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개인의 고유성이나 독립성을 중시하고 개인적 성취와 목표를 최우선시하기보다는 집단과의 화합, 조화, 공존을 중시하고 개인의 성취보다 집단의 목표를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가졌다. 이에 대해 사회적 관계에서 평등적 관계보다는 위계적 관계를 더 우선시하고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자신이 속한 내집단에 단지 더 애정을 갖는 게 아니라 내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 내집단 내의 구성원도 평등하기보다는 위계적으로 짜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한국인에게 갑을 관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이런 수직적, 집단주의적인 심리 특성이 관계성과 주체성이라는 한국인의 또 다른 특성을 만날 때 갑을 관계가 갑질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문화에서 사람들은 대개 집단 속에서 주어진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민감하다. 오히려 개인적인 관계보다는 전체에 속한 작은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한다.
일본인이 일반적으로 매우 순종적이면서 자신의 주어진 역할에 완결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조용히 살아가는 반면 한국인은 집단 속의 작은 존재이기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기를 원하고 주어진 역할이나 원칙보다는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무시받는 느낌’에 유달리 예민하다.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거나 존재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을 때 무척 짜증을 낸다.
규칙과 원칙, 정해진 바대로 하는 것보다 그 순간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더 중시하는 경향도 있다. 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서로의 행동을 집단의 작용으로 보기보다는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쌍방 당사자 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너, 나 무시하지?’
한국 사람이 가진 관계성과 주체성이라는 특성은 갑을 관계를 더욱 악화한다. 상대방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는 공식적 역할관계보다 나와의 관계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감이 인정받아야 하며, 이걸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게 된다.
이런 외침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자신감이 없거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광복과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기성세대 대부분은 매우 불우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어려움을 극복한 자부심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가졌다. 또한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지난 세월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는 자신의 존재감이 독립적으로 위치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자식, 누구의 상사, 누구의 친구, 누구의 부하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감을 갖게 한다.
갑질의 원인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다. 결국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 존재감과 관련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갑질을 통해 그 관계를 갑을 관계로 규정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매우 불쌍한 방어적 악순환에 빠진다. 그래서 대기업 오너의 가족이건, 식당 손님으로 온 보통 사람이건, 택시를 탄 승객이건, 갑질의 시작은 대부분 ‘너, 나 무시하지?’로 시작된다. 아마도 궁극적으로 더 많은 한국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관계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게 될 때 갑질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고객을 사랑해도 되나요?
갑질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때마다 우리는 늘 갑에만 초점을 맞춘다. 을은 대부분 피해자로 여겨 불쌍하다는 정서적인 위로를 건네받지만, 을의 위치나 심리를 분석하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나마 논의되는 주제로 감정노동에 관한 담론이 있다. 근무 중에 타인에게 특정 (대부분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업무를 보통 감정노동이라고 한다.
이런 감정노동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스트레스와 다양한 신체적, 심리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정 경험과 표현은 우리가 통제하기 힘든 자동적인 심리기제를 통해 일어난다. 실제로 인지할 수도 없는 식역하자극(너무 빠르게 제시돼 실제로 봤는지도 알 수 없는 자극)으로 뱀의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자신이 뱀을 봤는지도 모르지만 두려움과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감정의 표현과 관련 있는 얼굴근육은 불수의적인 특성을 가졌다.
이렇게 자신이 어찌하기 힘든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 직업은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시대적 추세에 따라 감정노동에 근무하는 노동자 수가 늘어나는 현실은 이런 문제가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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