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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원조로 큰 제일제당, 삼성을 일으키다 [+영상]

[Special Report│미국, 손 놓을 수 없는 제국] 상업자본 → 산업자본 大韓民國 자본 변신史

  •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

    입력2023-09-2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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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경제 버팀목 제조업

    • 無자본 경제부흥 비결 = 美 원조

    • 호암 이병철 “수입에 생필품 의존할 수 없다”

    • 韓 경제사 변곡점, CJ제일제당

    • 三白사업으로 큰 삼성, 살아 있는 역사로 우뚝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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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3년간 혹독한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다. 해외 분석 기관이나 석학들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세계가 구분될 것이라는 주장을 잇달아 내놨다. 유라시아그룹(Eurasia Group)은 코로나19 사태를 세계화 1.0과 2.0시대를 나누는 ‘Chapter Break’로 규정했고, 맥킨지(McKinsey & Co.)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가 ‘Next Normal’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했다. 결국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면에서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국제 정세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온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선진국은 한 가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한국은 제조업이 제 역할을 해 경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세계는 제조업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국은 팬데믹 이후 빠르게 제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리쇼어링(Reshoring·제조업의 본국 회귀)을 독려하고 있다.

    제조업이 낳은 ‘한강의 기적’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7.8%다. 한국과 유사한 경제 구조를 가진 독일(21.6%), 일본(20.8%)보다도 더 높은 수치다. 한국이 제조업 강국이 된 것과 한국 경제에서 여전히 제조업 비중이 높다는 것은 매우 큰 행운이다. 비록 한국 경제 성장세가 둔화됐다곤 하지만 성장을 꾸준히 지속해 온 것은 제조업 덕분이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성장 기적(growth miracle)’은 제조업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을 대폭 향상할 수 있음을 보인 대표 사례로 여겨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을 포함한 수많은 국가가 빈곤한 상황이었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이들 가운데 왜 어떤 나라는 잘살고, 어떤 나라는 못살게 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자본축적을 제대로 했는지, 기술 발전이 일어났는지 등을 따졌다. 더 근본적으론 민족성, 법과 제도, 정치 부패, 민주주의 체제, 지리적 조건 등 각 국가가 가진 고유 특성을 탐구했다.



    1987년 노벨 경제학상은 받은 로버트 솔로(Robert Solow)는 1956년 논문 ‘경제성장 이론에 대한 기여(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Economic Growth)’를 통해 미국이 겪어온 경제성장 과정을 이론화했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미국의 성공 경험을 들어 ‘자본축적(Capital Accumul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1인당 자본량은 꾸준하게 증가해 왔으며 이에 맞춰 1인당 생산량도 늘어났다. 이에 솔로는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면 자본축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자본이란 ‘물적 자본(physical capital)’을 의미한다. 자본축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투자(investment)’와 ‘저축(saving)’이다. 투자란 기계·생산설비 등 신규 자본재를 만들거나 구매함을 뜻하며, 저축은 생필품 소비를 덜해 자본재 생산에 더 많은 자원을 배치함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저축이 늘어날수록 투자량도 비례해 자본축적이 이뤄지는 것이다.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자본축적을 늘릴수록 경제가 성장한다’와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기술진보율이 지속 성장을 만들어낸다’다.

    한국에 이 이론을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 모습엔 맞아도 광복 직후 상태엔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막 지난 한국의 자본 수준은 자본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미약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토착 자본가가 소수 등장했지만 이마저 광복 이후로 이어질 만큼 축적된 수준까진 아니었다. 그나마 광복 이후 경제성장을 견인할 수 있던 자본은 패전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산업체와 미국의 원조였다.

    광복 직후 귀속업체는 총 822개로 한국 공장 수 전체의 21.6%, 종업원 수의 59.9%를 점하고 있었고, 이는 주요 기간산업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을 통해 전통 지주들의 재등장을 봉쇄했다. 3정보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면서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기업 자산과 외국의 원조물자와 같은 중요 자원을 민간 부문으로 할당했다. 이러한 자원을 정부가 분배하면서 수입 허가와 저금리 금융 등 기회도 제공했다. 1947년부터 미(美)군정에 의해 민간에게 불하되기 시작한 귀속재산은 1950년부턴 한국 정부에 의해서 불하되다가 1958년에 종결됐다.

