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트 코스 파4, 5번홀. 핸디캡 2번.

▼ 골프백 들여다보니
엘로드 드라이버와 S야드 우드, 혼마 웨지, 코스코 아이언. 퍼터는 밴디로드 롱 퍼터를 사용한다. 롱퍼터를 사용하는 이유는 입스(순간근육경련증) 증후군 때문이다. 퍼터는 침실이나 화장실 갈 때도 들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해야 실력이 는다고 이 회장은 믿고 있다.
“골프장서 골프 치다 죽겠다”
경북 김천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고려대 농대 산림학과를 졸업하고 유엔개발계획(UNDP)의 한국 4대강 지질조사 업무를 맡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부친이 관리하던 조림사업에 뛰어들어 김천 일대에서 300만 평의 조림단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3년엔 구미 한국수출산업공단의 영어통역원으로 시작해 홍보과장, 조경과장으로 일했다.
“당시 공단이 조경경진대회에서 3년 연속 대통령상을 받자 박승도 이사장이 저에게 수고했다며 ‘파워빌트 골프채’를 선물로 줬어요. 그런데 당시엔 변변한 골프 연습장이 없었고, 공직자 신분이어서 골프장 드나드는 것도 눈치가 보였어요. 궁색하나마 낙동강 백사장을 골프 연습장으로 사용했지요.”
그는 모래밭에 50m 단위로 거리를 표시한 뒤 매트를 들고 이동하며 샷을 하거나, 모래 위에서 아이언 샷을 연습했다. 그린은 핀 대신 낚싯대를 꽂아 표시했다.
그런 열정으로 그는 프로 못지않게 탁월한 실력을 갖췄지만 사업관계 등으로 아마추어에 머무르면서 많은 프로 골퍼를 길러냈다. 또 전국체전에 15년 동안이나 출전하는 등 선수로서의 생활도 즐겼다. 홀인원은 생애 두 차례만 기록했다. 한때는 중원의 검객처럼 전국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긴장감 넘치는 승부를 겨루기도 했다. 그는 두 아들과 아내에게도 골프를 가르쳤는데, 막내아들과는 3년간 경북 대표로 전국체전에 함께 나갔다. 2010년 6월엔 25세 이상 성인 아마추어 골퍼들의 뜻을 모아 미드아마추어골프연맹을 발족시켰다.
“미드연맹 결성을 계기로 학생 등 엘리트 아마추어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 골프가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게 됐어요. 3년 만에 회원이 2500명으로 늘었어요. 그동안 학생을 제외한 25세 이상 남성만 회원 자격이 있었는데, 내년에는 여성회원도 받을 계획입니다. 앞으로 골프 문화가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앞으로 그는 일본, 중국 등 이웃 국가와의 미드아마 국제경기를 추진하는 등 민간외교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 회장은 “골프장에서 골프 치다가 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