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 임석재 지음, 휴머니스트, 각권 400쪽 안팎, 각권 1만9000원
때로는 고생 끝에 낙을 얻게 된 그들의 행운을 철없이 부러워하며, 때로는 저 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조바심치며,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은 어느새 ‘공간’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으로 주파수를 이동했다. 같은 넓이의 공간이라도, 엄청난 돈을 투자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적인 노력과 약간의 센스만으로 공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침에 눈만 뜨면 부리나케 뛰쳐나오고 밤에 들어가기만 하면 즉시 곯아떨어지는 숙박용 집이 아니라, 휴식과 놀이와 명상이 모두 가능한 아늑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게다가 그 공간이 ‘아름답기까지’하다면 금상첨화일 거라는 상상으로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랬다. 아름다움은 늘 마지막 순위였다. 일상적 의식주를 원활하게 해결하는 것,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삶이 가능한 후에야, 마지막에 ‘덤’처럼 떠오르는 것이 공간의 아름다움이었다. 공간의 이미지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소비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러브하우스’를 충성스레 시청하면서도 정작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것은, 미적 충동 자체가 여전히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탓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러브하우스’를 TV에서 볼 수 없게 된 후, 큰맘먹고 떠난 유럽여행에서 비로소, 그동안 억압되었던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
그곳에서 건축과 미술은 너무도 당연하게 오래전부터 ‘하나’였으며, 인간과 공간, 미술과 건축은 ‘역사’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치밀하게 연결된 씨줄과 날줄의 연속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임석재 지음, 휴머니스트, 2008) 시리즈는 ‘당연히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일상에서는 거의 만남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건축과 미술의 뗄 수 없는 인연의 다큐멘터리로 읽힌다.
사진과 도판으로 만나는 유럽 공간
이 책은 일상과 공간, 건축과 미술에 대한 막연한 연결고리만을 상상했던 독자에게 삶이 곧 공간의 배치이며 공간은 곧 미술과 건축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멀리 여행을 떠나서야 비로소 공간의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여행을 가능케 하는 책을 통해, 2차원의 미술을 3차원의 건축으로 치밀하게 번역해내는 공간의 마술을 체험한다.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는 사진과 도판으로 만나는 서양인들의 공간의 역사로 읽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떠났던 여행의 복습과 앞으로 떠날 여행의 예습을 동시에 치르는 듯한 생생한 긴장을 맛본다. 단 두 번의 유럽여행으로 인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막연한 공상과 일상적 공간의 권태는, 단순한 동경에서 과녁 없는 박탈감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이탈리아의 건축은 아름답고 유서 깊지만, 한국의 건축은 아파트 일색이다’라든지, ‘파리의 건축은 전통과 현대가 사이좋게 공존하지만, 한국은 현재가 과거를 살해하는 건축이다’라는 식의 단순 비교로 정리될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다. 10분만 산책을 해도 모든 시대의 건축을 다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도저히 요약하거나 통계로 정리할 수 없는 공간의 무한한 풍요로움. 그 미적 풍요야말로 그 어떤 ‘자본’이나 ‘기술’로 모방할 수 없는 문화적 인프라였다. 공간은 단순한 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시간의 흔적과 인간의 역사가 스며든 다차원적 세계였다.
예를 들어 대영박물관 하나에 수천년 전 예술가의 숨결과 지금까지 그 박물관을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고, 나아가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긍지와 사랑을 느끼는 동시대인의 숨결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난 유럽여행을 통해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공간은 역사이자 현재이자 예술이자 사랑이었다. 길거리 자체가 총체적 시공간의 박물관이 되지 않는 한, 공간의 아름다움이란 철저히 ‘계급’의 순위로 점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의혹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