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국정원 대북라인’ 재가동 됐다

서훈-권호웅 채널, ‘2년 빙하기’ 깨고 소리 없는 부활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10-24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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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대북라인’ 재가동 됐다

    9월14일 오전 평양 고려호텔에서 남측 수석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북측 수석대표인 권호웅 내각참사를 비롯한 남북대표들이 제16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9월15일 저녁, 평양과 베이징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개의 회담을 지켜보는 외교안보 당국자들의 입술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먼저 경보음이 울린 쪽은 남북장관급회담. 6월 중순 열린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 성과를 음미하던 당국자들의 ‘장밋빛 낙관’은 회담장에 나온 북한측 대표의 강경한 태도에 싸늘하게 식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한미합동훈련 을지-포커스렌즈 중지 요구. 고장난 레코드 같은 ‘옛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양측 대표 다섯 명이 참가한 공식 테이블에서의 논의는 6월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를 반복해 점검하는 수준에서 맴돌았다. 평양으로 떠나는 회담 대표팀이 야심차게 발표했던 ‘평화체제 논의’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이르기까지 당국자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은 그날 밤이었다. 이제껏 회담에서 논의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합의문 초안이 테이블 위에 던져진 것. ‘실질적인 조치들에 대해 협의하고 실천’ ‘6·15 시대에 맞게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적인 방도를 적극 모색…’. 겉돌던 주제를 ‘…을 폐지한다’는 부정적인 어휘 대신 ‘…방도를 모색한다’는 긍정적인 어휘로 대체한 전략적인 문안이었다.

    당국자들의 의구심은 한 가지로 모아졌다. 북측이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17일 이른 아침, 북한 대표단은 전격적으로 문안에 동의한다. 예상 외의 일이었다. 북측 대표단은 마치 협상문안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면밀한 검토도 없이 논의를 마무리했다.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에게조차 미스터리일 만큼 갑작스러웠다. 누군가가 미리 조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극적인 타결이었다.

    미스터리를 푸는 키워드는 테이블에 앉은 공식 협상팀 이외에 평양에 있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서훈 통일부 실장(1급). 공식 브리핑은 물론 언론을 통해서도 방북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대외 직함은 ‘실장’일 뿐, 통일부 어떤 부서 소속인지 설명이 없다. 실제로는 국가정보원 대북전략국장이기 때문이다.



    남측의 국정원과 북측의 노동당 통일전선부. 양측을 대표하는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회담 준비에 관여하거나 은밀하게 사전조율을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이들은 회담기간 중 공식적으로 정보기관 직함이 아닌 ‘청와대 실장’ ‘국무총리 특보’ 같은 위장 신분을 사용한다. 북측에서는 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내각’의 직함을 내세워왔다. 서로 정보당국자임을 잘 알지만 모른 척하는 일종의 묵계인 셈이다. 언론에서도 회담 기간에는 ‘대외 명칭’을 사용해 기사를 작성하다가 끝나면 ‘진짜 명칭’으로 돌아간다.

    특히 이번 장관급 회담의 북측 단장을 맡은 권호웅 책임지도원(공식 직함은 내각 책임참사)은 서훈 국장과 오랫동안 카운터파트로 일한 인물이었다. 이번 막후협상에서 서 국장의 움직임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은 당국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동영 장관은 공식 테이블의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에 대비해 이 ‘별도 채널’의 사전조율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9월16일 아침 테이블에 올라온 협상문안은 실제로는 이 채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권호웅 단장이 쉽게 문안에 동의한 것임을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다. 한 회담 관계자는 “큰 틀에서는 정 장관이 합의를 이뤄냈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선 서훈 국장의 공이 컸다”고 말했다.

