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팬이라 볼까말까 고민했는데…”
정식 수입된 日 만화 최초로 접한 세대
산업화‧386‧X‧IMF‧밀레니얼 코호트
구세대와 신세대의 단절선 서태지
민족주의 감성 상업화한 ‘문화 대통령’
386보다 남북통일 선호하는 X세대
자신들의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신세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서태지와 아이들. [동아DB]
1월 4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슬램덩크’ 영화 보고 왔다”는 제목의 게시물에 담긴 문장이다.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작성자는 읽는 이들에게 당부하기까지 했다. “다들 시간 되시면 큰 화면과 빵빵한 사운드로 보세요.”
이 글이 처음 올라온 커뮤니티는 ‘클리앙’이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유저(user)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2019년 무렵 노(No)재팬 운동이 벌어질 때 다양한 인증샷이 올라왔던 곳이다. 문제의 게시물을 작성한 이 역시 노재팬 운동에 참여했거나, 직접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슬램덩크 노재팬 논란’의 시발점이 된 게시물은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작성자의 연령, 직업, 소득 수준, 거주 지역 등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월 12일 현재 네이버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영화 정보 중 ‘관람추이’ 항목을 살펴보면 예매자의 25%가 여성이고 75%가 남성이다. 연령별로는 20대가 17%, 30대가 47%, 40대가 29%를 차지하고 있다. 클리앙 유저 집단의 평균 연령과 성별, 게시물의 어조 등을 놓고 볼 때 작성자가 30대에서 40대 사이의 남성이라고 가정하는 건 그리 과도한 추론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내적 갈등 혹은 모순을 넘어서는 사회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노재팬에 동의하고 찬성하지만 ‘슬램덩크’의 열혈팬이기도 한, 어떤 세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슬램덩크’와 ‘드래곤볼’로 대표되는 정식 수입된 일본 만화를 최초로 접했던 세대, 88올림픽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지니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을 한창 젊은 나이에 만끽한 세대, 자기 손으로 처음 뽑은 대통령이 김대중 혹은 노무현인 세대. 오늘 이 글의 주제인 대한민국 40대, 1970년대 생의 모습이다.
1월 4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1990년대 인기를 끈 ‘슬램덩크’의 극장판이다. [NEW]
일종의 내부고발 내지는 자아비판
몇 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밝혀둬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대한민국의 모든 40대가 위에서 말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같은 나이대지만 두 번의 대선에서 이회창을 연거푸 찍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일본 만화와 대중문화에 선을 긋고 공부만 열심히 하거나 다른 문화 콘텐츠를 소비한 사람도 물론 없지 않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의 열광적 분위기를 40대 전체가 빠짐없이 누렸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현재 50대 초반에 진입했거나 40대의 한복판에 있는 1970년대생들을 관통하는 어떤 패턴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다시피, 1970년대생은 1980년대생과 구분되는 정치‧사회‧문화적 행동 양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민주당을 지지한다. 지난 정권 당시 민주당이 던졌던 정치적 어젠다에 호의적이다. 북한을 지원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며 대북 강경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서는 딱히 우호적이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보다 여러모로 소구력을 보이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재팬을 옹호하면서 슬램덩크를 보러 가는 모순을 끌어안은 세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모든 세대론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전쟁이나 그와 유사한 특징적 사건으로 분절되지 않는 한, 세대 구분은 자의적이고 불분명한 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오늘의 논의 대상인 1970년대생만 해도 그렇다. 그들을 흔히 ‘X세대’라고 칭하지만 1990년대 대중문화 호황기의 즐거움은 1960년대 후반생들도 청춘으로서 함께 즐겼다. 한편 필자가 속한 1980년대생들은 ‘88만원 세대’ ‘IMF 세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됐으나 X세대처럼 확실한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그런데 1983년생인 필자의 경우 연령대로는 1980년대생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1980년대 후반생보다 1970년대생들과 좀 더 가까운 편이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인 1990년대에 PC통신이라는 미디어를 경험했고, 2002년 월드컵을 성인이 돼 즐겼다는 점에서 1970년대생의 세대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뷰파인더’에서 드물게 필자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1970년대생에 대한 분석은 ‘타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연령대로는 1980년대생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1970년대생에 가까운 필자가 일종의 내부고발 내지는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또한 이 글의 논의가 매우 정교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몇 년생을 어느 세대에 포섭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그 자체가 매우 크고 어려운 사회학적 논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본격적인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2021년 7월 통일연구원에서 발행한 ‘KINU 통일의식조사 2021’을 펼쳐보자. 2021년 KINU 통일의식조사는 기존 연구를 문헌 조사해 한국인을 출생연도에 따라 몇 개의 코호트로 분류한다. 1950년 이전 출생자는 ‘전쟁세대’, 1951년부터 1960년까지는 ‘산업화세대’, 1961년부터 1970년까지는 ‘386세대’, 1971년부터 1980년까지는 ‘X세대’, 1981년부터 1990년까지는 ‘IMF세대’, 1991년 이후로는 ‘밀레니얼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해외에서는 20세기 말과 21세기의 전환을 경험한 이들(주로 1980년대생이다)을 밀레니얼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법에는 혼동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서 확인되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1970년대생과 그 이후 세대를 나누는 핵심적인 인식의 분기점 중 하나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위 구분법을 따르도록 하겠다.
