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image]
“창대야. 이제 연경이 코앞이니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지?”
이수의 말을 골똘히 음미하던 창대가 조용히 되물었다.
“뭔가 은밀히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지도를 창대 앞으로 내밀며 이수가 속삭였다.
“실은 정사 어른 몰래 여길 가보고 싶구나. 이곳 옥전현에 있는 오래된 골동품 가게다.”
지도를 뚫어지게 살펴보던 창대가 침을 꼴깍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소인이 여러 차례 사신 행렬을 모신 덕분에 이곳 지리는 훤하긴 합니다. 한데 청나라 말이 아주 유창하진 않습니다.”
지도를 돌돌 말아 소매 안에 집어넣은 이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화어는 나도 조금 하고, 뭐 정 안 되면 필담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창대를 향해 눈을 찡긋한 이수가 덧붙였다.
“걱정마라. 수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골동품 가게를 10년 전 연암 선생이 들르셨다고 하는구나.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다.”
골동품점 선혜당
산해관을 통과한 정사는 마음이 크게 놓였는지 부사와 초저녁부터 술을 퍼마시더니 일찍 취침해 버렸다. 술을 좋아해서라기보다 수행원들이 마음 놓고 청나라 상인들과 물물거래를 하도록 눈감아 주기 위해서였다. 특히 역관들은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는 인삼과 한약재를 잔뜩 싸 짊어지고 온 터였다.이수가 창대를 대동하고 숙소를 벗어날 즈음 객사 마당에 각기 자기가 팔 물건을 내놓고 있던 역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헛기침을 크게 한 이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곳에 가는 게 아니니 염려일랑 붙들어들 매시게. 내가 술을 한 잔도 못하는 걸 잘들 알지 않는가? 가까운 골동 가게에 들렀다 금방 돌아오겠네.”
이수가 서둘러 객사 정문을 나서자 창대가 잽싸게 따라붙었다. 정문 앞은 조선 사신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청나라 지역 상인으로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좋은 물건을 선점하려 연경에서 온 자들도 끼여 있었다. 서툰 조선말로 거래가 언제 시작되느냐고 묻는 화상들에게 역시 서툰 청나라 말로 잘 모르겠다며 둘러댄 이수가 인파를 뚫고 걸음을 재촉했다. 간신히 사방이 탁 트인 큰길 변으로 나오자 달이 떠올라 있었다.
창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옥전현 중심가 골목길을 누비더니 어렵지 않게 선혜당이라는 골동상점을 찾아냈다. 입구에서부터 고서 특유의 쾨쾨한 냄새가 진동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긴 벽을 따라 설치된 여러 층 선반 위에 온갖 도서와 기물이 쌓여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수가 창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주인이 안 보이는구나. 예의 바른 화어로 손님 왔다 큰 목소리로 외쳐봐라.”
뒷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던 창대가 청나라 말로 크게 외치자 안쪽 작은 쪽문이 살며시 열리며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사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비좁은 문을 통과해 풍성한 몸을 천천히 펼쳐 일으켜 세웠다. 언뜻 봐도 구척장신의 거구였다.
“혹시 상점 주인이신 심유붕이란 분이 맞습니까?”
이수가 청나라 말로 떠듬떠듬 물었다. 상대는 질문을 무시하고 상점 가장 안쪽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수염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발음이 안 좋은 탓이려니 여긴 이수가 조금 더 다가가 소매에서 휴대용 지필묵을 꺼냈다. 그는 조심스레 먹물 병에 붓을 찍어 공책 위에 ‘심유붕’이라 적은 뒤 해당 부분을 찢어 상대 앞에 내밀었다. 종이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물끄러미 노려보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질
“그런 글이 애초에 없었단 말입니까?”놀란 표정이 된 이수가 상점 주인인 유붕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물었다. 창대가 그 질문을 청나라 말로 통역해 전하자 유붕이 빠른 말투로 뭐라고 대답했다. 말을 다 들은 창대가 이수를 향해 속삭였다.
“10년 쯤 전에 조선 사신 일행이 찾아온 건 맞지만 여기 걸린 글을 베껴가거나 한 일은 전혀 없었다는군요. 특히 호랑이와 관련된 글을 벽에 걸어놓은 기억이 없답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하는군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이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니다. 연암 선생이 쓴 열하일기란 책에 분명히 적혀 있다. 이곳에 걸린 족자의 글을 베껴 ‘호질’이란 작품을 완성하셨다고 말이다. 뭐 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하셨겠느냐? 도통 알 수가 없구나.”
