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노포 간판 서체 따라 만든 글꼴 ‘을지로체’

[명작의 비밀] 사라져가는 을지로 감성, 글꼴에 담아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학부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3-10-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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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힙’해졌지만 낭만 잃어가는 서울 을지로

    • 간판장이 우직한 힘 간직한 을지로체

    • 시대의 서사 담긴 글꼴 통해 기억하다

    옛 골목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 중구 을지로가 꾸준히 인기다.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은 을지로를 ‘힙지로’라 부른다. ‘힙(Hip)’하고 ‘핫(Hot)’하다는 의미다. 을지로가 힙지로로 자리 잡아가던 2019년, 배달 플래폼 업체 배달의민족은 ‘을지로체’라는 한글 글꼴을 개발해 공개했다. 익숙한 듯 조금은 낯설고, 낯설면서 또 어딘가 친숙한 레트로(Retro) 분위기가 풍겼다. 보면 볼수록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 독특한 을지로체는 을지로와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을지로’라는 거리 이름은 1946년에 생겼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서울시청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일대까지 이어지는 을지로에서 가장 힙하고 핫한 곳은 을지로3가다. 을지로3가의 중심은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을지로3가역 주변. 을지로3가역에서 동서축을 중심으로 을지로3가가 펼쳐진다. 을지로3가역 근처엔 유명한 노포가 많다. 양미옥과 을지면옥이 문을 닫았지만 조선옥, 안동장 등 여전히 건재한 노포도 적지 않다.

    지난해 6월 재개발로 사라진 을지면옥 간판(위). 을지로 인쇄거리. [동아DB]

    지난해 6월 재개발로 사라진 을지면옥 간판(위). 을지로 인쇄거리. [동아DB]

    인쇄거리 쇠퇴 = 뉴트로(Newtro) 마중물

    과거 을지로는 영화의 거리였다. 남쪽 충무로로 향하면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이 있었고, 북쪽으로 청계천을 지나면 서울극장이 나왔고 종로를 지나면 단성사와 피카디리로 연결됐다. 물론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이뿐 아니라 인쇄소, 공구상과 철물상, 조명 가게, 타일 가게 등이 여전히 영업 중이고 골뱅이 골목과 노가리 골목도 성업 중이다.

    을지로3가를 밀도 있게 만나려면 인쇄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쇄 골목이 을지로3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현동 인쇄 골목, 충무로 인쇄 골목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서 인쇄업은 1910년대 시작됐다. 경성고등연예관, 경성극장, 중앙관 등의 영화관이 을지로에 등장하면서 홍보 전단지를 찍기 위한 인쇄소가 생겨났다.

    6·25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엔 인쇄업이 충무로로 확산되며 인쇄 골목의 꼴을 갖췄다. 1980년대, 근처 장교동의 인쇄업체 500여 곳이 옮겨오면서 인쇄업은 성황을 이뤘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인쇄 골목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인쇄 골목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인쇄업은 조금씩 내리막길로 들어섰기 때문. 이곳의 인쇄업체들이 하나둘 떠났다. 그 와중인 2017~2018년 무렵부터 인쇄업체가 떠난 빈자리에 젊고 핫한 카페와 술집, 고깃집과 식당이 들어섰다. 이는 낡고 좁은 인쇄 골목에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계기가 됐다. 이른바 새로운 레트로, 뉴트로(Newtro)의 열풍이었다. 1970~1980년대 분위기의 인쇄 골목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힙지로란 별명을 얻었다. 을지로는 수십 년 전의 과거(1970~1980년대)와 현재가 만나는 곳. 서울의 대표적 뉴트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사라져버린 노가리 골목

    을지로3가는 기본적으로 낡고 오래됐다. 그렇다 보니 사라지는 것도 적지 않다. 을지면옥, 양미옥 등 오랜 세월 서울시민과 애환을 함께했던 노포들이 대표적이다. 양미옥은 2021년 화재로 인해, 을지면옥은 2022년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 을지면옥과 함께 있던 을지다방은 을지로3가 지하철역 바로 옆 인쇄 골목 초입으로 옮겨 영업을 하고 있다.

    2000년대 전후, 을지로3가 하면 노가리 골목이었다. 노가리 골목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곳에서는 생맥주와 노가리를 파는 가게가 몰려 있다. 그 원조는 1980년 영업을 시작한 ‘을지OB베어’였다. 이 집의 노가리와 맥주가 인기를 끌자 주변에 노가리 호프집이 늘어나면서 1990년대 노가리 골목이란 이름을 얻었다. 숨겨진 명소였던 이곳은 2000~2010년대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면서 낭만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15년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최근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만선호프 계열 가게들이 지배하고 있다. [동아DB]

    최근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만선호프 계열 가게들이 지배하고 있다. [동아DB]

    그러나 한 호프집의 탐욕으로 노가리 골목은 완전히 망가졌다. 만선호프라는 대형 호프집은 2010년대 중반부터 노가리 골목의 호프집 10여 곳을 접수해 기존 간판을 내리고 모두 만선호프 간판을 내걸었다. 급기야 2022년엔 원조인 을지OB베어까지 접수해 버렸다. 이 작은 골목엔 만선호프 간판이 20개가 넘는다.

