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적분할 어려워지니 인적분할로 선회
호재는 옛말, 연이은 주가 하락
회사 위해서? “시장은 답 안다”
비용 없이 오너 지배력 높이는 ‘자사주 마법’
“자회사 상장, 한국에만 있는 奇현상”
지난해 기업들은 연이어 인적분할을 발표했다. 물적분할에 대한 소액주주 반발을 의식한 조치지만 이마저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각 회사, [Gettyimage]
개미 한명 한명의 한(恨)은 모여 여론이 됐고, 불거진 문제의식은 정부를 움직였다. 지난해 12월 20일 열린 국무회의에선 ‘물적분할 자회사 상장 관련 일반주주 권익 제고방안’ 내용이 담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의결됐다. 물적분할에 반대하는 주주에게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골자다. 주식매수청구권은 회사로 하여금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매수하게 할 수 있는 권리다. 기업으로선 청구권을 행사하는 소액주주의 주식을 사들여야 한다. 물적분할에 따르는 비용이 커진다.
개미들 스스로도 더는 당하지만은 않았다. 지난해 9월과 10월 DB하이텍과 풍산이 물적분할을 시도하자 ‘물적분할반대주주연합’을 발족하고 회사를 상대로 주주명부 열람·등사 요구 및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결국 DB하이텍과 풍산은 물적분할 결정 철회를 알리며 백기를 들었다. 이제 기업은 제도 때문이든, 여론 때문이든 물적분할을 단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인적분할’로 눈을 돌렸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인적분할을 공시한 상장사는 2021년 5곳에서 지난해 13곳으로 늘었다. 특히 9월 이후에만 이수화학, OCI, 현대그린푸드, 현대백화점, AJ네트웍스, 아주산업, 대한제강, 한화솔루션, 동국제강 9곳이 인적분할 결정을 알렸다. 주가는 또 곤두박질쳤다. 물적분할이나 인적분할이나 결과는 매한가지. 개미로서는 물적분할이라는 호랑이를 겨우 피했더니 인적분할이라는 사자를 만난 셈이다.
‘호재’라더니…
인적분할과 물적분할은 결과적으로 회사를 쪼갠다는 점에선 같지만 소액주주 보호 차원에서 인적분할이 물적분할보다 더 낫다고 여겨져 왔다.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하면 모회사 주식에서 신설회사에 해당하는 가치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인적분할은 기존 주주에게 신설회사 주식이 주어지기에 이 점에선 영향을 덜 받는다. 오히려 한 회사에 혼재됐던 사업을 회사 분할을 통해 각기 전문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11월 23일 OCI는 지주회사 OCI홀딩스와 사업회사 OCI로 인적분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튿날 OCI주가는 5.96% 내렸고 3거래일 연이어 하락했다. 11월 29일엔 이수화학이 석유화학 부문과 정밀화학 부문, 전고체 배터리 소재부문으로 인적분할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튿날 이수화학 주가는 장중 12%까지 급락했다. 동국제강은 12월 9일 지주사 체제 전환을 알리며 기존 동국제강을 지주사(동국홀딩스)로 바꾸고, 신설 법인으로 동국제강(열연 부문), 동국씨엠(냉연 부문)을 세우는 인적분할 계획을 발표했다. 역시 다음 거래일(12월 12일) 주가는 9.67% 급락했다.
“오너 좋으려고 하는 거니까”
경영 효율성 강화, 미래 성장 동력 발굴,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 강화, 기업 구조 선진화, 주주 이익 제고…. 인적분할 발표에 따라붙는 명분이다. 이대로라면 주가에 나쁠 이유가 전혀 없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애널리스트 A씨는 “무엇이라 포장하든 시장은 답을 알고 있다. 기업가치가 오를 것 같으면 주가는 상승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락한다”며 “인적분할이 진정 기업과 주주를 위한 것이라면 주가는 당연히 오르게 마련이다. 주가가 하락했다면 같은 원리로 해석이 가능하다. 시장이 인적분할을 기업과 주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결국 ‘누구에게 좋은 인적분할인가’에 대한 답은 오너 일가로 귀결된다. 분할 목적이 오너 일가의 이익 독점, 지배력 강화로 이어지니 주가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일례로 OCI는 인적분할이 경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고(故) 이수영 회장의 장남 이우현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키우기 위함이라고 본다. 낮은 OCI 지분율이 근거다. 이 부회장의 지분은 5.04%에 그친다. 이수영 OCI 회장 동생인 이화영 유니드 회장과 이복영 SGC그룹 회장이 각각 5.43%, 5.40%로 1·2대 주주다. OCI홀딩스는 향후 공개매수를 통한 현물출자와 유상증자 등을 통해 OCI를 자회사로 편입할 계획이다. 이 부회장은 OCI 지분을 내놓고 OCI홀딩스 지분을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OCI홀딩스와 OCI의 사업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도 지적받는다. OCI홀딩스와 OCI는 각각 태양광용 폴리실리콘과 반도체용 폴리실리콘 사업을 영위할 계획이다. 반도체용 폴리실리콘의 순도가 더 높을 뿐 두 생산라인은 서로 전환될 수 있다.
