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外交라구요? 인맥도 로비도 없이?”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30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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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진 지 24년. 그 주역이었던 박동선씨가 바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세계 곳곳을 드나들며 국제 로비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가 입을 열었다.》
    1976년 워싱턴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장본인 박동선(朴東宣)씨가 2년여 전부터 빈번하게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 그는 국내 체류중 정부 관계자와 국회의원 기업인 법조인 사회단체장 등 다양한 인사들과 면담하고, 남북한 교류사업과 인삼사업 호텔사업 등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들에겐 코리아게이트 이후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로비스트 세계에서 종적을 감춘 것처럼 비쳤던 박씨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98년 여름부터 그와 접촉을 계속한 끝에 어렵게 만남이 이뤄졌다.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언론에 나서기를 꺼려왔다”며 “그러나 한국에는 나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신동아’ 독자들 같은 지식층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1935년 평남 순천 출생.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의 ‘노인’이지만,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풍채와 반백의 숱진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모습에선 20년 전 자신만만한 언행으로 미 의회 청문회장을 압도하던 활력이 간간이 배어났다.

    어드바이저와 로비스트

    ―일정을 보니 한 곳에 오래 머무르시지 않더군요. ‘주거지’는 어디입니까.



    “대략 네 군데라고 보면 됩니다. 도미니카, 워싱턴, 런던, 그리고 서울. 도미니카와 워싱턴에서는 중남미를 드나들고, 런던을 근거지로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오갑니다. 전에는 도미니카와 워싱턴에 주로 머물렀는데, 한 3년 전부터는 나이가 들어선지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스케줄을 좀 바꿨습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한두 달쯤 머물며 일본 대만 중국 몽골 등지로 일을 보러 다닙니다.”

    서인도제도 도미니카공화국의 최고급 주택단지 카사 데 캄포에 있는 그의 저택은 그곳에서도 규모가 큰 집에 든다. 정원의 한 면이 바다와 접해 있어 풍광이 뛰어나며, 집사 요리사 정원사 등 9명의 관리인이 집을 돌본다. 70년대에 그가 미국 정치인들을 위한 휴양지로 쓰려고 거액을 들여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누구를 위해 어떤 일을 하기에 그처럼 잦은 여행을 하십니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각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지요. 일례로 내 후배가 얼마 전에 니카라과 대통령이 됐는데, 그이가 날 대통령 고문으로 위촉해 공식 임명장까지 줬어요. 니카라과는 그간 내전을 치르느라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선진국들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그런 일을 중개하는 게 내 역할입니다. 남미에는 국회의 동의를 얻기 전에는 대통령이 마음대로 외국 방문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많은데, 그런 나라에서 SOS를 치면 후딱 달려가서 대통령 대신 외국 출장을 떠나야 합니다. ‘어드바이저’라 해도 좋고 ‘로비스트’라 불릴 수도 있겠죠. 이러다 보니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정국이 복잡한 나라, 외교적으로 곤경에 처한 나라들을 끊임없이 오가게 됩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주로 대형 프로젝트를 따내려 할 때 대상국 정부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일과 관련해 알스톰, 지멘스, 프랑스 철도청(SNCF) 같은 기업·기관들의 자문에 응하고 있습니다.”

    국제 로비스트로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씨의 근황을 취재했던 한 재미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그는 미국의 상·하의원이나 클리턴 대통령의 보좌진, 주지사 등과 친분이 두텁고, 유엔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고위 인사나 개도국 정치지도자들과도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그가 30대 시절에 설립한 조지타운 클럽은 코리아게이트 당시 부패 정치인의 소굴처럼 매도됐지만, 지금도 워싱턴 사교계에서 성황을 이룬다. 조지타운 클럽의 단골 멤버 중엔 하원 외교분과위원장 벤저민 길먼, 15선 하원의원 찰스 랭글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코리아게이트 후 일거리 늘어

    ―코리아게이트는 미국 정계 안팎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언론도 박회장께 집중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로비스트로 건재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군요.

    “당시 미국 법원이 날 기소한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려면 정식으로 등록하고 활동상황을 매월 보고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는 것, 그리고 의원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아무것도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발적으로 내 조국에 도움을 주려했을 뿐 한국 정부로부터 임명장도 봉급도 받은 일이 없으니 한국의 로비스트가 아니었고, 의원들에게 준 돈은 조건 없는 정치자금이었지 뇌물이 아니었거든요. 그때는 외국인이 개인 자격으로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주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어요. 뇌물은 공직을 이용해 이러저러한 일을 해달라는 대가로 주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됐습니다. 뇌물수수혐의자로 거론된 90명의 의원 중 2명만이 기소됐고, 그중 한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의원도 가벼운 형을 받았고.

