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 “이제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입력2003-08-25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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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활한 대지와 짙푸른 초목이 이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라바쉬까지 162km. 그 사이로 흐르는 강줄기를 타고 구한말 한인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 때로는 강을 끼고, 때로는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 위에.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한인마을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던 연해주 남부 핫산지역. 그 북부 중심에 바라바쉬(Barbash)라는 마을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남쪽으로 162km 정도 거리에 있는 이곳은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리적 환경적 여건 덕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중국이나 북한 국경지대로 가는 도중 바라바쉬를 그냥 지나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곳을 지나고 나면 국경 근처에 다다르기까지 마땅한 식당이나 가게가 없어 밤늦은 시간까지 굶어야 한다. 주유소도 없다. 중간에 가스나 기름이 떨어지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이런 사정으로 오늘날 바라바쉬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주유소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들이 많다.

    바라바쉬는 중국과의 국경지대로부터 아무르만으로 흐르는 주요한 강 가운데 하나인 바라바쉐프카(Barab-ashevka)강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옛 명칭은 ‘몽구가이(Mongugai)’, 한자로는 몽고가(蒙古街)로 표기했다. 바라바쉐프카강 역시 과거에는 ‘몽구가이강’이라 불렸다. ‘몽구가이’는 18세기에는 ‘메이구헤(Meigukhe)’로 불렸던 지명인데,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러시아 지도에 ‘몽구(Mongu)’ ‘뭉구(Mungu)’ ‘망구(Mangu)’ 등으로 표기되기 시작했고, ‘맹구가이(Mangugai)’에 이어 몽구가이(Mongugai)로 불렸다.

    한인들은 이 지역 일대를 ‘멍고개’라 부르기도 했는데, 원래 지명인 ‘몽구가이’의 발음에 우리말 해석을 담아 ‘맹고개(孟古介)’ ‘맹령(孟嶺)’ ‘맹현(孟峴)’ ‘맹산동(孟山洞)’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2년 말 또는 188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맹고개관(孟古介館)’에 수비병 30명이 있고, 러시아인 30여 가호가 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한인들은 바라바쉬를 ‘맹고개관’이라 불렀고, 또 이 지역에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기록에는 ‘맹고개영(孟古介營)’으로 표기돼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의 중심지

    1911년경 일본군 첩보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바라바쉬에 주둔한 러시아부대의 병력은 약 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정부가 바라바쉬를 군사전략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890년대 초반 노보키예프스키 주둔 러시아 경관은 철도간선부설관리국의 통역인 최재형에게 지시해 노보키예프스키 러시아군영의 병졸 300여 명과 주변 한인들로 하여금 노보키예프스키로부터 몽구가이(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게 했다. 대거 동원된 한인들의 인건비는 러시아 당국에서 지불했다. 이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들까지 러시아정부의 토지분배에 대한 보상명목으로 도로건설 공사에 동원돼 노보키예프스키에서 두만강 하구의 포드고르나야까지, 라즈돌리노예로부터 스찬강(현재의 파르티잔스크강)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가 건설됐다.

    바라바쉬, 즉 과거의 몽구가이는 이처럼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전략상 중요한 마을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기 주변에 많은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이 생겨난 것도 이런 연유다.

    1906∼07년경 몽구가이강가에 위치했던 주요 마을들을 강 하구로부터 소개하면, 러시아마을 보고슬로브카(Bogoslovka), 한인마을 니즈네예 몽구가이(Nizhnee Mogugai), 러시아마을 포포바 고라(Popoba Gora), 러시아마을 우로치쉬체 바라바쉬(Urochitsshe Barabash), 러시아마을 오브치니코바(Ovchinnikova), 한인마을 베르흐네 몽구가이(Verkhne Mongugai) 등 6개 마을이다. 당시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은 이처럼 서로 뒤섞여 있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한인마을이 몽구가이강가에 처음 형성된 것은 1885년 무렵이었다. 강 하구 쪽에 위치해 있던 니즈네예 몽구가이, 즉 하(下)몽구가이가 가장 먼저 생겨난 마을이다. 통칭 몽구가이라고 하면 바로 이 마을을 일컫는다. 베르흐네 몽구가이, 즉 상(上)몽구가이가 생기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해 ‘아랫마을’이라는 뜻의 ‘니즈네예’를 붙인 것이다.

    이밖에도 문헌상에 나타난 몽구가이강 주변 분지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들로는 1919년 당시 몽구가이 주둔 헌병분견소 관할 내의 상사평(上砂坪, 몽구가이 서북방 약 8km), 남촌리(南村里, 몽구가이 북방 10km), 상개척(上開拓 또는 山開拓, 몽구가이 서방 16km) 등이 있다. 1914년경 몽구가이를 중심으로 몽구가이강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총수는 2500명에 달했다.