    을지OB베어 폐업을 막으려는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해 7월 6일 서울 중구청 앞에서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OB베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을지OB베어 폐업을 막으려는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해 7월 6일 서울 중구청 앞에서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OB베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노가리 골목은 이렇게 ‘만선호프 골목’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찾지만 노가리 골목의 취지와 공공성은 파괴됐다. 최근엔 재개발 사업으로 골목 한쪽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가건물이 들어섰다. 외관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노가리 골목은 예전의 분위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근처의 인도에 박혀 있는 ‘서울 미래유산 노가리 골목’ 명패가 무색할 따름이다.

    대격변 겪는 을지로

    을지로는 과거와 현대가 만나고,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곳이다. 무너져가는 낡고 허름한 인쇄 골목에 해가 지면 젊은이들이 몰린다. 을지로의 밤은 술과 음식,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인쇄업소는 불을 밝히고 인쇄 기계를 돌린다. 반면에 이름만 인쇄업소인 곳도 적잖다. 외벽에는 분명 인쇄업 간판이 걸려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술집이나 고깃집인 곳도 있다. 이 묘한 공존, 묘한 역동성! 이를 두고 누군가는 조화와 소통이라고 한다.

    한편 불안한 공존도 눈에 띈다. 을지로 곳곳에서는 재개발이 한창이다. 고층 빌딩이 하나둘 올라가면서 인쇄 골목, 철물과 공구 골목, 노가리 골목과 골뱅이 골목을 서서히 에워싸는 형국이다. 이제 저 골목들은 머지않아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재개발뿐만 아니라 천박한 탐욕도 문제다. 노가리 골목이 호프집 한 곳에 의에 저렇게 처참히 망가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차라리 재개발로 호프집들이 철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한 호프집의 탐욕에 의해 망가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것이 을지로3가다. 역동적이고 힙하고 핫하며 장년·노년층과 함께 젊은 층도 드나드는 세대 통합의 장이지만 탐욕과 갈등도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을지로3가의 저 특징과 의미와 추억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을지로3가의 독특한 의미와 매력을 어떻게, 무엇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필자는 지금의 을지로를 기억하려는 시도 중 하나가 을지로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을지로체를 비롯해 옛날 글씨체를 재해석한 글꼴이 늘어나고 인기도 얻고 있다. 격동명조체, 한나체, 도현체, 장미다방체, 옛날목욕탕체, 응답하라체, 태극당체 등의 글꼴도 인기를 얻고 있다.

    옛날 글씨체를 이용해 글꼴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은 최근의 레트로, 뉴트로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서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1970~1980년대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약간 촌스럽고 거칠지만 정겨움과 인간미가 넘친다. 어찌 보면 날것의 편안함이라고 할까.

    태극당체는 좀 특이하다. 서울 중구 장충동에 가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이 있다. 참고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은 1945년 문을 연 군산의 이성당이다. 태극당은 1946년 서울 명동에서 문을 열어 197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태극당은 건물 외관과 내부 모두 1970~198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매우 드문 경우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제품에 사용했던 글씨를 한글 글꼴로 발전시켜 제품 포장과 홍보에 사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을지로 서사 담긴 붓글씨체

    배달 중개 플랫폼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이 2019년 10월에 연 ‘을지로체: 도시와 글자’ 전시회. [우아한형제들]

    배달 중개 플랫폼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이 2019년 10월에 연 ‘을지로체: 도시와 글자’ 전시회. [우아한형제들]

    을지로체는 배달 전문 플랫폼 배달의민족이 2019년 개발했다. 요즘 옛 글씨체를 기반으로 개발한 글꼴이 많지만 을지로체는 그중에서도 여러모로 두드러진다. 우선, 글꼴 이름에 을지로라는 지명(地名)을 넣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을지로체는 이름뿐만 아니라 글자의 형태도 은근히 특징적이다. 궁서체도 아니고 명조체도 아닌, 이전에 보지 못했던 둔탁하고 묵직한 글씨체다. 그 분위기가 낯선 듯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하다.

