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中 ‘졸부’ 노릇 고까워도 反中 하진 말자

[봉달호 편의점 칼럼]

  • 봉달호 편의점주

    입력2023-02-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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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비난 전 이해부터 해봐야

    • 韓 對中觀 지나치게 극단적

    • 反中 기저 심리=고까움·두려움

    • 韓中, 어차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Gettyimage]

    [Gettyimage]

    중국에 살 때 대형 사고를 한 번 친 적 있다. 당시 필자는 중국의 어느 신문사에서 일했다. 중국에서 한글로 뉴스를 발행하는 매체였다. 정식 직원은 아니고, 알바생이랄까. 맡은 업무는 조선족 기자가 작성한 초고(草稿)를 한국식 기사 작성법에 맞게 고치는 일이었는데, e메일로 원고를 받아 수정해 다시 보내주는 재택근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가 손댄 기사 하나 때문에 신문사 대표가 공산당 선전부에 불려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무슨 기사였을까.

    중국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당시 중국 창춘(長春)에서 동계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개막식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 44개 국가가 참가해 성황리에 대회가 개최됐다”고 기사를 썼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어떤 대목이 공산당 선전부 간부를 격노하게 만들었을까. ‘국가’라는 두 글자 때문에 그랬다. 중국 정부 관점에서 홍콩, 마카오, 타이완은 국가가 아니다. 그럼 이런 기사는 어떻게 써야 할까.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 44개 국가 및 지역이 참가해’라고 써야 한다. 초보 시절이라 내 딴엔 불필요한 표현을 줄이려고 그냥 국가라고 통칭한 것인데, 이렇게 큰일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필자가 수정한 기사는 데스크에서 최종 확인을 거쳐 인쇄된다. 하필 편집장이 휴가 중이어서 담당자가 원문 그대로 인쇄소에 넘겼다가 그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을 회고하는 이유는 여전히 중국은 이런 점에선 변한 것이 없어서다. 또 그렇다고 마냥 중국이 나쁘다고만 말하고는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특정 대상을 욕하고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나 자신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비난이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려면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를 돌아보는 편이 낫다. 일단 상대 생각을 들어보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나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이번 칼럼은 온전히 이런 의도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最選好 국가에서 最不好 국가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연임에 성공한 후 중국은 ‘제로 코로나’에서 ‘위드 코로나’로 정책을 전환했다. 사진은 1월 8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코로나19 검사센터에서 중국발 입국자들이 검사를 받고 있는 모습. 이날 기준 중국에서 온 단기체류 외국인의 코로나19 누적 양성률은 21.7%에 이르렀다. [뉴스1]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연임에 성공한 후 중국은 ‘제로 코로나’에서 ‘위드 코로나’로 정책을 전환했다. 사진은 1월 8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코로나19 검사센터에서 중국발 입국자들이 검사를 받고 있는 모습. 이날 기준 중국에서 온 단기체류 외국인의 코로나19 누적 양성률은 21.7%에 이르렀다. [뉴스1]

    근래 한국 사회의 반중(反中) 감정은 압도적이다. 한국의 이른바 ‘보수’는 4반(反) 경향을 보인다. 반중-반페미-반노조-반586이다. 이 가운데서도 반중은 가장 소구력 있는 경향성 아닐까 싶다. 중도층 인사들도 반중엔 상당히 동조하고, 이른바 진보 진영 일부까지 반중 주장엔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이다. 역시 ‘외부의 적’을 찾아내는 것이 내부의 적을 압도하는 데 탁월한 선택이 된다. 반중 선전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이유엔 분명 이러한 배경도 한몫 거들고 있을 것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군중의 감정이 일률적일 수는 없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특정 국가에 반발하는 감정이 들끓음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싫다는 사람에게 일부러 좋아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법이다. 모든 반(反)에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문제는 한국 사회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점에 있다.