    국정원-통전부 라인은 6월 정 장관의 평양 방문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6월17일 이른바 ‘대북(對北) 중대제안’이 논의된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단독면담 당시 배석한 인물이 서훈 국장과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다. 서 국장은 이때도 단독면담에 관한 막후접촉 및 전략기획을 담당했다는 전언. 이 무렵 통일부 당국자들 사이에는 정동영-김정일 면담에 국정원 관계자만 배석한 것에 대해 볼멘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전성기’와 ‘빙하기’

    최근 국정원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막후 움직임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공개된 바 있는 대북라인의 화려한 부활이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보현 당시 국정원 3차장, 서영교 대북전략국장, 서훈 대북전략조정단장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KSS 라인’은 대표적인 대북 창구였다. 특히 이들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북측의 림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 박성천 과장, 권호웅 책임지도원 등과 함께 ‘독보적인 비공개 채널’을 구축했다.

    이들은 당시의 공으로 2002년 6월 훈장을 받았다(김보현 차장과 서영교 국장은 황조근정훈장, 서훈 단장은 홍조근정훈장).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9월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가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는 정식으로 회담에 참석하는 등 반(半)공개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가 사실상 이들의 전성기였다는 데는 국정원 내에서 이견이 없다.

    그러나 2003년 초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이른바 대북송금 사건의 여파로 ‘국정원 라인’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되기에 이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시기 여러 차례에 걸쳐 대북협상의 투명성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비선(秘線)’으로 통하던 국정원 라인 대신 공식 협상 테이블에서 모든 것을 논의한다는 방침이 정해진 까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데는 ‘임동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청와대 외교안보팀 내부의 암묵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출범 초기 청와대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인물이 외교안보 사안 전체를 통할하는’ 이전 정부의 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KSS라인’이 사실상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손발’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들을 고스란히 활용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실제로 NSC 수뇌부가 초기에 임동원 전 원장과 적잖은 견해 차이를 드러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임 전 원장의 글을 밑줄을 그어가며 탐독할 정도로 관심을 나타냈지만, 임 전 원장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방안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2003년 여름 무렵부터 청와대 일각에서 임 전 원장에게 고문이나 자문을 맡기는 방안을 여러 차례 제기했지만, 이종석 NSC 사무차장 등 외교안보팀 수뇌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원래 책임과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는 것 아니겠냐”는 말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대외적으로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북송금 사건을 특별검사 임명이라는 강수로 정면 돌파한 청와대로서는 임 전 원장이나 김보현 차장 등이 사건의 당사자 혹은 관여자였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고 말한다. 임 전 원장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 2004년 5월에 사면 복권됐고, 환전 및 송금편의 제공에 관여한 국정원 관계자들은 줄줄이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최악의 빙하기’였던 셈이다.

    이후로도 김보현 차장과 서영교 국장은 자리를 유지했고 남북회담에도 관여했지만, 대북라인의 비공식 접촉은 사실상 금지됐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2004년 초에는 서훈 단장이 NSC 정보관리실장으로 임명되어 청와대에 들어왔지만 내부 업무에 집중했을 뿐 청와대의 대북협상 루트를 담당하지 않았다는 것. 명실상부한 ‘2년간의 침묵’이었다.

    2004년 크리스마스 이브

    당국자들에 따르면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이 무렵 청와대에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노 대통령이 LA 발언 등을 통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겸임하며 사실상 외교안보팀 수장을 맡게 된 것이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대북협상에 임해 남북관계 진전을 지렛대로 삼아 북핵 문제를 타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이와 함께 “임동원 전 원장이 언론 인터뷰에 응하며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임 전 원장과 NSC 등 청와대 참모들 사이의 ‘감정적 거리감’이 일정부분 해소되기 시작했다는 것. 2004년 11월 임 전 원장은 안보문제 싱크탱크인 세종연구소 재단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자리’를 찾는다.