‘하여가’에 담긴 전략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생은 그 이후 세대와 가깝고 1960년대생과는 거리가 멀다. 단적인 예로 만화를 들어보자. 1970년대생은 ‘보물섬’(1981년 창간), ‘아이큐점프’(1988년 창간), ‘댕기’(1991년 창간), ‘소년챔프’(1991년 창간) 등의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 혹은 ‘슬램덩크’나 ‘드래곤볼’ 같은 일본 정식 수입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다. 앞서 필자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듯 이는 1980년대 초‧중반생까지 공유하는 문화적 체험이다. 반면 1960년대생들에게 만화란 이현세, 박봉성, 허영만 등으로 대표되는 만화가들이 그리는 소위 ‘대본소 만화’를 뜻했다. 물론 대본소 시절 활동하던 작가 중 몇몇은 그 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그들이 오늘날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내는 작품은 그 시절의 것과 큰 차이가 있다.이러한 문화적 간극은 비단 만화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대중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넘기 어려운 간극이 발생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름 아닌 ‘문화 대통령’ 서태지 때문이다. 서태지는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구세대와 다른 신세대’라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부여했다.
갓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방송 무대에 출연한 1992년 4월 11일. MBC ‘특종! TV연예’의 코너 ‘신인 무대’에서 낯선 음악과 춤을 보여준 그들을 진행자 임백천과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던 가수 전영록 등이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본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0점 만점에 7.8점을 받았는데, 이 또한 ‘구세대’가 ‘신세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어떤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져 지금껏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신인 무대’ 자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좋은 평을 해주는 자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에 열광한 젊은 세대의 반응과는 달랐지만, 구세대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특별히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수이자 작곡가이면서 탁월한 기획자였던 서태지는 본인이 단지 인기 가수를 넘어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이해한 것 같다. 충격적인 1집 데뷔 이후 4장의 앨범을 내면서 그가 보여준 행보를 놓고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서태지는 적극적으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는 길을 택했다.
2집 ‘하여가’에서 서태지는 국악과 팝을 섞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을 향한 기성세대의 반감을 겨냥한 전략이면서, 동시에 (당시에는 이 말이 없었으나) ‘국뽕’ 코드를 가미해 기성세대와의 투쟁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이중적 결과를 낳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뽕은 만능 치트키 같은 것. ‘하여가’의 음악적 신선도와 별도로, 서태지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던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본인이 갈등하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였다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96년 1월 24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소식이 흘러나오자 서태지의 집 앞에서 팬들이 서성이고 있다. [동아DB]
‘발해를 꿈꾸며’… 순도 높은 NL 민족주의
본인을 구세대와 갈등하는 신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서태지의 전략은 그 후로 더욱 심화됐다. 3집 수록곡 ‘교실 이데아’는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우리를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다”며 학생들의 울분을 대신 전달했다.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명목상으로는 ‘발해’라고 하지만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고 우리가 나갈 길을 찾아요”라는 그 노래가 ‘맘의 문을 여는’ 대상이 북한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 철원에 남아 있는 노동당사 건물의 폐허에서 찍은 뮤직비디오는 그 메시지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해주었다.여기서 우리는 서태지의 ‘반항’이 지니는 독특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서태지는 분명히 구세대와 갈등하는 신세대의 아이콘이었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자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반항’의 소재로 끌어들인 내용 중 상당수는 엄밀히 말해 ‘반항’의 소재가 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여가’에 태평소 소리를 집어넣음으로써 국뽕을 자극하는 것이 어떻게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 된단 말인가.