    딱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 중국은 최고의 파견지이자 최대 유학지, 여행지, 투자처였다. 일반 기업이나 언론사에서 중국 주재원이나 특파원은 미국, 일본 다음으로 취급받거나 동급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근무 이력이 출세 필수 코스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너도나도 중국 지사에 근무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 탓도 있지만 중국 근무 자체를 꺼린다. 최근 어느 회사 인사팀 직원의 말을 들으니 4~5년 전만 해도 공고문을 내기도 전에 물밑 청탁이 밀렸을 정도로 중국 주재원 인기가 높았지만 이젠 썰렁하고, 그나마 가겠다는 사람마저 가족을 동반하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해외로 나가는 사람 3명 가운데 1명의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2012년 해외여행 출국자 1376만 명 가운데 29.6%(407만 명)가 중국을 선택해 2위 일본(14.9%)을 압도했고, 중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은 6만3000명가량으로 2위 미국(2.5만 명), 3위 일본(2.1만 명)의 그것을 완전히 압도했다.

    2012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주당 830여 편의 항공기가 운항돼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하늘로 꼽히는 미국-캐나다 간 항공편 기록을 앞질렀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 관계보다 한국과 중국의 그것이 더 긴밀했던 셈이다. 당시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100만 명이 넘었고, 이른바 ‘차이나 골드 러시’ 바람이 불어 돈 있는 사람은 중국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중국 대도시마다 코리아타운이 우후죽순 성장했다. 베이징 왕징(望京)이나 칭다오의 청양(城陽), 선양의 시타(西塔) 같은 곳에선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젠 중국에 대한 감정과 태도, 상호 교류 관계는 거의 ‘폭락’ 수준이다.

    2017년 3월 15일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중국 항공사 발권 카운터가 한산하다. 이날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취한 한국 단체 관광 금지 조치가 발효됐다. [뉴스1]

    2017년 3월 15일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중국 항공사 발권 카운터가 한산하다. 이날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취한 한국 단체 관광 금지 조치가 발효됐다. [뉴스1]

    ‘중국 만세’ 바람이 급속도로 식었다. 아니, 식은 정도가 아니라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난해 미국의 한 외교 매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인식 비율은 81%로 2위인 스위스(72%)보다 10%포인트가량 높았다. 한국은 세계 1위 반중 국가로 등극했다. 그동안 반중 감정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히던 일본(69%)을 순식간에 앞질렀다. 2015년 실시한 비슷한 조사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 여론은 31% 정도로 최저 수준이었다. 수년 만에 중국을 가장 좋아하던 나라가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돌변했다. 무엇이 중국에 대한 한국의 감정을 극단에서 극단으로 이끈 것일까.

    中 싫은 3가지 이유

    이유는 여럿일 것이다. 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따로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주제이겠으나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고 본다.

    첫째, 현재 한국인의 반중 감정엔 ‘고깝게’ 바라보는 시각이 우선한다. 필자가 처음 중국 옌볜(延邊) 지역을 방문한 1999년만 해도 현지 중국인에게 전달할 선물로 라이터와 스타킹 등을 챙겨 가곤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1회용 라이터가 귀하거나 품질이 좋지 않았다. 스타킹 또한 그랬다. 이젠 중국인에게 이런 선물을 한다면 ‘모욕당했다’고 여길 것이다.

    20년 전 진념 당시 경제부총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중국에 가서 발 마사지를 받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중국인을 발 마사지 해주면서 지낼지 모를 일이다.”

    2018년 6월 6일 서울 중구 롯데면세점 본점 입구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개점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다. [뉴스1]

    2018년 6월 6일 서울 중구 롯데면세점 본점 입구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개점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다. [뉴스1]

    예언은 빨리 이루어졌다. 수년 전부터 한국 백화점이나 면세점에 가면 수백, 수천만 원을 펑펑 써대는 중국인 관광객을 쉬이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이 갖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써줘서 고맙다’고 허리를 숙이면서도 ‘자기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잘살았다고…’ 생각하며 뾰로통해한다. 부유해지면 이에 걸맞은 교양도 갖춰야 하는데, 그저 돈 많은 졸부처럼 행동하는 일부 중국인이 있다. 한국인은 이것에 고까운 감정을 갖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런 중국인을 ‘같잖다’, 혹은 ‘건방지다’고 느낀다.

