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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대선 뒤흔든 대한민국 50대의 자화상

  • 고승철│소설가 koyou33@empas.com

질풍노도의 격동시대 뚫고 거울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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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인 1972년 가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국회가 해산됐다. 그해 12월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했다. 민주주의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까까머리 고교생이 알았다. 그때 창간된 문학잡지 ‘문학사상’은 청량제였다.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으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1973년 1월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중점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나라 경제가 위기를 맞는 듯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를 치렀다. 머릿속에 질풍노도(疾風怒濤) 상황이 벌어졌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랴. 첫 대입에서 떨어졌다. 참담했다. 내 업보이니 누구를 탓하랴. 답답해서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 소유의 배를 타고 멀리 일본이나 베트남으로 밀항이라도 할까 하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 바로 유학 가는 길은 없나 하고 궁리하기도 했다.

이듬해 대학입시에서 또 실패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불운 때문이었다. 당시엔 걸핏하면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터졌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변명처럼 들릴까봐 주위에 밝히지 않았다.

긴급조치 시대…사라지는 학생들

1975년 들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입에 또 도전했다. 이번엔 무난히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서울대는 캠퍼스를 관악산으로 옮겨 문을 열었다. 1학년 때는 소속 학과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반별 수업이 진행됐다. 같은 반원 가운데 강금실 양(전 법무장관), 박원순 군(서울시장), 정과리 군(문학평론가, 본명은 정명교), 안창호 군(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석기 군(연극인 윤석화 씨의 남편) 등이 있었다.



그해 4월 인민혁명당 관련자 8명이 북한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선고 당일에 처형됐다. 서울대 농대 김상진 학생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할복자살했다. ‘김상진 열사’ 추모 시위로 서울대 정문 앞에는 최루탄 연기가 그득했다. 5월엔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이 조치는 유신체제를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수색할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박원순 군은 초기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했다. 골수 운동권도 아닌 신입생에겐 가혹한 조처였다. 개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는 문을 닫았다. 이렇듯 대학 졸업 때까지 거의 모든 학기마다 정상적인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필자도 몇몇 ‘서클’(당시엔 ‘동아리’ 대신에 ‘서클’이라 불렀다)에 들어가 현실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했다.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는 서클의 분위기가 자유인을 추구하는 필자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유신타도’에 앞장서다 구속된 고교 친구 주대환 군(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서익진 군(경남대 교수)이 재판을 받을 때 방청하러 가니 죄책감이 엄습했다. 하숙집에서도 하숙생들이 자주 사라졌다.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끌려간 것이다. 남은 하숙생들은 시국을 논하며 밤새도록 소주를 마셨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그해 12월 12일 하극상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보도 통제를 하는 바람에 대다수 국민은 이런 소식을 한동안 전혀 몰랐다.

국가 지도자 뽑는 의미 절감

전공이 경영학이라 대학 동기생들은 거의가 대학원, 은행, 공무원, 기업 등으로 진출했다. 삼성, 현대, 럭키금성(요즘의 LG), 대우 등 대기업에서는 똘똘한 신입사원들을 확보하려고 명문대 출신 사원들을 모교에 보내 후배들을 유치하도록 했다. 선배들은 술과 밥을 사며 입사를 권유했다.

필자는 동아일보 시험에 합격해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1980년 늦가을에 신군부 정권이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됐다. 당시엔 문화방송(MBC)과 경향신문만이 신입사원을 뽑았다. 신경민 전 MBC 앵커(민주당 의원) 등 입사 동기와 함께 1981년 1월부터 기자로 일했다. 그해 2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신문, 방송에 주요 뉴스로 보도됐다. KBS, MBC의 오후 9시 뉴스에서 머릿기사는 으레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여서 ‘땡전 뉴스’라는 말이 나왔다.

전 대통령이 집권한 7년간의 ‘5공 정권’은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비판을 막았다. 그러면서 야간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프로야구 개막 등 유화책도 동원했다. 1983년 5월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한 달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다.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더욱 가열됐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등 민주화 투사 대학생들이 숨졌고 이들을 추모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1987년 6월 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6월 10일에는 수십 만 명의 시민,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6·10 민주항쟁’에 30~40대 직장인인 ‘넥타이 부대’가 대거 참여해 민심이 전두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졌음을 보여줬다. 한국은행 출입기자이던 필자는 그때 플라자호텔 꼭대기 층에서 시위 광경을 지켜보았다. 서슬 시퍼렇던 독재정권이 시민들의 단결 앞에 무너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바뀌어 1987년 12월 국민은 오랜만에 제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후보가 출마해 군인 출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야당 후보의 낙선은 후보 단일화 실패 탓이었다. 오늘날 50대는 그때 처음으로 대통령선거를 해봄으로써 국가지도자를 뽑는 의미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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