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2월 신건 인수위원(왼쪽)과 귓속말을 나누는 이종찬 초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정치학의 영역은 줄어들고 경영학이 커졌다.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은 오히려 경영학에서 많이 다루고 있다. 잭 웰치의 리더십이나 정주영의 리더십을 가르치는데, 거기에 외교 안보 복지 교육을 더하면 방금 말한 제왕학 분야가 아니겠는가. 왜 정치에 인물이 모이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일본이 매우 작은 정치를 하고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일본 정계에는 올망졸망한 졸장부들이 모여 있기에 돌파를 하지 못한다.
일본의 경제 예측 전문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당선인을 내는 소선구제가 일본 정치를 망쳤다’고 비판했다. 한 사람만 당선되니 출마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인기를 끄는 데만 집중해, 국가 비전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리도 선거제도 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은 큰 정치를 했는가.
“노태우 대통령은 중국 소련과 수교하는 물꼬를 텄지만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1989년 노 대통령은 차관을 주기로 하고 제주도에서 30여 분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다. 그때 찍은 사진이 북방정책 상징이 됐다. 이듬해 노 대통령은 서동권 안기부장을 북한에 보내 정상회담을 타진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껄껄 웃으면서 ‘결과도 없이 사진이나 찍는 정상회담을 뭐 하려고 하자느냐’라고 물었다.
서 부장이 ‘결과를 내면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김일성은 ‘좋다. 그렇다면 고려연방제를 받아들이겠다고 해라. 고려연방제를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했다. 고려연방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서 부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는 정상회담이라는 한 주제에 매달렸기에 우리가 실패한 경우에 해당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났을 때 김정일이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바로 ‘지금 주한미군은 당신들과 적대적이지만, 우리가 정전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갈 때 중국과 일본이 우리를 넘보는 것을 막으려면 주한미군이 있는 게 낫다. 북한은 주한미군 문제에 너무 신경질적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정일은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그러나 쭉 반미를 해왔는데 갑자기 친미를 할 수 없다. 서서히 그쪽으로 가면서 미국과 평화조약으로 국교를 맺어야겠다’라고 하자, 김 대통령도 그렇게 하라고 동의했다. 그러한 합의가 있었기에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미국에 앞서 서방국가들과 수교하는 것을 도왔다.
이것이 큰 정치다. 대통령이 작은 것까지 다 챙기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 아까 실패한 인수위원장이라고 자평하셨는데 이는 김대중 정부와의 색깔 차이로 인수위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뜻인가.
“아니다. 지금은 김대중 정부라고 하지만, 그때는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DJP 연합정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국민회의에 합류한 사람인데 자민련에는 과거 민정당에서 같이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김대중 당선인은 양쪽 융합을 위해 나를 인수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때 최대 문제점은 초안으로 검토되던 것들이 마구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었다. 초안은 아무래도 과격할 수밖에 없고 사견에 가까운데 인수위원들이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수위가 국보위냐, 혁명정부냐?’ 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5개 소위원회를 만들고 공보관을 둬, 매일 5개 소위원장과 회의한 후 거기에서 결정된 것만 공보관을 통해 발표하게 했다. 초기에 사견에 가까운 성숙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마구 발표된 것과 그것을 수습해 정리한 과제를 도출했는데, 차기 정부에서 그것이 채택되지 않은 것이 내가 인수위원장으로 실패했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통 큰 정치
▼ 전두환 정권 출범에도 참여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 때 입법위원을 했고, 민정당 출범 때는 초대 원내총무를 맡았다. 국보위와 입법회의는, 어떻게 보면 대통령직인수위와 성격이 비슷한 것 같다. 쿠데타로 세웠느냐 선거로 만들었느냐는 차이가 있지만.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그도 통 큰 정치를 하려했다. 나는 중위 때 박정희 소장이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파견돼 있으면서 전두환 대위와 잠시 만나고 그 후 별다른 인연 없이 지냈다. 박정희 정부 때 나는 중앙정보부(중정)의 해외공작 부국장을 하면서 김재규 부장의 비밀 지시로 무기 거래상인 아이젠버그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에 억류돼 있는 이대용 공사를 빼내는 공작을 하다 10·26을 맞았다. 중정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했으니 중정의 모든 공작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공사만은 빼내와야겠기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갔더니 ‘계속하라’고 해 성공시켰다. 그리고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직하면서 나를 총무국장에 임명해 중정 개혁 임무를 맡겼다. 이어 민정당 창당을 맡기고 원내총무를 하게 했다. 나는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12·12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나를 쓴 것이다.
원내총무 첫해,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키려는데 야당이 반대하며 국회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목(耳目)을 피해 고재청 민한당 원내총무를 국회도서관에서 만나 이유를 물었더니, ‘대통령 동생(전경환)이 사무총장을 한다고 새마을중앙회 예산을 4배나 증액시킨 예산안을 우리는 표결해줄 수 없다. 여당이 날치기를 하려면 해라.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간다’라고 했다. 그때 새마을중앙회 예산이 그렇게 늘어난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청와대로 전화를 걸자 허화평 정무수석이 받았다. 그에게 용건을 밝히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더니 한 시간 후 허 수석으로부터 ‘대통령이 예산안은 원내총무 소관인데 왜 대통령 의견을 묻느냐며 역정을 냈다’는 답신이 왔다. 그래서 ‘아, 해도 되겠구나’는 판단이 들어, 고 총무를 만나 새마을중앙회 예산을 모두 깎아버릴 테니 국회에 들어와달라고 했다. 그제야 야당이 회의장에 들어왔다. 표결에서는 부(否)표를 던졌지만, 참여 속에 한 반대였다. 5공이 만든 첫 예산안이 날치기 통과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전 대통령은 자기 사람만 고집하지 않았다. 괜찮다 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 인맥이 아니어도 광범위하게 기용했다.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려낸 김재익 경제수석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했다. 우리 당선인도 그러한 길을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