    둘째, 중국인 ‘개인’만이 ‘졸부’ 행태를 보이는 게 아니라 ‘중국 정부’가 그리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을 일단 ‘이해’ 측면에서 살펴보자. 나라가 부유해지면 정부와 국민이 그만큼 콧대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중국은 ‘급속도로’ 부유해진 것이 특징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륙 단위로 존재하는 거대 국가가 급속도로 부유해진 것 또한 유별난 특징이다.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긴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은 매년 8~10% 성장을 거듭해 왔다. 경제성장률은 일종의 복리계산법과도 같다. 특정 국가가 해마다 10%씩 성장을 거듭하다 보면 7~8년 후엔 덩치가 2배로 자라난다. 중국은 이런 성장을 거의 30년 넘게 거듭해 왔다. 명목 GDP 기준으로 1990년 중국 경제 규모는 1조 달러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18조 달러에 달한다. 그렇다고 중국 국민의 평균적 살림살이가 18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1990년의 중국인과 2020년의 중국인은 완전히 다르게 됐다.

    한국도 이처럼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은 과연 어떠했던가. 그런 차원에서 중국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왕년에는 세계의 반쪽을 차지한 채 호령한 국가가 갑자기 그렇게 성장했으니 ‘이제 우리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으쓱하는 국가적 감정 또한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에게 특별히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 국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중국 정부가 유무형의 압력을 통해 한국을 거칠게 압박하는 행태를 보면서 한국 국민은 ‘나중에 중국이 더 커지면 대체 어떤 일을 벌일까’ 하는 공중심(恐中心)마저 느낀 것이다. 어떤 공포는 쉬이 혐오가 된다.

    셋째는 중국의 거대한 부조리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 우리가 흔히 ‘비(非)동시적 상황의 동시적 존재’라고 말하는 현상이 목격되기 마련이다. 육체는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이를 따르지 못해 경제성장과 정치 발전 혹은 인권 수준이 엇박자를 내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이미 겪은 일 아니던가. “나라는 선진국인데 국민 의식은 여전히 후진국”이라는 푸념이 아직도 나오곤 한다. 그래도 한국은 산업화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거쳤고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거듭해 왔다.

    중국은 어떤가.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가 계속되는 권위주의 국가다. 그저 작은,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라면 남의 나라 내정(內政)이라고 내버려 두겠지만 중국은 세계 1위 경제 규모를 다투는 거대 국가인 데다 한국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유난히 시선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중국의 ‘비동시성’도 도드라져 보인다. 내일모레면 세계 패권을 거머쥔다는 나라가 여전히 반(反)인권적 수형 시설을 운영하고,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반정부 인사가 백주 대낮에 홀연 사라지고, 정부에 밉보인 기업이 순식간에 파산하고, 마치 전시(戰時) 국가처럼 언론과 정보를 통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게 어디 납득이 될 만한 일인가. 아무리 남의 나라 사정이라 할지라도 기본적 상식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 자꾸 벌어지니 한국인은 ‘저 나라가 세계를 쥐락펴락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노여워하는 것이다.

    2019년 8월 7일 홍콩 선수이부구의 한 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반중 시위대를 제압하고 있다. [AP 뉴시스]

    2019년 8월 7일 홍콩 선수이부구의 한 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반중 시위대를 제압하고 있다. [AP 뉴시스]

    이 시대에 ‘제로 코로나’라니…

    여기까지가 최근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중 감정의 굵직한 이유인데, 몇 가지 이유가 더 따라붙는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인의 반중 감정, 특히 세계적 반중 감정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역시 코로나19 사태가 아닐까 싶다.

    일단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武漢) 지역에서 처음 생겨난 것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싹텄는데, 위생 상태가 청결하지 못하고 독특한 식습관을 갖는 것은 그저 ‘문화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특정한 질병이 특정 국가에서 생겨난 것과 관련해 그 나라 정부와 국민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기도 하다.