팔짱을 낀 채 이수를 지긋이 바라보던 유붕이 큰 풍채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협탁에서 찻잔 세 개를 집어 가게 바닥에 쌓인 고서더미 위에 올려놓더니 느릿느릿 일어나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굼뜬 동작으로 유붕은 마침내 감청색이 감도는 녹차를 우려내 이수와 창대의 찻잔에 차례로 따랐다. 차 맛이 너무 써 눈썹을 찡그린 이수가 유붕에게 화어로 나이가 몇이냐 물었다.
유붕은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되더니 말없이 두 손바닥을 펼쳐 열 번을 접었다 폈다. 그러고는 창대마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노래 몇 소절을 불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황한 창대가 유붕과 몇 마디 나누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이수에게 속삭였다.
“자신의 나이는 100살이 넘었으며, 또 그게 뭐냐, 이 말을 구태여 전해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 자기가 호랑이라고 하는군요. 잠시 전 노래처럼 들린 게 호랑이들이 쓰는 말이랍니다요. 허참!”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조심스레 다시 내려놓은 이수가 유붕의 눈을 유심히 관찰했다. 상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천진스레 웃고 있었다. 말없이 상대에게 목례를 한 이수가 벌떡 일어서며 창대에게 속삭였다.
“창대야,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 앞서거라.”
머뭇대던 창대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유붕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 유붕은 두 사람이 상점 밖으로 나갈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혜당을 벗어난 뒤 창대가 몇 걸음 앞서 걸으며 이수를 향해 물었다.
“저자가 미친 게 맞습죠? 근데 왜 이리 황망히 나오셨습니까?”
상점 거리를 수놓은 등불들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우던 이수가 대답했다.
“무서워서 그랬다. 심유붕이란 자가 호랑이일 리는 없겠으나,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듯해 화급히 피한 것이다. 이곳은 낯선 남의 땅이고 우린 힘없는 나그네가 아니냐?”
탑골 현자
한양 탑골 대사동에 있던 연암 박지원의 집은 젊은 지식인의 요람이었다. 지원은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물론이요, 양반과 상인을 나누는 법도조차 무시하며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누구든 기꺼이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이던 이수도 당연히 그중 한 명이었다.“사복시 주부로 자리를 옮기셨다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탑골의 현자를 만난 이수가 공손히 말을 건넸다. 반백이 넘은 나이였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총기를 유지하고 있던 지원이 화로를 손님 앞으로 밀며 대답했다.
“겨울 날씨가 춥네. 손이라도 쬐게. 나야 뭐 본디 말 바라보기를 좋아하지 않나? 궁궐에 보낼 말들을 관리하다 보면 시간이 어찌 가는 줄도 모르기 일쑤라네. 게다가 의정부가 코앞이니 나라 돌아가는 사정까지 엿들을 수 있어 좋기도 하고!”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석학이었지만 음직으로 주부 벼슬이라도 받아야 할 만큼 가난했던 지원은 그러나 호탕함으로는 고관대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주안상을 차려오게 한 그는 연신 술잔을 들이켜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이번 연행은 어땠나? 추웠지? 추위보단 더위가 차라리 낫다고들 하던데. 10년 전 사행 때는 무척 더웠었거든.”
대답 대신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낸 이수가 입을 뗐다.
“제가 즐겨 읽던 선생님 책입니다. 열하일기 필사본 가운데 일부지요.”
책을 받아 훑어보던 지원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별본으로까지 돌아다니며 읽힌다니 기분은 좋군. 근데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
화로를 슬며시 옆으로 밀며 몸을 지원 쪽으로 기울인 이수가 물었다.
“그 가운데 호질이란 작품을 저는 최고로 칩니다. 읽을 때마다 체했던 게 확 뚫리는 통쾌함이 밀려들거든요.”
“고맙네. 근데 이걸 왜 보여주느냐 그 말일세.”
길게 한숨을 내쉰 이수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평소 몹시 궁금했었습니다. 이 작품이 진짜 산해관 인근 점포 벽에 걸려 있던 누군가의 글을 베끼신 건지, 아니면 그 핑계로 선생님 속마음을 맘껏 펼치신 건지.”
눈을 게슴츠레 뜬 지원이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자네 필시 정사 몰래 선혜당을 찾아갔었던 게로군.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다시 물었다.
“심유붕이란 자도 만났습니다. 호랑이 얘기가 적혀 있었다던 그런 족자는 애초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더 황당했던 건 그가 자신을 호랑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곧바로 자리를 떴습니다만, 의아한 마음에 이렇게 여쭈러 왔습니다.”