    몽구가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의병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주목받는 지역이 됐다. 1911년 5월24일 홍범도, 전제익, 허근(허영장), 이진룡, 조장원, 이춘식, 김중화, 최병규, 엄인섭 등 의병파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운동 개시를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집결장소를 몽구가이로 정했던 것이다.

    한편 몽구가이강 아래쪽으로 흐르는 케도르바야 파지(Kedorvaia Pad)강 주변에도 한인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강의 이름과 같은 케도르바야 파지의 집들은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은 몽구가이로부터 약 15km 거리에 있었는데, 다시 방천목(Panchaimoigi)과 치무허(Tsimukhe)라는 두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치우허가 본래의 케도르바야 파지마을이다. 러시아 지명으로 수호레치예(Sukhorech’e)라고 불리기도 한 방천목은 아무르만 건너편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운송되는 물산, 특히 만주로부터 실려오는 가축들이 집결됐던 곳이다. 1885년 당시 케도르바야 파지를 거쳐 운송되는 가축의 수는 연간 7000두에 달했다. 당시 이 마을에는 23가구가 거주하였는데, 20가구의 한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여호인(餘戶人)이었다.

    방천목의 주민들은 극히 소수만이 농업에 종사했고 대다수는 만주로부터 가축을 실어오는 마부들과 각지로부터 와서 기항하는 거룻배 선원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비해 치무허 마을 주민들은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

    오늘날의 모습은 어떨까. 2002년 7월초 필자는 조사단을 이끌고 바라바쉬, 즉 옛 몽구가이를 찾았다. 바라바쉬에는 지금도 러시아 군영이 있다. 마을 곳곳에 군인들의 막사가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옛 한인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사단은 한 러시아 노인의 안내를 받아 몽구가이강 일대 6개 마을 가운데 아직까지 옛 이름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오브치니코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한인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러시아 할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집 앞뜰에 있는 우물을 보여주었는데, 한인들의 우물을 보고 이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깊은 우물을 돌로 둘러싼 완연한 한국형 우물이었다. 텃밭 한가운데 오래 전에 한인들이 사용했음직한 우물도 남아 있었다. 또 집안 여기저기에는 돌절구, 맷돌 등 한인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어 만난 일리야 포도르비치씨로부터 보다 생생한 증언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집 옆에 남아 있는 작고 낡은 집을 가리켰다. 한인 콜호스(옛 소련의 공동체마을)의 상점으로 ‘트락토르’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했다. “그 상점의 주인은 콜호스 책임자인 김파벨이라는 고려인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고 포도르비치씨는 회고했다.

    비옥한 농토, 풍부한 농업용수

    1928년에 출생해 올해 75세가 된 이 노인은 아홉 살 때이던 1936년 한인 콜호스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한인들과 함께 한글을 배웠다. 학교 교장인 아버지는 한인이었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아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하니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열’을 세더니 “한글을 좀더 오래 배웠으면 지금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당시 자기보다 아홉 살 위였던 형은 한국어를 잘해 통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도르비치씨에 따르면 몽구가이에는 100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비교적 잘살았다고 한다.

    러시아정부의 강제이주 당시에 대해 그는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들은 이주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결국 집들만 남게 됐다.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 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5가구만 남았다. 현재의 오브치니코바 주민들은 후에 러시아 중부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포도르비치씨는 과거를 회상하듯 “이제 한인들이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오브치니코바에 사는 여러 노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1937년 강제이주 직전 몽구가이는 1000명 규모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고, 적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1906년경 23가구 125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것이 30년 만에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셈이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와 바라바쉬 사이 곳곳에도 한인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라즈돌리노예강 하구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라즈돌리노예도 그 중 하나다. 1895년경 형성된 이 마을은 초기에 여호인(餘戶人) 30가구가 살았으나 10년 후인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라즈돌리노예강, 즉 옛 수이푼강 하구 일대에 광활한 습지의 삼각주가 형성돼 있는데 비옥한 농토에 농업용수가 풍부해 농사를 짓는 데 최적지라는 환경여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라즈돌리노예를 지나 남쪽 아무르만의 서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라즈돌리노예강 하구로 들어가는 4개의 지류가 나타난다.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발원해 동쪽의 아무르만으로 흘러드는 이들 강은 페르바야 레츠카(Pervaia Rechka, 첫 번째강), 후타라야 레츠카(Vtaraia Rechka, 두 번째강 또는 칭거우재 Chingouza), 산두거우(三道溝, San’daugou, Sadagou 또는 Sandagu, 현재의 네진카강 Rechka Nezhinka), 얼두거우(二道溝, Erdaogou 또는 El’dagou, 현재의 아나녜프카강Rechka Anaen’evka), 그라즈나야강(Rechka Griaznaia)이다. 이들 강 주변에는 강 이름과 같은 이름의 한인마을들이 있었다고 한다.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바라바쉬에 남아 있는 옛 한인 콜호스의 상점 ‘트락토르’ 건물.

