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컵 높이 들며 추앙받은 구단주
우승 단장 경질하며 팬 반발 한 몸에
구단 구성원 대부분 SK 출신
변화 추진 적기라고 판단했겠지만…
지난해 11월 8일 인천 미추홀구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2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6차전 우승을 차지한 SSG 선수들이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왼쪽). 정용진 구단주가 같은 날 우승 소감을 말하고 있다. [뉴스1, 동아DB]
배리 스위처(86) 전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댈러스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이스볼 비키니’ 독자라면 사실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겁니다. ‘3루에서 태어났다(born on the third base)’는 말을 조금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 말은 ‘금수저’로 태어난 것뿐이면서 스스로 잘난 줄 아는 이들을 비판하는 표현입니다.
“스스로 내려오실 수는 없을 겁니다. 본인 힘으로 올라간 자리가 아니니까.”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도준(송중기 분)은 고모 진화영(김신록 분)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순양백화점 대표 명패를 책상 위에 내리칩니다. 진화영은 진양철 순양그룹 회장(이성민 분)과 이필옥 여사(김현 분)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 가운데 막내딸이고, 진도준은 진 회장의 혼외자인 진윤기(김영재 분)의 막내아들입니다.
“아유~ 고모가 없어서 모르는가 본데요.”
진화영이 누리지 못한 행운이 하나 있습니다. 진화영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추측건대 진화영 역시 이를 약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니라면 아버지에게 자신이 “고명(딸)이 아니라 메인 디시”라고 강조하던 진화영이 올케 손정래(김정난 분)에게 저런 인신공격성 발언을 듣고도 발끈하는 표정만으로 끝냈을 리가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재벌집 외손자도 ‘클라스’가 남다릅니다. 정용진 프로야구 SSG 랜더스 구단주(신세계그룹 부회장)가 바로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1910~1987)의 외손자입니다. 그리고 신세계 역시 자산 총액 기준으로 랭킹 11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대기업)’입니다. 이런 집 장남이라면 적어도 프로야구 구단주 자리에 앉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비선 실세 의혹이 뭐기에
2022년 11월 15일 SSG 랜더스 구단주를 맡고 있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SSG의 KBO리그 통합우승을 기념하며 ‘쓱세일’을 예고하는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인스타그램]
그러니 한국시리즈 시상식이 끝난 뒤 정 부회장이 팀원 중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팬들이 자기 이름을 연호하는 가운데 마이크를 잡은 정 부회장은 “우리는 개인상 14개 부문 가운데는 1등이 한 명도 없지만 안방 관중 동원 기록은 1위”라면서 “여러분들의 성원과 응원 덕분에 (정규시즌 시작부터 끝까지 1위를 지키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다”고 말했습니다.
‘용진이 형’은 SSG에서 각 신문사에 게재한 ‘우승 광고’에서도 ‘포스터 보이’로 나섰습니다. 정 부회장이 선수단 앞에서 구단기를 흔들고 있는 사진을 SSG가 광고 지면으로 제작한 겁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모기업인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이 함께 하는 ‘쓱세일’을 진행한 데도 물론 정 부회장 의지가 작용했을 겁니다. 정 부회장은 할인 행사를 앞두고 본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면서 쓱세일 일정을 미리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야구팬들도 “이런 구단주 또 없다”면서 정 부회장을 추앙했습니다.
2022년 12월 갑자기 팀을 떠난 류선규 전 SSG 랜더스 단장. [동아DB]
프로야구 팀 역시 기본적으로는 ‘주식회사’ 형태 법인입니다. ㈜신세계야구단은 지배회사인 ㈜이마트가 발행 주식 100%를 전부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 부회장이 ㈜이마트 지분 가운데 18.6%를 보유한 최대주주입니다. 그런데 현재 SSG 구단 구성원 대부분은 정 부회장이 임명하지 않은 ‘SK 출신’입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구단 구성원 역시 구단주는 물론 모그룹을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틈새를 좁히려면 변화가 필요했고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가 그 변화를 추진할 적기라고 판단했다면 이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야구라는 비즈니스
“야구는 비즈니스라기엔 너무 스포츠적이고 스포츠라기엔 너무 비즈니스적이다.”필립 K 리글리(1894~1977) 전 메이저리그(MLB) 시카고 컵스 구단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딱 1년 전 ‘베이스볼 비키니’에서 류 전 단장을 ‘로맨티스트’라고 평가할 때 인용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류 전 단장이 “통합우승으로 소임을 다했다”는 말만 남기고 팀을 떠난 것도 이런 생리를 잘 이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거꾸로 팬들이 SK 시절부터 함께한 류 전 단장과 쉽게 이별하기 힘든 것도 이런 사업 특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드 터너(85) 전 타임 워너 부회장도 이런 야구 비즈니스 특징 때문에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광고 사업을 벌이던 아버지 덕분에 ‘3루에서 태어난’ 그는 만 37세이던 1976년 MLB 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단주가 됐습니다. 참고로 당시 애틀랜타에는 나중에 한국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되는 제리 로이스터(71)가 몸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애틀랜타가 이듬해(1977) 시즌 초반 16연패에 빠졌다는 것. 단장을 겸하던 터너 구단주는 데이브 브리스톨(90) 감독에게 열흘간 휴가를 줬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자신이 감독을 맡기로 하고 등번호 27번 유니폼을 입은 채 애틀랜타가 방문 경기를 앞두고 있던 피츠버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 더그아웃에 등장했습니다. 피츠버그 구단은 전광판을 통해 구단주 겸 사장 겸 단장 겸 감독이 된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애틀랜타는 이날도 1-2로 패하면서 피츠버그의 환대에 보답했습니다.
터너 구단주는 이날을 마지막으로 더는 팀 지휘봉을 잡지 못했습니다. MLB 사무국이 ‘코칭 스태프는 구단 지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로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터너 구단주는 “이 규정을 어제 갑자기 만든 게 틀림없다”면서도 “사무국과 소송할 마음이 없으니 감독 자리는 내려놓겠다”며 물러났습니다. 터너 구단주는 스스로 감독을 맡은 이유에 대해 “1100만 달러를 모아 야구팀을 살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팀 감독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팬들 덕분에 우승했다면서…
마크 큐번 댈러스 매버릭스 구단주. [동아DB]
정 부회장이나 터너 구단주와 달리 큐번 구단주는 ‘3루에서 태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큐번 구단주의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공이었습니다. 큐번 구단주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판매업체 마이크로솔루션즈, 대학농구 인터넷 방송업체인 오디오넷을 창립해 성공시킨 자수성가형 인물이죠. 그는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NBA 구단을 샀습니다. 정 부회장이나 터너 구단주가 구단을 산 돈이 정말 ‘자기 돈’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물론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은 자기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은 (생각 외로) 친절한 성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한데 굳이 불친절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다 세상이 불친절한 드문 경우에는 3루에서 태어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확인해 주려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게 꼭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3루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한 요구에 응답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야구팬들 시간을 빼앗겠다”고 큰소리를 쳤다면 “팬들 덕분에 우승했다”는 말을 팬들이 진심으로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본인 생각으로 말한 소감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SSG 랜더스 비선 실세 의혹에 대해 이제는 신세계그룹을 떠난 한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이 관계자는 “전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며 답을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선 실세가 100명이라도 좋으니 롯데가 우승하는 걸 꼭 봤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