다. 1894년 일본이 주도한 갑오정부의 개혁 정책이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고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벌어지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독립협회에 집결한 개화파들이 외세를 밀어내기 위해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초유의 대중집회를 조직했다. 서울시민의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한 1차 만민공동회다. 만민공동회에는 개화파 지식인뿐만 아니라 이들과 가까웠던 정부 인사들, 천대받던 상인들과 백정까지 함께했다.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는 기존의 중추원을 개편해 11월 5일 의회를 설립한다는 ‘중추원 신관제(新官制)’ 설립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의회 개원 전날 밤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의회 설립을 취소해 버렸다. 이때부터 12월 23일까지 독립협회 복구와 의회 재설립을 요구하는 한국사상 최장기간의 철야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고종은 2000명의 보부상과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개화파 지도자 430여 명을 일제히 검거했다.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젊은 활동가들을 한국사에서 처음 출현한 근대인으로 보는 이유는 뭔가.

    “훗날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인물들이 1870년대에 대거 태어났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유창한 영어 연설로 한국 독립을 설파하고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이승만(1875년생),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쾌재정의 연설’로 청중을 격동시킨 안창호(1878년생), 만민공동회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개화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김구(1876년생), 황해도 개화파 집안의 장남으로 ‘민권과 자유’를 외치던 안중근(1879년)이 그들이다. 이 명민한 젊은이들은 한문 교육을 받았지만 과거시험과는 무관하고, 새로운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잠재력이 폭발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근대와 자주라는 시대적 방향을 제대로 체현한 세대이기도 하다. 만민공동회는 1세기 전 촛불시위였다. 이들은 책상에 앉아서 배운 게 아니라 시위하면서 연설을 배우고, 민중을 조직하는 법을 배우고, 정부와 싸우는 법을 배웠다.”

    조선판 유신의 실패와 이승만 재평가

    1898년이 한국 근대화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만약 고종이 이들의 개혁을 받아들였다면 ‘조선판 유신’이 됐을 것이다. 지금처럼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구도가 훨씬 더 빨리 만들어졌을 것이고,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전략적 오판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1910년이면 1870년대생 선두 주자인 이승만이 30대 중반이다. 이들이 중심이 돼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현실에선 1898년의 좌절 이후 이승만은 투옥됐고, 안창호는 미국으로, 김구는 절로 떠났다. 만약 1898년 겨울 예정대로 의회가 설치됐더라면 을사보호조약도, 한일강제병합도 간단히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 등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4·19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건립 반대 운동도 만만치 않다.

    “한국인에게 이승만이란 존재는 ‘가장 유명하나 완전히 잊힌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초대 대통령이라는 것과 부정선거로 하야했다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별로 없을 것이다. 만민공동회 사건 이후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5년 7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나 역시도 이승만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넉 달 전에 쓴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원제 Japan Inside Out)’를 읽기 전까지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국제정치적 안목을 가진 정치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일본이 자유와 민주, 인권과 평화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기에 ‘반일’을 하는 것이지 일본이라서 증오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가 반일을 통해 추구하려 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였다.”

    어차피 치러야 할 역사전쟁이라면

    정율성 공원, 홍범도 흉상 논란 등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가 진영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어떤 인물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기억할 수는 있지만 지자체가 나서서 공적으로 기념하고 추앙하고 선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공원 건립은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중공군’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6·25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항미원조(抗米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원조한 전쟁이라는 뜻)’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홍범도의 공산주의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 당시는 좌든 우든 ‘반일’을 했고,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어쨌든 이런 논란이 끊이질 않는 것은 우리 역사가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정신적으론 사춘기다. 성인이라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6·25의 ‘네이밍’조차 없다. 북한은 ‘민족해방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한다. 우리는 전쟁의 정치적 성격과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그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만 한다. 그러니 ‘정율성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박훈 교수는 서양과 같은 종교전쟁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역사가 그걸 대신한다고 했다. 어차피 치러야 할 역사전쟁이라면 이참에 제대로 된 학술 토론이 벌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래야 우리 지폐에도 조선시대 인물이 아니라 근현대 인물이 등장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한 가지 더 논란이 될 제안도 덧붙였다.

    “우리나라 보수가 김대중을 비토할 게 아니고 김대중을 전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과 김대중은 정치적 비전, 사상, 철학에서 연결되는 인물이다. 둘 다 보수적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김대중을 보수 라인에 세우고 조봉암·노무현을 진보 라인에 세워 진영 경쟁을 하면 좋겠다.”

    [신동아 10월호 표지]

    [신동아 10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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