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한 이 차관은 어린 시절 바다를 벗하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부산 영도에서 성장한 그는 소년 시절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따분할 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네 뒷산에 자주 올랐다.
이 차관은 “유년과 학창 시절에 오륙도가 손에 잡힐 듯 바다가 늘 나를 따라다녔다”며 “그러면서 바다와 친해졌고 바다에 대한 친숙함이 현재의 나로 인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바다와의 인연으로 이 차관은 1980년 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을 때 해운항만청을 택했다. 1996년 해양수산부가 출범한 뒤에는 공보관과 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 해운물류국장, 정책홍보관리실장 등 해양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8년 10월부터 2년간 스웨덴 해사대학 해운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4년 1월부터 2년간은 미국 뉴저지 항만청에 파견돼 근무했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중 한 번도 바다를 떠나지 않아 정통 해운항만 관료로 평가받고 있다. 국토해양부 2차관에 취임하기 전까지 해양부 안에서는 최장현 전 차관보(행시 21회)와 함께 ‘쌍두마차’로 불린 엘리트 공무원이다.
이 차관의 부하들은 그를 “선이 굵다”고 평한다.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 위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2005년 해양부 해운물류국장 재직 때 항만 노조원 상용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계기관 대책회의 자료가 사전 유출돼 노조가 “노조 탄압”이라며 여론몰이를 하자 그는 사직서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현안을 밀고 나갔다. 항만노조가 일방적으로 하역 인력을 공급하던 구조에서 항만 노조원을 물류업체가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인력 투입을 회사가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항만 노무 공급 상용화를 관철시켰다.
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 재직 때인 2003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일으킨 태풍 ‘매미’로 부산항 신감만부두의 대형 크레인이 붕괴되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선사와 터미널 회사의 협조를 이끌어내 피해가 조기에 수습되자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은 이 차관의 노력을 인정해 청와대에 포상을 강력히 건의했고 그는 이듬해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 차관은 이명박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새 정부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인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는 부산고 동기로 막역한 사이다. 해운물류 전문가인 점과 박 수석과의 인적 네트워크에 힘입어 해양과 교통정책을 총괄하는 국토해양부 2차관에 발탁됐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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