    1945~1962 美 원조액 = 韓 총수입 73%

    귀속재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사정가격은 실제 가격보다 훨씬 낮았다. 불하 가격은 사정가격보다도 저렴했다. 지불 방법으로 장기 분할상환을 허용했다. 처음엔 귀속 자산 총액의 10%만 지불하고 15년 안에 잔액을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그 결과 물가 상승이 격심하던 당시 주요 산업 대부분이 무상에 가까운 염가로 특정인에게 불하됐다. 이후 45~50년간 물가가 약 600% 올랐으니 이러한 조건은 특혜였다.

    관권과의 결탁과 함께 불하·융자에 의한 관료 독점자본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귀속 은행의 불하 과정에서도 은행 주식 인수자가 관권과의 유착 정도로 결정됨으로써 독점적 소수에게 자본이 불하됐다. 관료자본은 귀속재산 불하로 물적 기초를 확보했고, 이에 대한 원조 물자 제공은 질적·양적으로 1950년대 관료자본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은 패전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산업체마저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많은 대기업의 초기 공장이 낙동강 이남인 부산, 대구에 생긴 이유다. 1950년대 초 전쟁의 악몽에서 갓 벗어난 한국은 경제를 해외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미국의 경제원조와 융자에 의존했다. 이 무렵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건 ‘삼백(三白)산업’이다. 원조 대부분이 밀가루·설탕·면화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 인천부두에 미국산 밀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미국의 원조와 융자에 경제를 의존했다. 미국의 원조 물품은 대개 밀가루·설탕·면화에 집중됐다. [동아DB]

    1950년대 초 인천부두에 미국산 밀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미국의 원조와 융자에 경제를 의존했다. 미국의 원조 물품은 대개 밀가루·설탕·면화에 집중됐다. [동아DB]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1945년 9월 미군에 의한 ‘점령지역 행정구호계획(GARIOA)’으로 출발했다. 이는 미군정이 한국 경제 인플레이션 억제 및 긴급구호를 위해 결정한 것이다. 원조 총액은 4억900만 달러다. 6·25전쟁으로 중단됐다가 휴전 이후 본격적 원조가 이뤄졌다. 또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무상으로 원조했다. 무상 원조 이유는 미국에서 남아도는 농산물을 소진해 자국 농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컸다.

    ‘한미 합동경제위원회’도 만들어 한국 정부가 원조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권한을 쥐었다. 그 결과 한국의 원조 물자 판매 대금 상당 부분을 미국산 무기 구입에 사용하도록 했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62년까지 한국에 제공된 원조 규모는 총 31억 달러다. 매년 평균 원조액은 연평균 국민총생산(GNP)의 12%, 연평균 총수입의 73%를 차지하는 막대한 수준이었다.

    現 삼성 모태 제일제당의 시작

    1951년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으로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한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도 이내 제조업 진출을 고민했다. 그는 회고록 ‘호암자전’에 “국민들이 매일 사용하는 제품을 수입에만 의존하면 국가 경제 자립과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 제조업을 통한 국내 산업이 확산돼야 한다. 국산품 제조를 통해 가격은 저렴하고 품질이 좋은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제조업이 설립되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기술 축적으로 경제와 산업 활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썼다.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미국이 한국에 대량의 원당을 원조하는 것을 고려해 제당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아DB]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미국이 한국에 대량의 원당을 원조하는 것을 고려해 제당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아DB]

    호암은 6·25전쟁이 끝난 후 어떤 물건을 생산할지 정하고자 제조업 실태에 관해 사전 조사에 들어갔다. 제지·제약·제당 분야가 주요 검토 대상이었고, 이는 곧 종이·페니실린·설탕 제조로 귀결됐다.

    호암은 일본 미쓰이물산에 설탕·페니실린·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 건설 비용과 설비 비용을 산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 종류 가운데 페니실린이 가장 유망해 보이는 사업이었으나 기술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종이 역시 그러했다. 결국 호암은 국민이 매일 먹어야 해 당장 시급한, 식품에 비중을 둬 설탕을 택했다.

    당시 원당(原糖)이 미국의 원조 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던 점도 호암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설탕은 원당이란 액체를 가공해 생산한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지 않았다. 원당이 원조 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는 데다 종이와 페니실린보다 더 단기간에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수요가 나날이 느는데, 설탕 공장은 한 군데도 없었다.