    그처럼 큰 사건이 터졌지만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드러나지 않았고, 또 한국 정부가 이 사건을 주도하지 않았느냐는 집요한 추궁에 대해 내가 끝까지 부인하며 혼자 모든 걸 뒤집어썼더니 사건이 수습된 후엔 오히려 로비 일거리가 더 늘더군요. 맨 먼저 일본에서 함께 일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중동과 중남미 지역 정부와 기업들도 도움을 청했어요.

    당시 일본 사람들은 자국 로비스트보다 내 능력을 더 높이 평가했고, 행여 일이 잘 안되더라도 비밀을 누설한다든지 해서 일본 정부를 수치스럽게 할 인물은 아니라고 봤던 것 같습니다. 일본 언론들도 아주 호의적으로 보도했어요.”

    박씨는 코리아게이트와 관련, 자신의 ‘순수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고 일한 게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쌀 생산지 출신의 미 의원들이 선거구 농민들을 의식해 한국의 쌀 수입과 미국의 대한(對韓)원조를 연계하는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하자 자신이 이를 청와대에 귀띔하면서 일이 추진됐다는 것.

    “60년대에 서울 가회동에 우리 집을 지었는데, 시공사가 삼환기업이었고 하청회사가 현대건설이었어요. 그런 회사들이 가정집 공사를 맡았을 만큼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초라했어요. 대기업도 없었고, 은행에서 돈 한 푼 빌릴 수도 없었어요.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66년에 원조가 끊기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게 지상 과제였어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앞장선 겁니다.”

    일본 북방영토 협상 관여

    ―일본 정부는 어떤 일을 맡겼습니까.

    “일본에서는 여당인 자민당이 정부를 대신해 로비를 챙겼습니다. 외무장관을 오래 지낸 아베 신타로씨를 만나 8년쯤 함께 일했어요. 그 무렵 미·일 간 무역마찰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이걸 완화하는 게 주업무였죠. 예컨대 코리아게이트 이후 한국이 쌀을 자급하게 돼 미국 쌀을 수입하지 않게 되자, 쌀 생산지인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아칸소 텍사스 캘리포니아 출신 의원들이 쌀시장을 개방하라고 일본에 강한 압력을 넣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내 인맥 아닙니까. 중간에서 이들을 무마했죠. 나중엔 레이건 미 대통령도 아베 장관을 좋아하게 됐고, 의원들도 아베 장관이 재임하고 있을 때는 더이상 쌀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92년부터 1년 반 동안 박씨는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가 점령한 일본의 북방영토 반환을 위해 일했다. 일본 의원들의 부탁으로 모스크바를 열 번이나 방문했고, 옐친 대통령과도 두 차례 만나 협의했다는 것.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100억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과 사할린 공동 개발 등을 제의했어요. 북방 4개 섬은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지만, 그중 한 섬은 러시아군의 잠수함기지가 있는 군사 요충지라 3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어요. 일본은 이들이 철수할 경우 숙소를 지어주고 취업을 알선하겠다는 제의까지 했습니다. 나는 친구인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러시아가 일본에 영토를 반환할 경우 1년 정도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어요.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옐친도 일본의 제의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그러나 소련이 무너진 직후였던 터라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자 러시아 군부와 보수파가 북방영토 문제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끝까지 반대해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런 얘기는 처음 공개하는 것인데…언젠가는 일본 외교사에 기록되겠죠.”

    ―최근에는 중국을 자주 드나드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통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해요. 어떻게 주변국의 협조를 얻고 간섭을 막아내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중에서도 지금껏 북한의 스폰서를 자임하고 있는 중국과의 외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외교를 제대로 하려면 인맥이 없으면 안 돼요. 정부 차원의 커넥션만 갖고도 정상회담이야 가능하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과연 서로 가슴을 열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내가 중국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국 인맥이 없다는 뜻인가요?

    “내가 보기엔 그래요. 부총리급 정도까지는 선이 닿는 것 같은데, 그 아래로는 흔적이 안 보여요. 그러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우리와 공감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입장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성급하게 한국과 국교를 맺긴 했지만,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좀체 태도를 바꾸지 않는 거예요.