부젓가락으로 화로 안을 뒤적이며 시간을 끌던 지원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진짜 호랑이 얘길 들어볼 텐가?”
호랑이
정사였던 삼종형 박명원 덕분에 공식 수행원이 아닌 자제군관 신분으로 사행에 따라붙은 지원은 단 하루도 제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 그는 법금을 어겨가며 숙소 밖으로 외출을 일삼았고, 뜻이 맞는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아예 밤을 새우고서야 돌아왔다. 간곡히 만류하던 명원도 나중엔 포기한 채 힘 좋은 마부를 붙여주며 무사히 귀가만 하라 통사정할 지경이었다.산해관을 통과해 모두들 들떠 있던 어느 날 밤, 드디어 대륙 중심부에 들어섰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던 지원은 자신을 따르던 또 다른 자제군관 정 진사와 단둘이 옥전현 밤나들이에 나섰다. 두 사람은 옥전 중심가 주점들을 전전하며 이국 풍물 구경에 열을 올리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바닥 전돌 생김새부터 골목길 뻗은 모양하며 죄 똑같아 갈피를 잡지 못하겠네. 젊은 자넨 숙소 근방 뭐 특이한 거라도 기억 못 해내겠나?”
지원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대던 정 진사가 불콰하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전혀요! 제가 뭐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걸 보셨소이까? 소피나 눌 테니 망이나 좀 봐주시오.”
정 진사가 비틀대며 으슥한 골목길로 사라지자 혼자 된 지원이 술을 깰 겸 주변 골목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는 꽤 오래돼 보이는 골동품점 한 곳을 우연히 발견했다. 선혜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술기운에 겁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그를 거구의 주인이 노려봤다.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선에서 온 자인가?”
놀랍게도 주인이 유창한 조선어로 물어왔다. 귀가 의심됐지만 조선인 동포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지원은 상대를 얼싸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포옹을 천천히 풀어낸 주인은 차 한 잔을 권하며 거대한 몸집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몹시 취했군. 관군 복장을 했는데 무사인가?”
주인이 지원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피며 역시 조선말로 물어왔다. 더운 여름철에 초저녁부터 술을 들이부은 터라 지원의 몸을 사로잡은 취기는 더욱 솟구쳐만 올랐다.
“모르겠소. 이젠 내가 청나라 사람인지 조선 사람인지도 불분명하오. 칼을 쥐어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소이다! 당신은 조선인이오? 아니면 청나라에 투항해 저들 밑에서 살아남은 자의 후예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원이 말을 마치고 겨우 눈을 치켜떠 상대를 바라봤다. 순간 의자 위에 사람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은 호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두 눈을 비빈 지원이 다시 상대를 자세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그거 변검술이요? 가면을 쓴 거요?”
한낱 짐승 인류
“우리 같은 호랑이들에 나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조선에서 살다 지루하면 청나라로 오고, 또 그것도 진력나면 더 먼 서방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우리들이야말로 진정 사해동포를 실현하고 있다는 말이지.”호랑이가 수염을 곤두세운 채 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은 자신이 틀림없이 꿈속에 있다고 믿었지만 이국에서 꾸는 꿈마저 즐기기로 결심하며 마침내 입을 뗐다.
“그대가 진정 호랑이라면 필시 사람을 잡아먹지 않겠소? 지금 날 잡아먹을 셈이오?”
잠시 으르렁대던 호랑이가 찻잔을 입에 댔다 떼며 대답했다.
“난 육식을 끊은 지 이미 오래다. 내단 수련을 거듭해 수명을 늘려왔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짐승이신데, 아이쿠 죄송하오. 아무튼 어찌 사람 말을 그리 잘하시오?”
“너희들도 일개 짐승일 뿐이다. 너희가 ‘말’이라고 부르는 걸 왜 다른 짐승은 못 할 거라 생각하느냐? 특히 너희 조선인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꼴 같지도 않은 상투를 틀고 우쭐대지만 오직 살아남는 데만 급급하고, 자신들이 오랑캐면서도 이웃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속으로 멸시한다. 이 얼마나 가소로우냐? 우리가 가죽을 남긴다면 자기들은 이름을 남기겠다고 떠벌이나 진정 이름에 관심 갖는 법은 없다. 소위 양반이 마음을 쓰는 건 오로지 부귀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하찮은 인간들의 무도함과 횡포가 극심하지만, 특히 조선인의 몽매함은 한참 도를 넘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발톱을 세운 두 팔로 허공을 몇 차례 휘저은 호랑이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우리는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먹을 양을 정해 그 이상은 취하지 않는다. 또한 배워야 할 게 생기면 망설임 없이 배우되 배운 기술로 동류를 해치진 않는다. 하지만 너희 인류가 한 짓을 되돌아봐라!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며, 먹는 데에 한량을 둘 줄도 모른다. 약자를 한없이 괴롭히되 강자에겐 비굴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강자에게 제대로 배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 제대로 배운다한들 무슨 쓸모 있겠느냐? 결국엔 동류를 해치고 못살게 구는 데에 골몰하지 않느냐?”