    1953년 4월 호암은 부산대교 옆에 있는 삼성물산 사무실 한쪽에 제당회사 설립을 위한 사무소를 설치했다. 공장 설립 자금 18만 달러를 정부 협조로 특별 대부받고 상공은행으로부터 2000만 환을 대출받았다. 부산 전포동에 부지를 확보하고 제당설비 일체를 일본에 발주해 1953년 8월 1일 현 CJ제일제당의 모태 ‘제일제당 공업주식회사(제일제당)’를 설립했다. 한국에 최초로 설립된 생산 공장이다. 공장이 완성되고 순백의 정제당이 쏟아져 나온 날이 1953년 11월 5일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날을 제일제당 창립기념일로 제정했다.

    1953년 부산 전포동에 설립된 제일제당 부산공장 전경(왼쪽). 1953년 제일제당이 최초 생산한 설탕. [삼성, 동아DB]

    1953년 부산 전포동에 설립된 제일제당 부산공장 전경(왼쪽). 1953년 제일제당이 최초 생산한 설탕. [삼성, 동아DB]

    제일제당은 삼성이 근대 생산 기업으로 면모를 갖춰가는 데 첫걸음이자 상업 위주로 시작한 기업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한국 경제사의 주요한 변곡점이기도 하다. 제일제당이 생기기 전까지 한국은 설탕을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제일제당의 설탕은 만들어지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 시기를 삼백경기 혹은 삼백산업의 활황기라고 한다.

    이 무렵 수입산 설탕 가격이 1근당 300환인 반면 제일제당 제품은 100환이었다. 비록 품질 면에선 외제에 못 미친다 해도 가격이 매우 저렴한 데다 수요가 격증하는 추세여서 제일제당은 생산 개시 6개월 만에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이내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할 만큼 급성장해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시현했다. 1955년에는 설립 시 2000만 환이던 자본금이 20억 환으로 증가하는 등 삼성의 주력 기업으로 부상했다.

    1958년 이후 제당 시장은 공급과잉 상태에 이르게 된다. 정부의 수입대체공업 육성정책으로 1954년 동양제당·한국제당, 1955년 삼양사, 1956년 금성제당·해태제과·대동제당 등 여러 기업이 설탕 제조 공장을 설립한 결과다.

    제일제당은 생산품 다양화에 착수한다. 1956년 4월에는 동성물산으로부터 포항 구룡포의 통조림 공장을 인수했다. 1957년 10월엔 제분공장을 건설해 제분업을 겸영했다. 당시 제분업 역시 호황 상태였다. 즉 삼성은 제당·제분업으로 현재 그룹의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무역회사 삼성물산으로 시작한 삼성은 제일제당을 통해 제조회사로 변신함과 더불어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후 삼성은 1960년대 금융, 1970년대 중화학, 1980년대 전자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한국 경제의 산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투자하는 나라로

    삼성의 경우로 살펴봤듯 과거 미국의 원조 자본이 없었다면 축적 자본이 없던 한국이 지금과 같은 제조업 강국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 미국 원조 후 약 70년이 지난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4대 대기업이 미국에 44조 원 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세 번이나 “땡큐”라고 외치며 감사를 표했다.

    2021년 5월 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웃으며 자리로 향하고 있다. 이날 삼성·SK·현대차·LG 한국 4대 기업은 미국에 44조 원 투자를 약속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감사를 표했다. [뉴스1]

    2021년 5월 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웃으며 자리로 향하고 있다. 이날 삼성·SK·현대차·LG 한국 4대 기업은 미국에 44조 원 투자를 약속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감사를 표했다. [뉴스1]

    물론 한국 기업의 투자 이유는 미국이 중국과 빚은 마찰로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데 목이 마를 때 발 빠르게 미국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지만 격세지감이다. 미국의 원조로 제조업을 시작한 한국이 이젠 스스로의 제조업 기술로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성장 둔화 현상을 겪고 있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이에 앞으로 한국 경제가 선진화하기 위해선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들도 여전히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국도 제조업 경쟁력을 지켜나가는 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과 함께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영상] “미군이 돕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못 살아요”



    [신동아 10월호 표지 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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