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훼방 놓지 않는 대표 원해”
개혁도 특수부 수사하듯 해야 한다?
“尹에게 羅, ‘우리 편’이긴 한데 계륵”
온건 親尹 “윤핵관 호가호위 불만 많아”
“羅 안 나오면 安 기대 이상 선전할 듯”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0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나경원 당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윤 대통령 오른쪽)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퇴장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 대통령과 대화해 보면, 범죄자를 상대하는 검사로 평생 일해 왔기 때문인지 세상을 ‘좋은 사람’ 대 ‘나쁜 놈’의 구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느껴진다. 그런 면은 쉽게 바뀌기 어렵다. 스스로는 2019년 8월 ‘조국 사태’ 이후부터 늘 전선(前線)을 건너왔다고 여긴다. 사방에서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이때를 기점으로 검찰 내에서 자기 사람이라 생각한 측근 중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그 경험을 통해 느낀 바가 많은 것 같더라. 흔히 윤 대통령이 가까운 사람 챙긴다고 하는데, 그렇게 단순히 볼 문제가 아니다. 지금 윤 대통령은 나라를 제대로 개혁해 보겠다는 의지가 밖에서 보기보다도 훨씬 강하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겐세이(훼방)’ 놓지 않을 당대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한 말을 곱씹다 보면 윤 대통령의 행보를 이해할 실마리가 보인다. 특수부 검사는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 속도전 형태의 강제 수사를 통해 흐름을 일거에 장악하려 한다. 윤 대통령은 일생을 그렇게 살았다. 판사 출신의 한 법조인은 “과감하고 빠른 수사가 특수부 검사 윤석열의 최대 강점이었다”고 했다. ‘검사 윤석열’이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에 대한 외압을 폭로(2013년)한 건 상부가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수사팀을 ‘훼방’ 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치인 윤석열’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과 결별한 일, 이준석 전 대표를 두고 ‘내부 총질’이라고 표현한 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 대통령에게는 선거라는 전선, 집권 초라는 전선에서 일사불란한 체계가 중요했던 거다. 앞선 여권 인사는 “이준석 전 대표 징계는 이양희 윤리위원장이 주도했고, 이 위원장은 윤 대통령 전화도 받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라고 변호했으나,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측에서 적극적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윤 대통령의 의중은 읽힌다.
검사 기질 짙은 대통령
#2 친윤계에 속하지만 온건파로 분류되는 여당 고위 관계자에게서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그는 경선 캠프부터 본선까지 윤 대통령의 대선 가도에 모두 참여해 관련 사정에 밝다.“윤 대통령이 나경원 전 의원 남편(김재호 서울고법 부장판사)과 학창 시절부터 매우 가까웠던 건 사실로 알고 있다. 다만 최근 몇 년간에는 과거의 인연만큼 돈독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 전 의원이 경선 때부터 윤 대통령을 화끈하게 도와준 건 아니다. 윤 대통령이 보기에 나 전 의원은 ‘우리 편’이긴 한데, 일종의 계륵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럼에도 장관으로 기용하려 인사 단계에서 검토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여러 이유로 청문회가 필요 없는 두 자리(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기후환경대사)에 임명한 거다. (대통령실에서는) 그 나름 배려했다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출마할 것처럼 말하니 불쾌했던 거지.”
이 말까지 듣고 나면 왜 윤 대통령이 당대표로 나 전 의원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가 이해된다. 선의로 해석해 보자. 윤 대통령에게 지금은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당정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때다. ‘검사 윤석열’이 부패와 구악에 맞섰듯, ‘대통령 윤석열’은 “기득권의 집착은 집요하고 기득권과의 타협은 쉽고 편한 일”(1월 9일 수석비서관 회의 중)이라며 ‘기득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윤 대통령은 집권한 지금도 자신이 전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검사 기질이 짙은 대통령’으로 비친다.
그러니 자신과 보조를 맞출 당대표가 절실하다. 협조 관계를 구축할 사람이 당권을 쥐어야 한다. 새로운 당대표가 뽑혀도 총선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거야(巨野)에 맞서 단일 대오를 만들 필요가 있다. 나 전 의원이나 안철수 의원은 자기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윤 대통령에게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1월 5일 권성동 의원이 출마를 포기하면서 윤심의 무게추는 김기현 의원으로 기울었다. 이로부터 나흘 뒤 열린 김 의원의 캠프 개소식에는 당내 현역의원 40여 명이 참석했다.