    우리 또한 중국을 너무 모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전통적으로 국경문제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 때문에 러시아 대만 티베트 몽고 등과 분쟁을 빚었죠. 그래서 중국과 길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이 계속 자기들 편에 남아주기를 원합니다. 더구나 한국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 편에서 떨어져 나가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이해와 정리 없이 우리 주장만 자꾸 펴면 갈등만 조장할 뿐입니다.”

    박씨의 중국 인맥은 차(茶)문화연구회를 중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우리로 치면 차인(茶人)연합회 같은 단체인데, 전국적으로 탄탄한 조직과 인맥을 갖춘데다 많은 명망가들이 몸담고 있어 교류의 폭이 넓다고 한다.

    통일을 위한 노력의 한 축이 주변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래서 북한 고위층에게 국제기구와 지역기구, 서방 선진국으로 입지를 넓혀가기 위한 외교수완을 조언한다고 한다. 주로 만나는 사람은 아태평화위원회 인사들.

    “얼마 전에 평양에 다녀왔는데, 유엔과 세계은행, IMF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더군요. 놀라웠던 것은 아직 한국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는 EU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더라는 점이에요. 이들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디로 줄을 대야 하는지 이런 걸 가르쳐달라는 겁니다. 미국과 중남미 국가들이 참여하는 미주기구(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아프리카단결기구(OAU·Orga- nization for African Unity) 등과 북한을 연결해주기 위해 내 경험과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노하우라는 건 이런 겁니다. 가령 영국의 고위층에 줄을 대려면 승마협회 같은 데로 접근하면 쉬워요. 우리야 주로 서민들이 경마장에 가지만 영국은 최상류층이 대개 경마팬들입니다. 여왕이 경마를 갖고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한국마사회장이 영국에 가면 웬만한 사람은 다 만나볼 수 있어요. 또한 중미에는 난(蘭)이 국화인 나라가 있는데, 내가 10여년 동안 한국난협회장을 한 덕분에 그 나라 대통령 내외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나라마다 관심 분야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외교를 할 때는 이런 걸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거죠.”

    한국에서 정치를 하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었다고 한다. 그가 졸업한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은 미국과 중남미 국가의 명문가 정치 지망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 또한 명문가 출신(그의 선친은 미륭상사 창업주인 고 박미수씨)으로, 이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지냈다.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 리 없건만, 한국의 정치무대에 근거지 없는 이북 출신이 설 땅은 없었다고 한다.

    “호남 사람들이 영남 사람들한테 당하고 살았다는데, 그래도 이북 출신들이 겪은 설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가서 국회의원 노릇 할 생각을 해봤겠어요. 그래서 이민도 많이 갔죠. 통일에 대한 내 열망은 이런 감정에서 나온 측면도 있어요. 남북한이 합쳐야 우리 이북 출신에게도 좀 기회가 올 거라는….”

    최근 그가 인삼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경제적 가능성과 함께 이를 매개로 한 남북한의 협력사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두산그룹으로부터 충남 금산에 있는 국내 두 번째 규모의 인삼공장을 인수했다. 북한에 갔을 때는 인삼 재배에 최적의 토양조건을 갖췄다는 개성에 인삼공장을 설립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요즘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엄청난 양의 인삼을 생산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쪽 인삼 재배업자들은 한국을 인삼의 종주국으로 여깁니다. 누가 특별히 홍보한 것도 아닌데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인삼이 고려인삼, 개성인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프로모팅만 잘하면 인삼처럼 유망한 작물도 없어요. 쌀시장이 완전 개방되어 우리 쌀의 가격경쟁력이 추락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인삼이 우리 농민의 대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 인삼은 아무리 값이 비싸도 경쟁력이 있으니까요. 북한과 손을 잡으면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도 있어요. 북한에서 생산한 인삼을 남한에서 가공해 수출한다든지, 남북한이 인삼을 테마로 한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나는 ‘로비쟁이’

    박씨가 요즘 가장 공을 들이는 사업의 하나는 대만의 고속철도사업이다. 타이페이와 카오슝을 잇는 340km 구간의 이 고속철은 토목공사와 토지보상비를 포함, 200억달러가 투입되는 대형 사업. 프랑스 알스톰과 독일 지멘스가 연합한 유럽 컨소시엄(유로트레인)과 일본의 미쓰이 미츠비시 도시바 등이 참여한 일본 컨소시엄이 사업권을 놓고 경합을 벌여왔다.

