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노조, 지금도 80년대 살고 있어
韓 노동권 세계 최고 수준…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문제”
노동개혁 3축=법치·법제·노동관행 개혁
노동개혁=친기업? “시대에 뒤떨어진 프레임”
일자리 쏠림 줄이려면 중소기업 玉石 구분 지원해야
1월 11일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만난 김태기 위원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노동개혁의 3축은 법치·법제·노동관행 개혁”이라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지난해 11월 24일~12월 9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이 성공을 거두고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자 드라이브가 걸린 모양새다.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한국갤럽이 전국 성인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6%로 직전 조사보다 3%포인트 상승했다. 이유로는 ‘노조 대응’이 20%로 가장 많았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개혁엔 그만한 반발이 따른다. 노정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12월 21일 윤 대통령의 모두 발언에 대해 같은 날 민주노총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반(反)노동, 노조 혐오 발언이 극에 달했다”며 “노조 부패가 3대 부패인 근거를 대지 못하면 남은 임기 내내 반노동 정권을 향한 노동자 투쟁에 직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야권의 공세도 거세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노조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지지율이 조금 올랐다고 해서 거칠게 노동계를 몰아붙이려는 것 같은데, 노동자도 대통령이 존중해야 할 국민”이라며 “윤 대통령이 노동계의 우려를 무시한 채 노조탄압과 노동개악을 밀어붙인다면 갈등만 양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월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만난 김태기(67)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은 “노동개혁은 친(親)기업 정책이 아니라, 소외계층을 끌어올리고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이다. 중립적 위치에서 노사 간의 이익 및 권리 분쟁을 조정·판정한다. 이 조정·판정은 법원의 재판·판결에 준하는 효력을 지닌다. 노동 분쟁을 중재하는 만큼 노동개혁 국면에서 그 중요도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 위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노동경제학자다. 단국대 경제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노동경제학회장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중앙노동위원회 조정 담당 공익위원, 일자리연대집행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11월 29일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12월 1일 부임했다.
김 위원장은 수차례 책상을 내리쳐 가며 노동개혁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가 특히 지적한 부분은 ‘노조의 기득권화’다. “소수 기득권 노동자가 이권을 독차지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개혁 방향에 대해선 법치·법제·노동관행 개혁을 꼽았다. 정부의 반(反)노조 경향 우려에 대해선 “노조 자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부조리를 바로잡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ILO가 언제 적 ILO냐
1월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미래세대의 운명이 달린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가장 먼저 노동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1]
“물가가 올라 국민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는 때에 물류 마비를 일으킨 점이 국민 정서에 어긋났다고 본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강경 대응에 박수를 보낸 거고. 미국은 비슷한 경우에 더 강경하게 대처했다. 파업을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아예 막아버렸다.”
지난해 12월 30~31일 SBS가 넥스트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유권자 1005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윤석열 정부 3대 개혁 과제 가운데 가장 먼저 추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노동개혁(44.9%)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또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 등 재정 투명성 제고 방안에 대해선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이 60.5%로 ‘반대한다’는 의견(30.7%)의 두 배에 가까웠다.
노조가 국민의 지지를 잃은 듯하다.
“사실 좋은 징조라고 볼 수는 없다. 노조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의 중산층이 살아날 수 있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한창 왕성했을 때가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다. 당시가 한국 중산층의 전성기다. 또 1987년, 1988년엔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으로 여겨졌다. 노동기본권을 확보하면 취약계층도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줬다. 여러모로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노동운동이 투쟁 일변도에, 투쟁 이유도 약자를 위함이 아닌 노조 내 ‘밥그릇 싸움’이 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1990년대만 해도 대기업 임금을 100이라고 한다면 중소기업이 80은 됐다. 이젠 절반 수준이다. 노동운동이 중소기업 노동자 등 약자를 위해 행해졌는지 돌아볼 문제다.”
세계적 흐름, 즉 ‘글로벌 스탠더드’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떤가.
