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소수민족은 수차례 중국 통일의 주역이었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최근세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의 민국시대(1911~1949)에는 아예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이라는 ‘5족공화(五族共和)’ 슬로건을 걸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이후인 1953년에 등록된 민족 명칭은 수백개에 달했고 윈난(雲南)지역에만 206개의 민족이 있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국가의 정체성을 통일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임무는 민족의 평등과 단결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의 종류와 명칭을 식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작업은 한족인지 아닌지를 식별한 뒤 소수민족 내부에서 다시 식별하는 두 단계를 거쳤다. 관련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현지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사람들이 일정한 역사와 그 발전단계에서 형성한 공동의 언어, 공동의 지역, 공동의 경제생활과 공동의 문화라는 특징이 나타나는 공동의 심리적 소양을 지닌 공동체’를 민족으로 정의했다.
이 과정을 거쳐 소수민족은 종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이라는 근대국가와 중국공민의 범주에 들어가게 됐다. 종족적 식별을 통해 중국민족주의를 강조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 대신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중화민족’을 사용했고, 대외적으로는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이른바 국가주의(statism) 양상이 나타났다.
‘민족구역자치제도’
중국이 비교적 유연한 민족정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한족이 압도적인 주류사회를 형성하고 있어 구소련에 비해 강압적인 정책에 대한 유혹이 적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지배했던 만주족을 비롯한 많은 소수민족이 이미 한족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중국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규모가 작고 고립된 서남지역 일부 소수민족은 무형문화재 수준으로 전락했다. 인구가 200만에 달하는 조선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구의 공동화 현상이나 조선족 3세대의 정체성 위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힘겨운 싸움을 벌인 일부 소수민족의 경우다. 중국 정부엔 이런 곳이 ‘민감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국경을 접한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베트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몽골과 만주지역은 이미 독자적 공동체가 약화되어 한족이 지배하게 됐다. 이렇게 보면 한족과 종교적, 종족적 정체성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신장-위구르 지역과 티베트 지역이 가장 ‘민감한’ 곳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랜 고립의 역사를 가졌고 문화·언어·종교적 차이가 크며 자주 독립을 요구해온 ‘세계의 지붕’ 티베트에서 마침내 불이 붙은 것이다.
1952년 이후 중국은 소수민족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통일적 지도하에 소수민족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 해당 민족 내부의 지방업무를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자치지역의 자치기관은 동급 국가기관의 책무를 제외하고는 광범한 자치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한다. 가령 티베트 자치구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자치구 수준(즉 省급 업무)을 제외한 광범한 자치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치권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민족은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자치기구를 구성한다 ▲별도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자치권을 행사할 경우 해당지역 민족의 특징과 풍습과 습관을 충분히 고려한다 ▲자치기관은 민족의 특징을 고려해 조례와 법률, 규정을 제정한다 ▲자치기구가 자치구의 재정권을 행사할 때에는 동급의 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