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의미있는 ‘사건’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미국의 태도 변화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경수로의 ‘경’자도 공동합의문에 넣을 수 없다”는 기존의 태도를 바꿔 ‘적정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한다는 문안에 합의했다.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협상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에너지 제공에도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눈여겨볼 부분은 이번 공동성명이 단지 북핵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형성이라는 근본적인 이슈를 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 및 중국과 미일동맹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동북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구상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하다. 동북아에서 50여 년간 지속되어온 냉전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해체의 흐름’ 속에서 이번 4차 6자회담의 공동성명이 나왔다는 분석이다.
과연 미국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미국이 그리는 향후 동북아의 그림은 어떤 것이며, 이는 한반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먼저 ‘힐 구상’이라 불리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얼개를 살펴보고, 이 전략틀이 중국과 일본, 한반도 등 주요 동북아 국가 및 관련현안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분석해보기로 한다.
1. 미국의 새 동북아 구상, 어떻게 나왔나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 구상, 특히 한반도 관련부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은 동아태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이다. 지난해 8월 주한 미대사로 부임했던 힐은 7개월 만에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으며 서울을 떠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7개월을 7년과 같이 보냈다”는 그의 말처럼 힐 차관보는 주한대사 시절 부임 초부터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비롯해 한국 내 반미(反美)감정의 무마, 한미동맹 재조정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반미주의’와 애국심에 기초한 ‘반미감정’을 구분해내고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자신에 찬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게 된 듯하다. 이 같은 바탕은 힐이 6자회담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국익을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를 설득해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힐은 단순한 ‘중재자’에 머물지 않고, ‘힐 구상’이라고도 부르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을 추진하는 사령탑을 맡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을 마무리한 ‘데이턴 평화협정’의 체결을 주도했고, 코소보 사태 때도 특사로 파견돼 나토의 유고 공습 이후 평화체제 및 코소보 지역 자치정부 수립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바 있다. 힐의 이러한 이력은 그의 다음 목표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냉전구조 해체’에 관여한 이력은 힐 차관보뿐만 아니라 2기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에서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인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1기 시절의 ‘고상한 이상주의(lofty idealism)’가 아니라 ‘실용적 이상주의(practical idealism)’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스타일을 공유하는 이 그룹의 수장(首長)은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다. 이외에도 로버트 졸릭, 필립 젤리코, 닉 번스 등 국무부 요직에 앉은 라이스 장관 계열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큰 그림을 보면서도 말로만 떠들지 않고 외교정책에 반영할 줄 아는 인사’로 평가받는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추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8월초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을 베이징에 보내 중국 지도자들과 전략협의를 진행하도록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졸릭 부장관은 중국측에 한반도 현상 변경의 필요성을 말하며, 미국과 중국에 모두 우호적인 한반도를 위한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자회담을 동북아시아의 다자간 안보틀(multilateral security framework) 마련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는 문제 또한 중국과의 협의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