“‘우물 안 개구리’ ‘근시안’ 형국이다. 지금 ‘좋은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인데, 일자리는 노동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노동환경이 안 좋아지면 일자리가 사라진다. 대개 고임금 일자리는 좋은 기술을 보유한 선진국으로 간다. 한국의 경우 반도체, 2차전지 관련 일자리가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다. 왜 한국에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 노조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은 “한국 노조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기는 건 국제노동기구(ILO) 기준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ILO가 언제 적 ILO냐. ILO의 기준은 100여 년 전 제조업 시대에 갇혀 있다. 심지어 요즘엔 ILO를 주도하던 유럽이 오히려 한국보다 노동자에 대해 더 엄격하다. 예컨대 ‘결사의 자유’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 노조는 왜 이건 외면하나.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을 꾸준히 공론화했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미국으로 고급 일자리가 유출되는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벤처기업·중소기업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로 갈 것이다. 특히 인도는 출산율도 높고 평균연령도 낮다. 2년 뒤면 인구도 중국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한국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하는 셈이다. 노조는 이를 외면한 채 여전히 1980년대에 멈춰 있다.”
노동자도 기득권일 수 있다
지난해 12월 14일 서울 영등포구 전경련회관에서 김태기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노사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뉴스1]
“충분 또 충분하다. 수준이 굉장히 높다. 노동기본권을 헌법에 보장한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사실상 임금을 하향 조정할 수 없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또 파업을 이렇게 자주 하는데, 노동기본권이 약하다? 말이 안 된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많은데.
“결국 노동권 ‘격차’가 문제다. 노동권은 충분히 보장되지만 취약계층에는 ‘그림의 떡’이라는 거다. 취약계층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건 ‘기득권 노동자’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더 틀어쥔다. 그러니 취약계층 노동자가 많아진다. 공급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이들을 채용해 줄 기업은 해외로 떠난다. 근 30년간 반복된 양상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고착화됐다. 기득권 노동자는 살기 좋아졌다. 그럼에도 계속 탐욕을 부린다. 견제할 기구도 없다. 한국처럼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 나라가 없다. 그럼에도 진보계, 노동계에선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여전히 노동기본권이 부족하다고만 말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부르짖는다. 그렇게 했더니 결과가 어땠나.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 민간 부문은 비정규직이 늘었다. 풍선효과다. 주 15시간 이하 초단시간 일자리가 늘었다. 15시간 일하면서 먹고살 수 있나. 투잡, 스리잡 뛰면서 살게 됐다. 과연 행복할까.”
노동자 사이에도 계층이 나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 짚고 넘어가자면 노동법의 본질은 노동자 보호다. 모든 노동자가 보호받을 기회를 공정히 누려야 하는데, 일부 노동자가 이를 독점해 보호를 넘어 기득권화·특권화한다. 이에 대해선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尹 내민 손 거부한 건 노조
지난해 12월 9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충남본부 조합원들이 파업 철회 찬반투표가 파업 종료로 가결됨에 따라 충남 당진시 현대글로비스 앞 파업 농성장을 철거하고 있다. [뉴스1]
“세 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법치 개혁’이다. 화물노조, 건설노조 등 노조의 빈번한 불법행위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는 국민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컨센서스가 이뤄진 부분이라 잘 되리라고 본다. 두 번째는 ‘법제(法制) 개혁’이다. 근로시간, 임금, 노사관계 등에 대한 법제 정비다. 국회에서 할 일이겠지만 사실 국민의 지지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왜 개혁이 절실한지, 해야만 하는지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현재 이에 대한 설명이 좀 약해 보여 걱정이다. 마지막은 노동 관행 개혁이다. 직장 내 차별, 성희롱 등 문제가 법제를 개혁하면 해결되리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법제를 아무리 바꿔도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세 가지 가운데 법치 개혁 부분에 대해선 윤석열 대통령이 칼을 뽑았다.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리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노조를 지지율 올리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윤 대통령이 노조를 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노조에 너무 큰 기대를 한 것 아닌가 싶다. 윤 대통령은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추진한 사람이다. 반대가 많았음에도 밀어붙였다. 노조와 동반자 관계로 힘을 합치자는 제스처였다. 난 윤 대통령이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지 않나 싶다. 화물연대 파업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노조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거라면 회계 문제가 아니라 노동기본권을 문제 삼았으리라고 본다. 요즘은 계모임, 동호회도 총무, 감사가 있어서 입출금 내역을 모두 공개한다. 노조가 이보다도 더 못한 게 상식적이라고 보나. 비상식을 고치자는 것뿐이다.”