    을지로체는 1970~1980년대 을지로 일대 골목 간판에서 성행했던 페인트 붓글씨체를 기본으로 삼았다. 을지면옥의 건물 입구에 걸려 있던 간판 글씨가 바로 을지로체의 뿌리다. 이런 간판 페인트 글씨를 모티프로 삼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을지로체 2350자를 만든 것이다. 물론 을지로에서 사용된 간판의 페인트 글씨체와 획의 비율이나 각도 등이 조금씩은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간판 페인트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지금도 을지로3가 뒷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간판이 눈에 많이 띈다. 그 사이사이로 이따금 을지로체가 보인다. 철거 중인 철물 골목과 공구 골목에서도 을지로체를 만난다. 을지로3가 대로변 어느 식당의 간판에서도 을지로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저런 모양의 간판 글씨체가 어디 을지로뿐이랴. 1970~1980년대엔 전국 곳곳에서 을지로체가 성행했다. 지금도 오래된 기차역 근처에서, 재래시장 언저리에서 을지로체를 만날 수 있다. 을지로체는 전국구 글씨체인 셈이다. 을지로체 개발 당시 배달의민족 관계자는 “을지로의 오래된 건물에 붙은 간판 글자를 보면서 수십 년 동안 간판과 함께 이곳을 지켜온 분들의 생존의 힘이 무엇일지 궁금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을지로체의 매력이다.

    을지로체에는 현장이 녹아 있고 시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을지로체엔 을지로의 일상과 애환, 다채로운 삶의 풍경이 하나둘 꿈틀거린다. 그건 을지로의 어제와 오늘이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특히 1970~1980년대 을지로의 분위기가 절묘하게 담겨 있는 것이다. 옛날 페인트 간판 글씨가 을지로에 국한된 것이 아니듯, 을지로의 풍경과 애환은 을지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을지로체는 을지로를 넘어 우리의 1970~1980년대를 상징한다. “을지로의 서사를 담아낸” 글씨체라고 할 수 있다.

    간판장이들의 숱한 경험에서 나온 페인트 글씨에는 우직한 힘이 넘친다. 적당한 촌스러움과 적당한 정겨움, 적당한 애환이 배어 있다. 간판장이들과 을지로 사람들의 경륜과 노련함이 돋보인다. 날것이지만, 날것이어서 더 아름답다. 아울러 글씨체로 활용할 만큼 그 나름대로 질서정연한 규칙도 있다.

    을지로3가 곳곳엔, 특히 인쇄 골목엔 흥미롭고 창의적이면서 레트로한 분위기의 글씨 간판이 많다. 모두 1970~1980년대를 즐기려는 레트로와 뉴트로 트렌드다. 그런데 그것들은 힘이 약하다. 특히 을지로체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무언가 뿌리가 없는 것 같다. 취약하고 일회적이라고 할까. 냉정하게 말하면 을지로의 역사와 삶이 결여된 글씨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눈길은 끌지만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그런 것. 아이디어만으로 만들어낸 것이 때문이다. 삶의 흔적이 결여돼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을지로체는 그렇지 않다. 실제 삶에서, 실제 을지로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을지로체의 힘이다.

    을지로3가는 여러모로 서울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우리네 일상사에서 더욱 그렇다. 을지로체는 을지로의 공공성과 상징성을 담아낸 글씨체다. 이 대목에서 을지로체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을지로 간판 글씨는 공공의 산물로, 어느 개인의 것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사용하던 글씨체를 특정 기업이 글꼴로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다.

    적절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선 좀 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개별 기업이 만든 을지로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결국엔 상업적인 것 아니냐는 견해다. 이러한 지적은 배달 중개업체 배달의민족에 대한 호오(好惡)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을지로체 개발은 탁월하고 절묘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모두 무관심했던 을지로 간판 글씨를 2350자의 글꼴로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 의미와 효과는 그저 옛 글씨체 하나를 개발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을지로를 기억하는 데 매우 상징적이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을지로를 기억하는 방식

    을지로3가에 고층 빌딩도 있지만 을지로3가는 아직 오래된 건물이 주를 이룬다. 인쇄 골목처럼 이면도로 쪽으로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1970~1980년대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젊은이들은 수십 년 전의 낯선 풍경을 즐긴다. 그렇게 을지로는 힙지로가 됐다. 인쇄 골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치미술 같기도 하고 영화세트장 같기도 하다. 을지로는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세대 소통적이다. 노포와 핫플, 옛날 음식과 요즘 음식, 카페와 다방 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본의 아니게(?) 한데 어울리면서 공존하고 있다.

    아쉽게도 재개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힙하면 힙할수록 재개발은 더 가까워진다. 재개발 공사로 인해 좁은 골목에선 이미 철거가 한창이고, 도로와 골목 곳곳엔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고층 빌딩은 인쇄 골목, 노가리 골목, 골뱅이 골목을 포위하면서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쓸쓸하다. 재개발이 진행될수록 그 공존과 조화와 소통은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을지면옥이 문을 닫고 나니 을지면옥 간판의 페인트 글씨가 더 정겨워졌다. 나는 이제 을지로체로 을지로를 기억한다. 아직 몇 개 남아 있는 페인트 간판 글씨를 보고 싶어 요즘 자주 을지로3가를 걷는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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