“정치인으로서는 羅에게 최고의 기회”
1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당사에서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가 열린 가운데, 나경원 전 의원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그가 쓴 몇 개 문장에 나 전 의원 측이 당초 구상한 선거 구도가 그대로 담겨 있다. 윤 대통령과는 느슨하게나마 끈을 유지하겠다는 심산이 읽혀서다. 실제로 나 전 의원 측은 사직서 제출 배경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에서 절차를 문제 삼아서 마무리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과는 척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상황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렀다. 윤 대통령은 나 전 의원이 사직서를 제출한 날, 그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모두 해임했다. 해임은 공무원에 대한 중징계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대통령실은 신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 김영미 현 상임위원, 신임 기후환경대사에 조흥식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내정했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나 전 의원과 연결된 다리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나 전 의원이 1월 5일 기자간담회에서 ‘자녀 수에 따라 대출금을 탕감·면제’하는 헝가리식 정책 구상을 밝힌 지 8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장제원 의원은 윤 대통령의 해임 결정 직후 페이스북에 나 전 의원을 두고 “유승민, 이준석과 뭐가 다르냐”면서 “대통령을 위하는 척하며 반윤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나 전 의원으로서는 출마보다 불출마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불출마하면 권력에 굴복한 꼴이 돼 정치 가도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대권까지 염두에 둔 나 전 의원에게 제 목소리도 못 내고 발을 뺐다는 이미지는 정치적 치명상에 가깝다. 물론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나 전 의원이 지금 코너에 몰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최고의 기회”(1월 13일 CBS 노컷뉴스)라고 말했다.
“김장연대, 자연스러운 현상”
변수는 지지율이다. 기존에는 ‘나경원 1강 구도’가 또렷했다. 여론조사업체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1월 7~9일 전국 성인 1020명을 대상으로 ‘차기 국민의힘 당대표로 누구를 지지하냐’고 물은 결과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나 전 의원이 30.7%, 김기현 의원은 18.8%였다. 하지만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미디어트리뷴 의뢰로 1월 12~13일 전국 성인 1250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는 김 의원이 32.5%, 나 전 의원이 26.9%로 나타났다. 여당 지지층 사이의 여론 추이가 나 전 의원의 명운을 가를 가능성이 높아졌다.(이하 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나 전 의원이 대구·경북(TK)과 50·60세대 등 국민의힘의 전통 지지층에서 호감도가 높은 점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온건파 친윤에 해당하는 여당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원들은 윤 대통령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바지사장’ 대표를 뽑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당내에 윤핵관의 호가호위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 있다. 이런 기류 때문에, 나 전 의원은 자신이 누구보다 윤 대통령을 위하고 윤석열 정부를 성공시킬 사람이라고 말하며 전당대회를 치를 거다. 그런 나 전 의원을 두고 윤핵관들이 공개적으로 ‘당신은 친윤 아니잖아’ 손가락질할수록 손가락질하는 사람 꼴이 우스워질 테고, 이 구도라면 나 전 의원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 나 전 의원이 불출마하면 안철수 의원이 기대 이상 선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기현 의원을 지원하는 한 여권 인사는 “나 전 의원은 윤 대통령과 살아온 과정이나 기질 면에서 모두 결이 다른 사람이다. 나 전 의원이 당대표가 되면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윤 대통령과 손잡고 보수 정부를 지켜갈 인물은 김 의원뿐”이라며 ‘김장(김기현·장제원)연대에 대한 비판론에 대해서는 “당내 세력 간 연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당 총재직은 없어졌으나…”
근래 여의도에는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언급하는 사람이 부쩍 많다. 이때는 친박근혜계 좌장인 서청원 후보와 비박근혜계 구심점인 김무성 후보가 맞붙어 김 후보가 8.1%포인트 차로 승리했다. 당시에도 전당대회 기간 내내 ‘박심’ 논란이 들끓었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나, 문재인 정부 초인 2018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친문’이냐 ‘비문’이냐 논쟁이 뜨거웠다. 양당 공히 집권할 때마다 대통령이 원하는 당대표가 누구인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행태를 연출하고 있다.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중앙당 문제와 맞닥뜨린다. 당대표 등 중앙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독점하는 한국 정치에서는 구조적으로 당권을 놓고 사생결단식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으로서는 당대표가 자기 사람이어야 국정 운영의 불확실성을 덜 수 있다. 따라서 누가 대통령이 되건 전당대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미국의 경우 중앙당 없는 원내정당 체제여서 공천권 때문에 대통령이나 당대표 눈치를 살필 일이 없다. 자연히 의원들의 자율성이 높아지고 당정 간 건전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 연구소 교수(정치학)는 “한국에서 당 총재직은 없어졌으나 중앙당이 현존하다 보니 누가 대통령이 되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앙당 체제에서는 대통령과 당대표가 대립할 여지가 생긴다. 타협이 잘되면 좋은데, 타협에 실패할 수 있다. 윤 대통령과 이준석 전 대표 간의 대립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당청 일체론’을 주장했는데, 당을 입법부라기보다는 행정부를 도와주는 경호부대 내지 지지자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중앙당 대표가 공천권을 갖는 시스템이 존속하는 한 당정 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늘 주류 계파에 속한 인물을 당대표로 만들려 할 수밖에 없다.”
신동아 2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