    중국 당국이 발병 초기에 심각성을 숨겼든 어쨌든, 문제는 ‘그다음’이다. 중국은 이른바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한때는 그것이 각광받았고, 세계가 중국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한국 역시 강력한 봉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떠한가. ‘무언가를 철저히 박멸해 없앤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교훈을 인류는 코로나 팬데믹 과정을 통해 배워나가는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국의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중국 당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웃지 못할 엇박자를 냈다.

    돌아보면 중국 사회가 강력한 권위주의 통제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제로 코로나인데, 그것이 어디 세계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사실은 중국이 자꾸 제로 코로나의 성과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토록 독재적인 국가다’라고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그것을 마치 자랑처럼 내세웠으니, 그것이 웃지 못할 일이라는 뜻이다.

    이제 와 다시금 깨닫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중국 또한 세계화된 자유시장경제 한복판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제로’ 정책이라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제로 코로나를 고집스레 밀어붙였고, 그러다 보니 내외부적으로 온갖 불상사가 생겨났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중국 내부의 이런 진통은 지구촌 각지에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졌고 걱정과 비판, 조롱 대상이 됐다.

    중국공산당의 권력 교체기와 맞물리면서 이른바 제로 코로나 정책은 더 비극적 해프닝이 됐다. 그동안 제로 코로나 정책을 업적으로 자랑해 왔으니 갈수록 되돌리기 힘든 일이 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되고 나서야 중국은 제로 코로나 정책을 슬그머니 ‘위드 코로나’로 바꿨고, 지금 이 시각까지도 중국 내부의 온갖 혼돈 상황이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다. 부디 중국이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무튼 팬데믹과 관련해서 세계는 좋든 싫든 ‘운명 공동체’니까.

    2020년 11월 25일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열린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 방한 반대 집회에서 우한폐렴피해자연대 회원이 차 위에 올라가 오성홍기를 찢고 있다. [뉴스1]

    2020년 11월 25일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열린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 방한 반대 집회에서 우한폐렴피해자연대 회원이 차 위에 올라가 오성홍기를 찢고 있다. [뉴스1]

    反中, 반길 일 아냐

    대책을 논할 차례다. 사실 ‘감정’이라는 것에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을 수 있겠나. 감정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글의 서두에 말한 것처럼 특정한 감정에 들떠 있는 사람에게 ‘그 감정을 눅이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당사자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하는데, 중국 당국이 이 문제를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반중 감정을 그저 ‘미국의 농간’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국인의 냄비 같은 감정 기복 현상’이라고 비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중국은 지금 심각한 오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혹시 이 글을 읽고 있을지 모를 중국 당국자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하고 싶다.

    한국 처지에서도 이웃 나라와 계속 ‘척지는’ 관계로 불편하게 사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반중 감정을 마치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저러는 걸까’ 하는 야릇한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최근 세계적 반중 감정은 대단히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반중은 ‘우리(미국) 국민의 일자리를 중국이 뺏어간다’는 극우적 선동에 가까웠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반중 기조를 바꿀 줄 알았더니 ‘자유민주 미국 vs 공산독재 중국’이라는 더 세련된(?) 반중 프레임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과거 사회주의권을 무너뜨린 것처럼 ‘이제 남은 숙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듯한 결기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일인지, 1970~80년대와 지금 세상이 과연 같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양대 거대 시장인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고 거기에 다시 북한이 기생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그 또한 복잡하고 두려운 셈법이다. 이미 중국과 상당한 교류와 투자를 지속해 온 데다 앞으로도 중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한국에게 지나친 반중 기세는 사실 그리 반길 만한 현상은 아니다. 특정한 흐름에 눈에 띄게 밀착하는 것은 어쩌면 도박과도 같은 일이 된다.

    세상에 간단한 일은 없다. 세상을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중국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래저래 이성(理性)을 말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다. 흙먼지가 들끓는 가운데 “상대의 입장도 두루 살펴보자”고 강조하면 짐짓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누군가는 애써 용기를 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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