깊은 한숨을 내쉰 지원이 속삭이듯 다시 물었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가엾은 인간을 도와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이젠 없다. 우리가 얼마나 오랜 세월 너희에게 경고를 해왔는지 아느냐? 사특한 욕심으로 자연을 벗어나더니, 결국엔 문명이란 허울 아래 끝내 자신들마저 멸할 탐욕을 깊숙이 감추고야 말았다. 그 위선을 벗기기란 불가능하구나!”
지원이 깊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쳐들어 선혜당 주인을 올려다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정 진사가 들어섰다. 자신을 찾아내느라 힘들었다고 투덜대는 정 진사 쪽을 힐끗 보고는 다시 머리를 돌리자 풍채 좋은 주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大意
지원의 말을 다 들은 이수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지금 그 말씀을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동치미 사발을 들어 한 모금 삼킨 지원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구태여 믿으라곤 하지 않겠네. 그저 꿈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날 숙소로 돌아가 정 진사에게도 이 말을 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더군. 그래서 열하일기에선 족자를 보고 쓴 걸로 꾸몄던 걸세.”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잔을 들어 가볍게 반 모금을 마시고는 물었다.
“제가 호질을 좋아한 건 그 내용이 몹시 신랄하되, 조선의 현실을 뼈저리게 짚어주는 바가 있다고 믿어서였습니다. 실리와 실물에 어두운 채 도의와 염치만을 내세우는 위선적 도학군자들에게 통쾌한 일침을 놔준다고 봤었지요.”
“방금 내가 해준 얘기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아무렴요! 얘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뭐가 달라지지? 호랑이가 해준 말이야말로 정녕 심오하지 않은가?”
고개를 가로저은 이수가 지원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에 따르면, 청나라나 조선이나 다 잘못됐다는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인류가 만든 문명 세계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그런 말이 됩니다. 실학을 통해 조선을 강하게 만들 필요도 사라지는 셈이지요. 아니, 우리 역시 호랑이들처럼 자연에 안분지족해야 된다는 것인데, 저 불경한 도가나 불가의 무리들이 하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지원이 부젓가락으로 화로 속 불씨를 살리며 느긋하게 입을 뗐다.
“나는 말일세. 그날 이후 세상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네. 이를테면 길을 걷다가도 주변을 자주 돌아보게 되더군, 대장장이를 만나면 저자는 혹시 사슴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을 봐도 그녀가 곰일지도 모르겠다 여기곤 했지. 그들이 사슴과 곰이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직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며 음양으로 도와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세상 모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벗으로 받아들여 동고동락하려는 것일세! 필부필부로 시끌벅적한 이 백탑 주변에 집을 마련한 뒤 끝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네.”
눈빛이 흐려진 이수가 입술 사이로 가볍게 신음을 뱉고 힘겹게 물었다.
“그게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궁극의 실학 정신입니까?”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지원이 대답했다.
“그렇다네. 우리 조선이 실질을 숭상해 청나라를 앞지를 국력을 갖게 되는 건 물론 너무나도 중요하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목적이 있어야 할 거 아니겠나? 세상 모두가 다 함께 잘살자고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다면 조선 산하를 침략했던 저 왜인이나 만주족과 뭐가 다른가? 나는 왜나 청에 대한 복수심을 거두고 그들마저 품을 더 큰 대의를 가져야 한다고 믿네.”
“그 대의란 게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한참 동안 이수를 응시하던 지원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호랑이가 가르쳐준 겸손을 잊지 않아야 하네. 특히 조선 양반이야말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네. 서자와 적자, 양반과 상놈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난 말일세. 그런 게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세.”
“그렇다면, 그리 된다면, 끝내 왕이란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수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지원이 힘줘 다시 대답했다.
“글쎄. 그런 건 더는 필요 없어지는 것이지.”
할 말을 잃어버린 이수가 말없이 자기 잔에 술을 가득 붓더니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 작품은 박지원의 ‘호질’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