    라즈돌리노예에서 차량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인마을 하나가 있다. 1910년 여름 연해주 의병세력의 총집결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됐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암밤비(Derevnaia Ambambi)마을이다.

    러시아측 자료에는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이 임박한 1910년 7월21일, 이범윤 유인석 홍범도 이상설 등 연해주에 집결해 있던 의병지도자 150명이 ‘암밤비’에서 대회를 개최하고 13도의군을 결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말 의병운동 연구자인 박민영 박사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은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연보(年譜)에 13도의군의 결성장소로 명시되어 있는 ‘재구(梓溝)’를 ‘자피거우’의 음역(音譯)이라고 보고, 우수리스크 서남방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 재피거우(협피구(夾皮溝), Chapigou 또는 Tsziapigou)로 추정해왔다.

    지난 2001년 여름 러시아 원동지역의 독립운동유적 조사활동에서 필자와 함께 지신허의 위치를 찾아냈던 박민영 박사는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로부터 6∼7km 동북방에 위치한 또 다른 제2의 ‘자피거우’ 지역에 주목했다. 박박사는 이 자피거우에도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종전 자신의 견해를 수정, 지신허 일대가 바로 13도의군의 결성장소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13도의군의 결성장소와 관련해서는 러시아측 기록과 한국측 기록이 일치하고 있지 않은 데다가, 유인석 선생 연보에 기록돼 있는 ‘재구(梓溝)’를 어디로 파악할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다. 필자는 답보상태에 있는 학계의 논의를 진전시킬 돌파구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자료에 거론된 마을과 지역에 대한 답사·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러시아측 기록에 나타난 암밤비가 암바-비라(Amba-bira)강가에 있었던 한인마을 암바-비라(Derevnia Amba-bira)가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암바(Amba)강, 즉 옛날의 암바-비라강은 그라즈나야강에 비하여 강폭이 훨씬 넓었다.

    1895년도에 작성된 러시아 지도에도 암바-비라라는 마을이 그 이름처럼 암바-비라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퉁구스 계통의 지명인 암바-비라의 어원은 애매하나 일반적으로 ‘호랑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퉁구스계 원주민이 이름을 붙인 암바-비라강은 1860년에 러시아식 표기인 ‘암바-벨라(Amba-bella)’ 또는 ‘암바-벨라야(Amba-belaia)’로 표기되다가 뒷부분을 빼고 현재의 이름인 암바강으로 불리고 있다. 암바강은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내려와 아무르만의 페스차누이(Peschanyi) 반도 북편의 페스차나야(Peschanaia)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서상 ‘자피거우’는 최소 3개

    앞서 언급했던 조선 왕조 관리 김광훈과 신선욱의 ‘강좌여지기’에는 암바-비라강 주변의 모습을 “지형은 평탄하고 농사를 크게 진다. 동서(東西)는 가히 50리에 이르고 남북 또한 20리가 된다. (부근에) 호인촌(胡人村) 50여 호가 있고…산세는 수려하고 물은 맑다”라고 기록돼 있다.

    1895년 당시 암바-비라는 베르흐네 암바-비라(Verkhne Amba-bira, 상(上)암바-비라)와 니즈네예 암바-비라(Nizhnee Amba-bira, 하(下)암바-비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상암바-비라는 연해주 남부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우편도로 왼편, 즉 서쪽으로 20베르스타(약21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17가구가 살고 있었다. 또 하암바-비라는 우편도로의 오른쪽으로 4베르스타(약 4km)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1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암바-비라의 주민은 꾸준히 늘어나게 되는데, 1906년경에 상암바-비라에는 24가구 90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한인들이 사용했던 우물터. 러시아인들은 이 우물 물을 농수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13도의군 창설과 관련된 학계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관련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20년에 작성된 일본 외무성 자료에서 수이푼 지역의 자피거우나 지신허마을 근처의 자피거우와는 별개인 제3의 ‘자피거우’라는 지역이 있었고 이곳에 한인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자료상으로는 최소한 3개의 ‘자피거우’가 확인된 셈이다. 이 가운데 특히 새로 발견된 제3의 자피거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암바강가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 ‘암바-비라’와 거의 비슷한 지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13도의군 결성지와 관련, 러시아측 기록과 한국측 기록 간에 서로 다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됐다. 즉, 유인석 선생 연보상의 ‘재구(梓溝)’를 박민영 박사의 해석에 따라 ‘자피거우’의 음역이라 보면, ‘재구(梓溝)’나 러시아측의 ‘암바-비라’ 마을은 아마도 같은 지역을 일컫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점은 다른 자료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입수한 1930년대 초반에 작성된 러시아 지도에는 자피거우가 암바-비라강 남쪽 멜코보드나야만으로 흘러드는 보로딘스키(Vorodinskii)강가에 표시돼 있었다. 자피거우는 바로 암바강 바로 옆 보로딘스키강과 마류틴카(Maliutinka)강이 합류하는 강 하구 분지에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13도의군의 결성장소가 ‘암바-비라’냐 자피거우의 한인마을이냐에 대한 논의는 이제 한 단계 진전된 상태에서 계속될 것이나, 러시아측과 한국측 자료간 상이한 기술내용에서 비롯한 현격한 해석의 차이는 상당히 좁혀진 셈이다.