일부 강성 노조를 겨냥한 것인가. 예컨대 민주노총이라거나.
“민주노총도 전체 조합원과 지도부는 다르다고 본다. 즉, 민주노총의 현재 행태로 전체 조합원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게 현대차다. 요즘 파업 잘 안한다. MZ세대 조합원이 많아져서 그렇다. ‘왜 우리가 총파업해야 하나’라며 제동을 건다. 이처럼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도 변화를 겪고 있다. 대화·협상파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운동 역시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일자리 줄고 성장 멈춰도 되나
김 위원장은 부임 이전 다수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 강성 노조에 대해 쓴 소리를 해왔다. 분쟁 중재 업무 특성상 중립성을 요하는 중앙노동위원장으로 그가 임명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5일 노동법 전문가들로 구성된 노동법률단체들이 성명을 통해 “역대 중앙노동위원장 중 김태기 위원장처럼 노동조합에 대해 적대적 발언을 한 사람이 있었는가”라며 “공정성과 노동위원회에 대한 노·사 및 국민의 신뢰를 제고할 수 있는 인물로 재인선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김 위원장은 “우려의 시선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1970년대 대학 시절부터 봉천동에 가득한 판자촌을 보며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했다. 노동조합·노동운동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품고 살아왔다. 한국엔 악습이 있다. 미운 사람에게 ‘친기업’ 혹은 ‘친노조’라는 식으로 ‘딱지’를 붙이는 거다. 이런 건 그만했으면 좋겠다. 사회의 지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다”라고 항변했다.
진보 진영·노동계에선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친기업·반노동 정책’이라고 평가한다.
“근로시간·임금 개편이 친기업 정책이라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친기업·반기업 등은 그저 프레임에 불과하다. 본질은 ‘일자리·경제성장’이다. 묻고 싶다. 일자리 줄고 성장 멈춰도 되나. 이 질문을 외면하고 프레임에만 집중하면 스스로 국가 발전 기회를 걷어차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반면 여성 교육수준은 매우 높다. 일·가정의 양립이 안 되니 이런 일이 생긴다. 현재 노동 법제가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하게끔 돼 있지 않고, 오직 제조업에 종사하는 남성 위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자는 게 뭐가 문제인가. 임금 문제도 그렇다. 근속연수에 따라 호봉을 주는 나라가 세계에 몇이나 될까. 한국에선 노조가 있는 기업의 70~80%가 호봉제다. 현행 법제를 고집한다면 홀로 갈라파고스섬에 떨어져 퇴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 정부의 노동개혁은 온건한 수준이다. 진정 일자리, 국가 성장을 원한다면 프레임 씌우기는 그만함이 옳다.”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없는 게 문제 같은데.
“그렇다. 노동환경을 바꿔야 한다. 고급 일자리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란 쉽지 않다. 결국 중급 일자리, 저임금 일자리가 많이 남을 것이다. 한국에 중소기업이 약 350만 개 있고, 이미 한국 근로자 3분의 2가 30인 이하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이 일자리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청년에게 매번 ‘중소기업 가라’고 독려하는데, 안 가는 게 아니라 ‘괜찮은’ 중소기업이 없는 거다. 중소기업이라도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왜 안 가겠나. 그런 기업을 만들어내야 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 방침도 바꿔야 한다. 모든 중소기업을 살릴 생각은 접어야 한다. 잡초를 솎아줘야 작물이 잘 자란다. 중소기업도 옥석을 구분해 지원해야 한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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