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오혜선 “지옥의 실상 알리는 게 나의 의미”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3-02-03 16: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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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치산 가문의 딸로 태어난 평양 금수저

    • 공주님 된 김여정, 공공연한 세습 인정

    • 태양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어

    • 아슬아슬 살얼음판 걷는 노예의 삶



    1월 31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오혜선 씨. [지호영 기자]

    1월 31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오혜선 씨. [지호영 기자]

    “2016년 7월 어느 날, 늦은 아침 우리 가족은 조용히 대사관 정문을 나섰다. 한여름이었지만 런던 날씨는 선선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긴장한 마음을 식혀주었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 조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에게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혜선(56) 씨는 7년 전 당시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이던 남편 태영호(61) 국회의원과 두 아들 주혁·금혁까지 네 가족이 ‘탈북’을 결심하고 대사관 문을 나서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날 대사관을 나서면서 “내 일생을 바쳐온 북한 체제와 영원히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떠나자고 오십 평생을 살아왔는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애통해하던 남편은 현재 국민의힘 강남구갑 국회의원이다.

    한국에 온 뒤 조용히 태영호의 아내로 살아온 오혜선 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썼다. 오 씨는 북한에서도 핵심계층으로 꼽히는 ‘항일 빨치산 가문’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 오봉삼은 독립운동가였고, 그의 여섯 아들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둘째였던 할아버지 오도현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상을 떴지만, 셋째 오백룡(본명 오수현)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속해 참전했고 해방 후 북한 내무성 부상, 김일성 호위총국장, 조선노동당 중앙위 군사부장을 지냈다. 아버지(오기수)는 정찰국 정치부장, 판문점 북측 부대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정치 부총장, 김일성정치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다.

    어머니(김상숙)와 김일성 일가의 인연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신의주의과대학 재학 중 김일성과 그 일가의 호위를 맡은 호위총국의 검식준의로 선발됐다. 검식준의는 김일성 일가의 식사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군관으로 모든 음식을 미리 먹어보고 검수하는 조선시대 수라간 기미상궁 같은 역할을 했다. 김 씨는 제대 후 당시 호위총국장이었던 오백룡의 소개로 그의 조카와 결혼했다.



    ‘토대’를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출발부터 남달랐던 혜선 씨는 평양외국어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을 나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 중 외무성에서 일하는 남편 태영호를 소개받았다. 남편은 평양외국어학원 선배이기도 했다. 첫 선을 보기 전 남편은 “처자의 가정환경이 너무 요란하다”며 내키지 않아 했으나 두 사람을 모두 가르쳤던 은사가 “백년가약을 맺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자 마음을 바꿔 선을 보러 나갔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외교관 가족으로 덴마크, 스웨덴, 영국과 평양을 오가며 살았다.

    “우리의 선택은 배신이 아니라 자유”

    “북한에서 특권을 누리며 행운아로 살아온 내가 어떻게 감히 북한을 배신할 수 있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북한에는 김 씨 일가를 제외한 ‘특권’의 향유자는 없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어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건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오 씨가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쓴 이유다. 오 씨는 해외 생활을 하면서 북한 사회의 불의와 김 씨 일가의 죄상에 대해 알게 됐지만 북한 정권을 굳게 믿고 있을 형제들에게 차마 그 실상을 알려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 2019년부터 조금씩 회고록을 써왔지만 2020년 남편의 국회의원 출마로 잠시 접었다가 지난해 말 탈고했다. 한국에 온 후 일부 사람들이 남편을 향해 ‘배신자’니 ‘변절자’니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오 씨는 이렇게 말한다. “북한 김 씨 일가의 편에 선다면 ‘배신’이고, 북한 주민들의 편에 선다면 ‘자유’일 것이다.” 1월 31일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오혜선 씨를 만났다.

    -탈북을 결심한 뒤 왜 익숙한 유럽 국가가 아닌 한국으로 왔나.

    “처음에 나는 영국에 남고 싶었다. 영국에는 전 세계에서 온 이주민이 많다. 이주민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아니었다. ‘내가 반생을 사랑하고 지켰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데 나는 억울하다. 나는 북한 사람들과 통일을 위해서 살겠다. 그러려면 한국으로 가야 한다. 다른 데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남편의 선택을 따랐다.”

    -평생 북한 체제에 충성한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2008년 사망) 둘째 딸의 탈북 결심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을까.