    바라바쉬 일대의 또 다른 한인마을은 서남쪽에 위치한 아지미(芽芝味)와 시지미(柴芝味)다.

    아지미는 1872년 조선으로부터 온 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됐다. 이 마을 역시 베르흐네(上) 아지미, 니즈네예(下) 아지미 등 두 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18세기 중국의 역사지리서에는 하치미(Khatszimi)로 표기돼 있는데,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지도에는 아지미(Adimi)라 표기됐다. 한편 한인들은 이 지역을 상농평, 하농평으로 달리 부르기도 했다.

    하아지미는 현재 포이마(Poima)강으로 불리는 아지미강 하구로부터 4km에 걸쳐 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1885년 당시 하아지미에는 예배소와 학교, 그리고 제10동부시베리아보병대대 소속 하사관과 12명의 병사가 배치된 러시아초소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또 남부 연해주 한인사회의 행정, 경찰, 문화 중심기관들이 위치해 있기도 했다.

    하아지미로부터 강을 따라 1.5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상아지미가 나온다. 상·하 아지미가 자리잡고 있는 분지의 길이는 약 12km에 달했다. 그러나 폭은 2km에 불과했다. 1906∼07년경 아지미의 주민 수는 상아지미에 52가구 326명, 하아지미에 63가구 438명이었다. 1914년경에는 총 주민수가 8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마을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1893년부터 한인들의 국적취득이 허용되면서 한인자치행정조직인 도회소가 설치됐었다는 것. 아지미의 도회소는 북도소(北都所)라 했고, 비슷한 규모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인 연추마을(‘신동아’ 7월호 참조)의 도회소를 남도소(南都所)라 불렀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7년 당시 아지미는 22개 촌을 총괄하면서, 10개 촌을 총괄하던 연추마을과 함께 ‘오블라스트(Oblast)’로 불릴 정도의 대촌(大村)이었다. 또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한인민회가 조직됐는데 1917년 6월 연추와 아지미에 각각 한인민회 본부가, 그 산하 각 마을에 지부가 설치돼 자치행정을 실시했다.

    현재 아지미는 1937년 강제이주로 한인들이 떠나면서 러시아마을이 됐고, 마을명칭도 바뀐 상태이다. 상아지미는 1972년에 포이마(Poima)로, 하아지미는 로마쉬카(Romashka)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

    시지미(Sidimi 또는 Sedimi)는 바라바쉬에서 서남쪽 20km 거리에 있던 시지미(Sidimi)강가에 있던 마을이다. 이 강은 현재 나르바(Narva)강으로 불린다. 시지미라는 지명은 중국의 역사지리서에 ‘에치미(Ethsimi)’ 또는 ‘이치미(Itszimi)’로 표기되다가, 1860년대 러시아 지도와 출판물에 ‘니지미(Nidzimi)’ ‘시디미(sidimi)’ ‘세디미(Sedimi)’ ‘시데미(Sidemi)’ 등으로 쓰였다.

    시지미는 1867년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농민들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마을이 위치한 시지미강 분지는 길이가 약 10km, 폭이 1∼2km에 이른다. 1885년 당시에는 베르흐네 시지미와 니즈네예 시지미가 있었는데, 1899년경 이 두 마을 중간에 스레드네예 시지미(중(中)시지미)가 형성됐다. 이 중 상시지미에는 제8동시베리아보병대대 소속 하사 1명과 12명의 병사가 배치된 러시아 초소가 설치돼 있었다.

    상시지미 마을의 주민들은 재배한 귀리를 바라바쉬 일대에 내다 팔곤 했는데, 오랫동안 꾸준하게 경작에 힘쓴 결과 다른 마을에 비하여 꽤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하시지미 마을 역시 경작한 귀리를 평저선과 거룻배에 실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다 팔았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잦은 홍수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6년경 시지미에는 상시지미 55가구 358명, 하시지미 55가구 339명과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합쳐 총 230가구 119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4년경에는 약 450가구 2000명으로 늘어나 이 지역 한인마을 가운데 손꼽힐 정도의 대규모 마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9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과거의 시지미강(현 나르바강) 주변에는 가옥이 전혀 없다. 러시아 군부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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