‘발해를 꿈꾸며’의 가사는 더욱 애매하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는 ‘광야에서’를 떠올려 보자. 운동권 구성원들이 즐겨 부르기에 반체제적, 반항적인 노래로 여겨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순도 높은 NL(민족해방) 민족주의의 그것이다. 이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부추기고 편승하는 것도 ‘저항’이 될 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맥락 때문인데, 서태지는 바로 그 애매한 지점을 대중가요에 담아서 상업화했다.
대중문화 비평가들은 흔히 서태지의 저항 정신을 1970년대 영미권의 펑크록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섹스 피스톨즈 같은 펑크록 밴드가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댁도 남자잖수’라는 식으로 빈정거리며 모든 기성 질서와 제도를 조롱한 것과 견주어볼 때, 서태지의 ‘저항’은 다르다. ‘교실 이데아’에서 교육 제도를, ‘시대유감’에서 문화 검열을 비판하던 서태지는, 동시에 국뽕과 민족주의를 자기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한 영향 속에서 1970년대와 그 이후 출생자들은 국뽕과 민족주의를 저항의 레퍼토리로 노래 부르며, 그것을 ‘쿨’하다고 생각하는 ‘서태지 세대’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바라보는 관점은 구세대
‘꼰대는 싫지만 국뽕은 좋은’ ‘독재는 싫지만 북한에 온정적인’ 모순의 세대가 탄생한 이유를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 하나로 국한시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 서태지는 사회적인 주제를 적극 다룸으로써 팬들에게 ‘신세대’의 자의식을 심어줬다. 그 자의식의 핵심은 저항인데, 저항의 소재로 국뽕과 민족주의가 거리낌 없이 사용됐다. 이러한 문화적 학습은 세대 경험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에 큰 흔적을 남기고 있다.앞서 언급했던 ‘KINU 통일의식조사 2021’로 돌아가 보자. 북한과의 통일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분단을 유지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양자택일하는 질문에 대한 코호트별 답을 살펴보면 이채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4월 조사에서 확인된 바, 통일에 대한 세대별 선호도는 다음과 같았다. 전쟁세대는 39.2%, 산업화세대는 24.6%, 386세대는 29.4%, X세대는 31.4%, IMF세대는 20.5%, 밀레니얼세대는 12.4%.
X세대가 IMF세대나 밀레니얼세대보다 통일을 선호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X세대가 386세대나 산업화세대보다 통일을 ‘더’ 선호하는 것은 놀라운 결과다.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가. X세대와 386세대는 대중문화적으로 단절돼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은 연속적이다. 반대로 X세대와 IMF세대는 문화적으로 가깝지만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반대편에서 들여다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평화공존, 혹은 분단 체제의 영속을 바람직하다고 보는 X세대는 응답자 중 47.9%로, 44.1%를 보인 전쟁세대의 뒤를 이어 가장 부정적이다. 분단이 아닌 통일을 향한 명확한 지향이 엿보인다. 반면 IMF세대는 61.5%, 밀레니얼세대는 71.4%가 통일이 아닌 평화공존을 원한다. 모든 신세대는 꼰대를 싫어하고 독재를 ‘극혐’하지만, IMF세대나 밀레니얼세대와 달리 X세대는 북한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포용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닌 셈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필자는 이 특이한 현상이 전적으로 서태지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생이 얼마나 특이한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고자 할 따름이다. 1970년대생은 문화적으로 신세대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은 구세대다. 386세대와 산업화세대를 뛰어넘어 오히려 전쟁세대에 가까울 정도로 통일을 선호하고 평화공존 혹은 영구분단을 원치 않는다.
선택지에서 배제된 보수정당
여기서 정치적 고민으로 넘어가 보자. 말하자면 ‘최초의 신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생 X세대, 그 중에서도 화이트칼라들은 바로 윗세대인 386세대가 그들을 아무리 실망시켜도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왜일까.1970년대생을 ‘서태지 세대’로 바라보는 것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성세대를 향한 저항’에서 찾는다. 북한에 대한 온정적 태도와 민족주의, 국뽕을 그 저항의 소재로 동원하면서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1970년대생에게 있어, 고령층이 지지하고 있고, 대북 강경책을 선호하며, 반일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더 큰 부담을 느끼는 보수정당은 정치적 선택지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가설에 따를 경우 보수정당이 1970년대생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대로 1980년대생과 그 이후 세대들에게 북한에 온정적인 1970년대생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꼰대’가 되어갈 것이다. 한번 결정된 정치적 선호가 바뀌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지금이야말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고 우리가 나갈 길을 찾아요.”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