    한 달 뒤인 12월24일, 대다수 언론이 단신으로 처리한 청와대 인사발령 기사가 나왔다. 서훈 NSC 정보관리실장이 서영교 국정원 대북전략국장 후임으로 임명됐다는 내용이었다. 닷새 뒤에는 다른 국정원 차장들과 함께 김보현 차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몇몇 언론은 이를 두고 “대북라인이 완전히 물갈이됐다”고 설명했지만, 국정원 관계자들은 “서훈 국장으로 대표되는 다음 세대가 임무를 ‘승계’한 것에 가깝다”고 전했다. 2000년 정상회담을 준비한 공으로 함께 훈장을 받았던 대북라인의 단장·과장급 직원들이 재정비된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보현 차장과 서영교 국장의 퇴진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엇갈리지만, 이른바 ‘임동원 시대’를 고스란히 복원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청와대 내부 분위기와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1940년대생인 두 사람의 경우, 1950년대생인 정동영 장관이나 이종석 차장이 사실상 ‘지휘선상’에 있는 현실도 고려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훈 국장의 승진은 큰 부담 없이 대북라인을 복원할 수 있는 카드였다. 더욱이 서 국장이 10개월 남짓한 NSC 생활을 통해 대통령이나 이종석 차장과 ‘코드’를 맞췄다는 점도 청와대로서는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특히 그의 발탁에는 NSC에 근무하는 동안 보여준 탁월한 업무능력도 영향을 미쳤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한다. 2004년 가을 이른바 ‘남한 핵실험’ 파문 관련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아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해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중평이다.

    실제로 청와대와 국정원 안팎에서 서훈 국장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은 편이다. 확실한 일처리와 깔끔한 대인관계를 두루 갖췄다는 식이다. “국정원이 앞서나가니 우리는 소외감을 느낀다”고 털어놓는 통일부 관계자들조차 서 국장 개인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줄 정도다. “천성이 공무원이라 특정인에 대한 충성심이나 공명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는 평가는 거의 찬사에 가깝다.

    2년간 얼어붙은 남북간의 비공개 대화창구는 2004년 연말 인사발령을 통해 국정원 라인이 정비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재가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 대북전략국 관계자들이 정동영 장관과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포착됐고, NSC와의 업무협조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봄이 되자 정 장관 주변에서는 “장관이 북한 주요 당국자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6월 정 장관의 방북과 6자회담 재개, 9월 장관급회담의 성공과 6자회담 합의문 도출이 이어졌다.

    현재까지의 상황만 놓고 보면 국정원 대북라인의 부활은 성공적인 듯하다. 몇몇 전문가들이 “NSC 등 외교안보 수뇌부가 임동원 전 원장의 그림자를 의식해 대북라인을 사실상 방치한 것이야말로 전략적 실수였다”며 아쉬워할 정도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2년 남짓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것, 특히 몇몇 회담에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선이 빚어진 것은 ‘대북라인을 통한 조율’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는 설명이다.

    물론 이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도 있다. 쉽게 말해 최근의 가시적인 성과는 그동안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견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한동안 파이프라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목이 마를 대로 마른’ 북측이 이렇듯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5년 하반기의 고조된 분위기를 국정원 대북라인의 복원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지적에는 분명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북에서 온 ‘대담한 제안’

    특히 최근 들어서는 조심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한다. 9월 하순 외교가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 여부를 두고, 외교안보 부처 안팎에서 전해지는 일련의 소식도 그중 하나다.

    정부 관계자들은 최근 북한측이 힐 차관보의 방북과 관련해 ‘대담한 제안’을 해왔다고 전한다. 11월 열리는 5차 6자회담 이전으로 예정된 힐 차관보의 한국, 중국, 일본 순회방문 때 서울에서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 방문하도록 준비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가 북한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파장이 크겠지만,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해 간다면 그야말로 의미심장한 그림이 그려진다. 정전(停電)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임을 감안하면 ‘미국이 평화체제 수립을 전폭 지지한다’는 상징으로 활용되기에 충분한 이벤트인 것이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간 일이 있지만 현직 미국 고위관료가 판문점을 거쳐 휴전선을 넘은 일은 없었다.

    유의해야 할 부분은 북한이 이 제안을 전해온 것이 바로 국정원 대복라인을 통해서였다는 당국자들의 말이다. 당국자들은 “세부적인 사항은 밝히기 어렵지만 9월말 국정원을 통해 이 ‘대담한 제안’이 정 장관과 청와대에 전달됐다”고 전했다. 9월23일 최수헌 북한 외무성 부상이 유엔 연설을 통해 “우리는 힐 차관보를 환영할 것”이라고 밝힌 직후의 일이다. ‘승낙’은 공식창구를 통해, ‘판문점 통과’라는 보너스는 국정원 라인을 통해 전달한 셈이다.