    박씨는 지난 3년간 유로트레인의 에이전트를 맡아 대만과 유럽을 뛰어다녔는데, 97년의 운영권 입찰에선 유로트레인이 일본을 눌렀다. 때문에 열차 및 운행관리시스템 사업권도 유로트레인이 따낼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는데, 지난해에 열린 입찰에서 일본 컨소시엄에 지고 말았다. 그는 입찰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아직 최종 결정이 보류된 상태다. 그는 EU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마지막 승부를 벼르고 있다.

    ―이젠 로비라면 도가 틔셨겠군요.

    “내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30년 넘게 이 일을 하다 보니 이젠 ‘쟁이’가 다 된 것 같아요. 대학 강단에 세워놓고 ‘로비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라면 교수보다 못하겠지만, ‘이러이러한 일은 어떻게 하면 최단기간에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거의 본능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올 겁니다.”

    ―한국에선 로비라는 말이 부정부패, 뇌물, 브로커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로비는 왜 필요하고, ‘잘 된 로비’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예를 들지요. 고도의 의회주의 국가인 미국에선 모든 게 국회에서 결정되고 행정부는 이를 집행할 따름입니다. 미국에 그룹이 얼마나 많습니까. 각양각색인 직업에 따라, 민족에 따라, 출신지에 따라 모두 이해관계와 관심사항이 달라요. 워싱턴엔 이들이 만든 조합들이 우글우글합니다. 각 조합은 경쟁적으로 유능한 로비스트를 채용해 국회로 보내죠. 90년대 들어 미국이 유일한 슈퍼 파워로 위상을 굳히자 외국 정부와 기업들도 미 의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됐어요. 이해 당사자들은 로비스트가 없으면 찾아 먹을 것도 못 찾아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로비스트는 의원 주머니에 돈이나 찔러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빈틈없는 논리로 의원들을 설득해야 해요. ‘이런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룹의 이익을 프로모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직접 법안을 만들어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론과 실무에 다 정통해야 돼요. 그래서 미국에선 로비스트를 상원과 하원에 이어 ‘제3원(院)’이라고 부를 정도예요.”

    로비 못해 얻어맞는다

    ―한국의 대미(對美) 로비 실태는 어떻습니까.

    “국가간의 로비에선 인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한국은 인맥이 없으니…. 우방국이니 대통령끼리 만나는 건 어려울 게 없겠죠.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아래 장관들의 대화에서, 또 그 아래 실무자 간의 대화에서 어떤 얘기가 오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백억 달러어치의 물건을 사주면서도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 것은 인맥도 없고 로비할 줄도 모르기 때문 아니겠어요?

    코리아게이트 때 쌀 수출 관계로 한국을 도와주겠다고 한 의원이 86명이었어요. 그런데 의원들끼리는 ‘당신이 이 법안심사에서 날 도와주면 나도 당신을 위해 표를 던지겠다’며 서로 트레이드 보팅을 하는 관행이 있어요. 86명이 한 명씩만 트레이드 보터를 확보해도 172명의 의원이 한국 편을 들게 되는 겁니다. 그 정도만 해도 전체 의원수의 3분의 1을 훨씬 넘으니 한국 원조법안이라면 무조건 다 통과됐던 거죠. 내가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의원들이 선거구민을 의식해서 한국을 지원하는 데 발 벗고 나선 겁니다. 인맥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한국이 IMF 위기에 몰렸던 97년 말, 세계은행의 고위 인사를 설득해 긴급 차관을 조기 지원받도록 하는 등 현 정부에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로부터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으신 게 있습니까.

    “공식적으로 미션을 받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현 정부나 여당 인사 중에 나와 인맥이 닿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이 처음 여당을 하다 보니 경험이 짧아 내 의견을 물어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내 능력이 닿는 범위에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과 관련된 사안들이 많죠.”

    일정 때문에 아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그는 “기자 앞에서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 하소연만 잔뜩 했다”며 “그만큼 맺힌 얘기가 많았던 모양”이라고 했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평행선을 달린다. 어려운 시절 갖은 차별의 장벽을 딛고 미국 정계를 휘어잡으며 당당하게 고국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찬사를 받는가 하면, 독재정권과 결탁해 자기 잇속을 차렸다는 비난도 쏟아진다.

    그는 여전히 베일 속의 인물이다. 그가 스스로 베일을 걷어 보일 때 비로소 정당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다만 그가 30년 동안 축적한 인맥과 노하우를 단지 그 개인의 자산으로만 묶어두는 것은 아깝다는 게 현실적인 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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