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노릇노릇 산수유꽃 봄바람에 살랑살랑

경기 양평군 내리마을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3-04-22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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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릇노릇 산수유꽃 봄바람에 살랑살랑

    양평 주읍리 산수유.

    청소년 시절, 국어 교과서의 현대시에 등장하는 열매 중 도대체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름도 묘한 열매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잊히지 않은 채 가슴이 저리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도 해마다 봄이 되면 늘 궁금해지지만 정작 이 열매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산수유 열매는 가슴이 짠해지는 시 속에 등장한다.

    산수유에 담긴 父情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이쯤 되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자식을 키워본 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의 코끝이 이미 찡해지리라. 김종길의 ‘성탄제’라는 시다. 그러나 대저 도시 사람은 물론이고 시골 사람조차 산수유 열매를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나 뽕나무같이 한반도 곳곳에 서식하지는 않는다. 이상하게 특정 지역에만 주로 자라 우리 눈에는 익숙지 않다.

    이런 산수유가 유명해지는 데는 김종길의 시가 아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최근엔 상업광고 문안도 조금 기여하지 않았을까. “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는, 산수유를 원료로 만든 건강식품 광고 말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산수유 열매가 이뇨작용에 효능이 있긴 하지만, 광고가 주장하는 남자의 정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본다. 산수유가 이 광고로 인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게, 옆에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대던 권태균 선생의 분노다. 속물적(?) 남성들을 제외하고 정작 산수유가 대중에게 유명해진 것은 봄날 몇몇 마을이 펼치는 산수유 축제 행사 때문이리라.

    그래서 산수유 마을을 찾아보기로 했다. 반도 남쪽에 산수유 축제로 유명한 마을이 서너 곳 있다. 지리산이라는 어머니 같은 큰 존재를 곁에 둔 덕분에 전남 구례 산수유가 봄의 전령사쯤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어 경기도 양평 일대가 손꼽힌다. 양평군 개군면과 여주군 이포나루 부근의 외딴 골짜기 마을들이 그곳인데 특히 서울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노릇노릇 산수유꽃 봄바람에 살랑살랑

    대파 모종 심기에 나선 마을 여인네들.

    산수유 축제로 이름을 날리는 양평 개군면과 강 건너 여주 이포읍 일대는 조선시대엔 물산의 왕래가 잦아 상당히 번화했던 곳이다. 이포나루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자면 여주, 충주, 탄금대를 거쳐 문경새재에 닿았다. 하류 쪽으로는 양평, 양수리, 서울 마포를 지나 서해로 빠져 나간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이곳은 요즈음으로 치면 고속도로 교차로쯤 된다고나 할까.

    남한강의 중간쯤 되는 이 일대는 산수유 꽃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산수유 꽃은 개나리, 진달래, 자귀나무, 동백나무처럼 꽃이 먼저 핀 뒤 지고 나면 잎이 돋아나는 이른 봄에 피는 꽃나무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개군면의 골짜기 마을들은 산수유 축제라는 이름 아래 서울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곳곳에 내걸어놓은 울긋불긋한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펄럭인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땅이지만 젊은 사람들 찾기가 쉽지 않다. 봄기운이 완연한 마을에서 허리 굽은 노인들의 검은 얼굴빛이 노란 산수유 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양평 땅은 겨울 혹한으로 뉴스에 가끔 이름을 내민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까닭에 맥주, 소주병이 쩍쩍 갈라지는 영하 30도의 추위가 이곳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지금처럼 봄이 되면 야트막한 산허리는 황금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양평 기계화사단’ 이야기

    노릇노릇 산수유꽃 봄바람에 살랑살랑

    봄나들이에 나선 마을 할머니들.

    이 일대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군 요새가 눈에 띈다. 군인들이 행군하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산수유 꽃이 눈부신 양평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도권 남쪽 제1의 군사 요충지다. 완만한 산악 지대지만 레이더망을 피해가는 독특한 지형이라고 한다. 그 탓에 군부대가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해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양평이 오지 아닌 오지가 되고 있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실제 양평 여기저기에선 국방색 깃발이 펄럭인다. 사단본부 입구에는 거대한 무쇠 탱크가 위압적으로 포신을 치켜들고 있다.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십여 부대는 20기계화 보병사단 예하 10여 개 여단, 연대, 대대다. 별명은 ‘결전부대’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양기사’라는 극히 짧은 약칭으로 부른다. ‘양평 기계화사단’이라는 의미다.

    양기사는 우리나라 군사조직 중 유일하게 대통령의 직계 명령으로 움직인다. 청와대와 가깝기에 여차하면 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된 요즘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양기사는 정권의 방패와 같았다. 대통령에게 절대 충성을 약속하며 비밀 방호 구실을 해왔다.

    가려져 있던 양평 기계화사단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다. 1980년 5월 전두환 계엄사령관의 측근인 박준병은 양평 기계화사단의 사단장이었다. 박준병은 사단 예하 60, 61, 62연대 및 전차대대, 91포병대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명령을 내렸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양평 기계화사단은 기성세대에게는 잊히지 않을 불운한 사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실 양기사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그 궤를 같이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6·25전쟁 말기인 1953년 2월 9일 강원도 양양에서 창설된 이 사단은 1964년부터 휴전선 지역에 주둔했다. 1977년 10월 20일 강원도 철원에 주둔하던 사단 예하 부대의 부대장이 휴전선 철조망을 뚫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군 수뇌부의 질책을 받고 이듬해 5사단에 자리를 내주고 후방 격인 양평으로 쫓겨난 것이다. ‘신동아’ 2005년 1월호는 양기사의 이런 비화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일이고 사람들은 양평 하면 자연스레 양기사를 떠올린다.

    고대부터 양평은 여주 이포나루터와 함께 군사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이포나루터 동쪽 파사산(230m)에는 신라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신라 때에는 중요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했다. 신라 5대 왕인 파사왕 때 성을 쌓은 것이 유래가 돼 지금도 파사산으로 불리는 것이다. 파사산성은 성곽의 일부가 한강 연안에까지 묘하게 돌출되어 있어 상류·하류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다.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산성은 파사산 능선을 따라 둘레 1800m, 높이 6.25m로 이어진다. 지금은 완전히 복원되어 성의 위세를 보여준다. 나라가 제법 잘살게 된 덕에 허물어진 옛 산성도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리라.

    4대강 이포보와 막국수村

    산성에 오르면 이포나루터를 비롯해 여주·이천·양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포나루터는 조선시대 서울의 마포와 광나루, 여주의 조포나루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터로 불렸다. 이포나루터는 슬픈 역사도 함께 갖고 있다.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난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 길을 떠날 때 이포나루에 잠시 배를 대고 한양 쪽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다. 단종이 내려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의 흔적도 대신면에 남아 있다.

    지금은 4대강 개발로 탄생한 거대한 이포보가 남한강을 가로지른다. 조선시대 성행한 이포나루와 주막거리는 사라졌다. 대신 그 부근인 천서리 일대에는 대규모 막국수촌이 생겨나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메밀로 만든 막국수와 돼지고기 편육의 맛이 일품이다. 최근엔 4대강 자전거전용길, 이포보와 함께 관광코스로 연결돼 있다.

    천서리는 지명치고는 독특하다. ‘찬서리’가 아니라 천서리(川西理)다. 서쪽으로 남한강이 남북으로 뻗어 흐르는 모양에서 마을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산수유 꽃이 만발한 언덕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운다.

    노릇노릇 산수유꽃 봄바람에 살랑살랑

    복원된 파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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