동국제강의 인적분할도 장세주 회장의 장남 장선익 전무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국제강은 장세주 회장이 13.94%, 장 회장의 동생 장세욱 부회장이 9.4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장선익 전무는 0.84%에 불과하다. 장 회장의 지분을 물려받을 수 있긴 하지만 막대한 상속세가 부담이다. 동국제강 역시 동국홀딩스의 동국제강과 동국씨엠 지분 확보를 위해 공개매수로 현물출자와 유상증자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OCI와 같은 방식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우 매년 2000억 원 상당 현금을 벌어들이는 ‘캐시카우’ 한무쇼핑을 사업회사가 아닌 지주회사에 둔 것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진협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한무쇼핑을 사업회사에서 분리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며 “백화점 사업부에 대한 분할을 야기하며, 이에 따라 한무쇼핑에 대한 NAV(순자산가치) 할인율 적용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주영훈 NH투자증권연구원은 “경영권 강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지선 회장의 지분율이 17.09%로 높지 않은데, 사업회사 지분을 지주회사에 현물출자 하는 과정을 통해 지분율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세 가지 사례 모두 대주주는 특별한 자금 소요 없이 신설 회사 주식을 지주사에 넘기고, 지주사가 새로 발행하는 주식을 받으며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수 있다.
없던 의결권도 만들어내는 자사주 마법
이른바 ‘자사주 마법’도 인적분할을 통한 오너 일가 지배력 강화에 기여한다. 자사주 마법이란 자사주를 보유한 기업이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 자사주의 의결권을 살려내 추가 출자 없이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지배력을 높일 수 있어 금융계에서 ‘마법’이라는 별칭을 달았다.자사주엔 의결권이 주어지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인적분할에 따라 신설회사 주식을 배분하면 자사주에도 신주를 배정한다. 자사주에 의결권이 생기고, 대주주의 지배력이 커지는 효과가 생긴다. 주식 가치가 희석됨은 당연하다. 인적분할을 공시한 기업 가운데 자사주 비율이 높은 대한제강(24.7%), 현대백화점(6.6%), 동국제강(4.1%), 이수화학(2.7%) 등은 소액주주 피해 가능성이 더 높은 셈이다. OCI의 경우 자사주 비율이 1.26%지만 매입 시점이 인적분할 발표 직후라 논란을 키웠다.
지난해 8월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상장기업 인적분할 사례 193건을 분석한 결과 인적분할 후 지배주주의 존속회사 지분율은 15%포인트, 신설회사 지분율은 11%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외부 주주의 보유 비중은 분할 전보다 6%포인트 줄었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사주를 이용한 지배력 강화는 정당성 논란을 피할 수 없다”며 “자사주 취득은 곧 소각으로 간주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회사를 분리해 상장하는 ‘쪼개기 상장’은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 Gettyimage]
“선진국에선 일어나지 않는 일”
전문가들은 “결국 분할 자체보다 목적이 문제”라고 분석한다. 문성후 한국ESG학회 부회장(연세대 환경금융대학원 겸임교수)은 “‘지배구조 개선’이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의사결정 구조가 더 수평적·민주적으로 이뤄진다는 의미다. 현재 인적분할 행태에선 딱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결과로 증명하지 못하면 인적분할에 따르는 명분은 그저 오너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둘러댄 구실이 된다”고 지적했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도 “경영 효율성 관점에서 회사 분할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한국에선 순전히 오너 일가의 그룹 지배권 강화를 위한다는 게 문제”라며 “한국에선 인적분할을 악용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고 지적했다. 해결 방안으론 “쪼개기 상장을 막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세계에서 한국은 상장 자회사를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선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곤 상장 자회사를 두지 못한다. 자회사 상장을 허용하면 모회사 주주와 자회사 주주 간 이해 충돌이 벌어지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제도하에선 물적분할이든, 인적분할이든 달라 보여도 결과는 같다. 오너 일가의 지배력은 강화되고 소액주주의 권리는 약해진다. 자회사 상장을 막는 것이 근본적 대책이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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