    “한국에 도착한 지 몇 달 지난 2016년 겨울 중국 봉황TV에 나오는 어머니를 뵌 적이 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너는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남조선에 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렇게 미련한 결심을 했느냐며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너를 총으로 쏴 죽였을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또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셨을까 싶어 괴로웠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정말 나를 쏴죽였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다.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충성을 바친 북한은 지금 어떤가. 인권이 없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가난한 북한이 정말 우리 아버지가 꿈꿨던 세상일까. 아버지가 (딸의 탈북 결심을) 아셨다면 ‘빨리 가라’ ‘너희들이라도 가서 자식들에게 꿈을 주라’고 하셨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오 씨는 잠시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끝내 ‘자유’를 선택한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오백룡 가문’도 두려워한 노예사회

    -평양에서 어머니가 TV 속 김여정을 보고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 이유는 뭔가.

    “어머니도 배운 분인데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하더라. 세습을 인정한 것이다. 북한에서 김 씨 일가는 창시자고, 북한의 태양이고, 북한의 신이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말한다. 세습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이처럼 버젓이 강조한다.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어서 나만 놀랐을 뿐이다. 북한 사회는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을 체질화한다. 모든 교육과 모든 활동과 개별적인 생활조차도 충실성을 근거해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뇌가 된다. 한국에 와서 보니 참 어리석구나, 온전한 정신으로 어떻게 저런 사회에서 살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2018년 8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 축구대회’ 때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온 형부(주영길 당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빨치산 출신 주도일의 둘째 아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

    “한국에 도착한 후 가족의 생사를 알 길 없어 늘 마음을 졸였는데 건재한 아저씨(북한에서는 형부를 아저씨라고 부른다)를 보니 다소 안도했다. 한편으로 우리 가족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면서 아저씨를 파견한 북한의 의도가 궁금했다. ‘너희들 가만있어라’라는 경고 같기도 했다. 행여 아저씨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참았다. 판문점을 통과해 한국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을 하는 아저씨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얼굴이라도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갔다. 남들 시선을 피해 망원경으로 아저씨의 얼굴을 봤다. 나는 한국에 온 아저씨에게 밥 한 끼 챙겨줄 수 없는데, 주위에서 열심히 식음료를 대접하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고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북한과 김정은을 찬양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연설문과 축하문이 낭독되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김 씨 일가에 대한 찬양을 한국에서 버젓이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저게 바로 북한에서의 내 모습이었지’라는 생각에 부끄럽더라. 북한의 엘리트로 살아온 나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서열 2위’ 아들과 결혼한 친구의 비극

    -북한 체제에 순응했다면 지금도 특권층의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나도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영원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나는 권력의 무서움을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친구들. 그때는 그들의 비극적 운명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한편으로 내 부모님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북한에서 서열 2위라고 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며느리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친구가 이혼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어떤 이는 그 친구가 통제구역에 끌려갔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간첩으로 총살됐다고도 했다. 언젠가부터 형제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싫어졌다. 북한에서는 ‘태양의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오 씨의 인터뷰에 동행한 장남 주혁(31) 씨에게 평양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주혁 씨는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외교관 자녀 소환령이 내려지자 부모와 헤어져 홀로 귀국해 평양의과대학을 다녔다.

    -평양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부분은 무엇이었나.

    “외국 생활을 경험한 친구들이 해외에서 있었던 얘기나 그때 배운 노래를 하면 조직, 군부에서 데리고 가더라. 한두 명씩 없어지는 것을 보면 이렇게 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런 사건이 많다 보니까 내가 어떤 말은 하고 어떤 말은 안 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돼 가급적 말을 안 했다. 친구들끼리 ‘진솔적’ 얘기를 한 적 없다.”

    오 씨는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에 북한에서는 가족에게조차 할 수 없었던 ‘진솔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함구한 이복 언니의 존재, 북한의 교육열과 치열했던 학창 시절, 첫사랑과 귀국자 차별, 손가락질 당하는 북한 외교관의 삶, 사는 것 자체가 범죄였던 평양 시절,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자유에 대한 갈망까지. 책은 이렇게 끝맺는다.

    “생존자로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으로서 다시는 북한과 같은 나라가 지구상 다른 그 어느 곳에 세워지지 않도록, 앞으로 우리 자식들이 다시는 그런 지옥에 살지 않도록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나의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엄마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자그마한 깨우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간절함을 안고 서투르지만 용기를 내어 북한에서 보낸 지난 삶과 대한민국에서 현재 보내고 있는 삶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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