    궁금한 것은 왜 북한이 굳이 이 ‘보너스’를 한국을 통해 전달하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미국과 북한은 이미 베이징과 뉴욕에서 직접 채널을 확보하고 있고, 실제로 뉴욕에 있는 유엔 북한대표부의 한성렬 차석대사가 이 문제를 미 국무부와 논의 중이라는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힐 차관보는 북핵 문제 돌파구가 열리기 전인 4월 무렵에도 방북을 추진하다가 딕 체니 부통령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접은 바 있다는 게 미국측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때도 국무부는 북미간 직접채널을 통해 이를 논의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에는 여러 종류의 답이 나올 수 있다. 우선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6자회담 타결 이후 네오콘 등 미 정부 내 강경파에 의해 수세로 몰리고 있는 힐 차관보의 처지를 배려해 ‘조용히’ 타진하려 했다는 관측을 제기했다. 직접채널을 통한다면 관련논의가 미국 내에서 공론화되기 때문에 힐 차관보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질 가능성이 크지만, 한국 정부, 특히 힐 차관보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루트를 통해 전달하면 힐 차관보가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식이다.

    ‘대권주자’에 대한 배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정동영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 당국자들도 섣불리 부인하지 못한다. ‘힐 차관보의 판문점 통과 평양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이벤트에 정 장관이 큰 몫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 아니겠냐는 해석이다. 차기 대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 장관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 북한 또한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력 대선주자 관리’인 셈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북한이 이를 ‘국정원 라인’을 통해 제안한 사실을 주의 깊게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미국 고위관료의 방북을 위해 국정원 대북라인이 움직이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북한 역시 이 사안이 한국 정치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물밑라인이 앞으로 ‘보다 정치적인’ 혹은 ‘보다 개인적인’ 일에 활용될 개연성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물론 정부 관계자들, 특히 정 장관의 측근 인사들은 이러한 개연성에 대해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국내 정치를 위해 대북라인을 활용하는 식의 어리석은 상황은 절대로 발생할 리 없다는 것이다. “정 장관과 참여정부의 양식을 믿어달라”는 것. 한 관계자는 “남북관계 개선도 결국 정 장관의 성과로 남을 텐데, 국정원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사령탑을 맡고 있는 정 장관이 대통령선거 출마를 계획하고 있는 한, 어디까지가 국사(國事)이고 어디부터가 정치적 영역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정 장관이나 외교안보팀 수뇌부가 전혀 의도하지 않는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한 NSC 자문위원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했다.

    “정 장관이 남북관계의 진전을 발판으로 유력후보가 되어 대선에 출마했다 치자, 그러나 상대후보에게 아쉽게 패했다고 치자. 그럼 당선자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결과적으로 정 장관의 ‘입지 강화’에 공헌했던 셈인 당국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청와대 외교안보팀은 정무직이라 정권이 바뀌면 함께 갈린다. 그러나 국정원은 다르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북교섭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할 사람들이다. 사실 국정원 관계자들이 의식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 특정인의 대선 행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려 할 때, 그 과정에 국정원 라인이 부지불식간에 말려들 때, 대북채널은 완전히 소멸해 다시는 복원될 수 없을 것이다.”

    역설과 아이러니

    노무현 정부는 출범 이후 한동안 남북관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대북라인의 방치’를 꼽는 이가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대북송금 사건에 국정원이 관여했다는 ‘원죄’로 말미암아 그간 한반도의 긴장 수위가 불필요하게 높았다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2년간의 침묵’ 동안 국정원 당국자들이 뼈저리게 느낀 점도 그 부분일 것이다. ‘정치를 멀리해야 살아남는다’는 교훈이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현재의 정치지형상 안보와 국내정치가 어쩔 수 없이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정 장관의 ‘정치인’으로서의 의욕이 남북관계의 흐름을 바꿨다면, 거꾸로 판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다. 1년 남짓 성공적으로 작동해온 ‘국정원 대북라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기대와 함게 아슬아슬함이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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