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의 공복(公僕)을 선발하는 국가공무원 시험이 잇따라 소송에 휘말리며 ‘과연 믿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98년 치러진 사법시험 문제 중 7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법원의 판단을 받은데 이어 99년 41회 사법시험에서도 모두 6문제에 정답이 두 개거나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것. 국가시험의 신뢰성이 누더기가 되자 행자부는 고시제도 개편안을 내놓았는데….》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각종 국가고시와 7·9급 공무원 시험을 관리하는 행정자치부 고시과 직원들은 공통적으로 술을 잘 마시고 고스톱을 잘친다. 이들은 보통 시험이 치러지기 20∼30일 전에 서울 종로구 창성동 합동청사 내의 국가고시 편집실에 들어가서는 시험이 끝나는 날 오후에야 풀려나온다.
시험위원들이 문제를 선정하고 최종 결정된 문제들이 인쇄되는 동안 전화선도 없이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바깥 출입이 금지된 사람들이 술과 고스톱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는 것이다. 올해 사법시험 1차시험 문제선정 및 재검토위원으로 위촉된 사람들도 이와 같은 ‘수감’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까다로워진 출제절차
예년에는 50명 남짓한 위원들이 하루에 출제를 끝냈으나 1차시험문제 오류판결이 잇따라 나옴에 따라 출제절차가 꽤 까다로워졌다. 2월20일 실시한 사법시험을 앞두고 출제위원 140여명과 재검토위원, 그리고 관리요원들은 경기 양평의 모처에서 10일간 합숙하며 23과목에 40문제씩 모두 1000문제에 가까운 시험문제를 내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내년부터는 행정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 지방고시 등 4개의 고등고시 1차시험 출제도 이렇게 요란한 사법시험 출제 시스템을 따를 전망이다.
사법시험과 각종 국가고시의 1차 객관식 시험은 문제은행 방식이다. 평소 과목별로 각계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출제한 문제들을 카드형식으로 모아뒀다가 이중에서 매년 시험문제를 선정한다. 현재 문제은행에 등록돼 있는 문제는 30만 개가 넘으며 매년 출제문항 만큼의 문제가 새로 추가된다.
모든 공무원 시험과 지난해까지 치러진 사법시험의 경우 출제 절차는 문제를 선정할 시험위원을 위촉하고 → 문제은행에서 문제를 선정한 뒤 → 인쇄를 거쳐 → 시험을 치르고 → 정답을 결정해 → 채점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순서다.
사법시험의 경우 시험위원은 헌법 민법 형법 등 기본 법학과목은 과목당 4명. 이중 판사나 검사를 1명 이상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머지 20개 선택과목은 과목당 3명이 문제 선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시험위원을 위촉하기 위해 행정자치부 고시과는 900여개의 시험과목별로 시험위원 인력풀을 관리하고 있다. 이 인력풀에는 전국의 고시과목 관련 교수들과 관련 전문인들의 인적사항, 연락처가 기재돼 있다. 한번 시험위원으로 위촉되면 다음해에는 빠지는 것이 원칙이다.
시험위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7시까지 국가고시 편집실에 모여 문제를 선정한다. 3중문으로 된 편집실은 344평 규모로 이 안에서 문제 선정위원들은 과목별로 정리된 문제은행에서 시험문제를 뽑고 3800여권의 참고도서를 들춰보며 최종 출제문제를 다듬는다.
이렇게 뽑힌 시험문제는 위원들이 모두 합의해야 최종 시험문제로 선정하고 시험위원들간 논란이 있는 문제는 아예 빼버린다. 정답은 일단 문제 선정단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치른 뒤 정답을 재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법령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문제선정 당시의 정답이 시험시행 시점에는 바뀌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대개 법령의 효력이 시험시행일을 기준으로 언제 발생했느냐를 가지고 가린다.
이와 같은 출제시스템은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 이미 바뀌었고 나머지 국가고시는 내년부터 바뀐다. 즉 시험문제 선정 단계에서 선정한 문제를 별도의 재검토위원회가 점검하고 문제지도 공개해 의견을 수렴한 뒤 정답심사위원단이 최종 정답을 결정하는 3중 검증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문제 선정위원회와는 별도로 재검토위원회와 정답심사위원단을 운영할 경우 시험절차는 꽤 번거로워진다. 게다가 한번 공개한 문제는 다시는 쓸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은행 관리에 막대한 차질이 예상된다. 행정자치부가 이와 같은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시험 출제시스템을 바꾸기로 한 배경에는 사법시험 1차시험의 오류를 지적하는 소송과 이를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들이 있다.
잇따른 오류지적 판결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구욱서·具旭書 부장판사)는 지난 1월14일 “99년도 41회 1차 시험 중 2문제의 정답이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민법 문제 1개는 정답이 2개이고 형법 문제 1개는 정답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1차시험에 탈락한 송모씨 등 206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이 소송에서 “2개 문제에 오류가 발견된 만큼 이에따라 합격선 안에 들게된 송씨 등 28명에 대한 불합격처분을 취소하라”며 원고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13개 문제에서 출제 및 정답 선정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민법문제 1개는 정답이 2개로, 형법문제 1개는 정답이 없는 것으로만 판명됐다”며 “이 두 문제의 오류로 탈락한 28명에 대한 불합격 처분은 취소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뿐 아니라 행자부가 채점 도중 헌법과 지적재산권법 등 4문제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정답을 정정한 사실도 재판 과정에 밝혀졌다. 재판부 관계자는 “그 4문제 중 2문제는 정답이 없어 모두 맞은 것으로 채점됐다”고 밝혔다. 결국 대표적인 국가시험인 사법시험에 아예 정답이 없는 3문제를 포함, 6문제가 잘못 출제된 것이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이재화(李在華)변호사는 출제오류가 더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항소할 계획이며 이번 판결로 400여명의 당락이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판부는 “사법시험을 주관하는 행정자치부는 문제 선정과정과 시험 후 정답의 검토 확인과정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각 문제의 변별력에 대한 완벽한 검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밖에 98년도 40회 1차시험에서도 7문제가 잘못됐음이 확인됐다. 이중 헌법 1문항 민법 1문항 형법 2문항 등 4문제는 대법원 판결 후 복수정답으로 처리됐고 2문제의 오류는 행정자치부의 채점과정에 밝혀졌다. 나머지 1문제는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이에따라 행정자치부는 지난해 9월 사법시험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불합격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해 대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은 신이철(37) 오윤석(35)씨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수험생 등 527명의 불합격처분을 직권 취소했다. 사법시험 사상 정부가 불합격처분을 취소해 추가로 합격처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부의 조치에 따라 추가 합격자들은 올해와 내년 두 차례에 걸쳐 사법시험 2차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갖게 됐다. 41회 1차 2문제의 오류가 대법원에서 확인될 경우 41회의 ‘억울한’ 탈락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드러난 40, 41회 1차 문제의 오류만 무려 13개. 출제 잘못에 따른 후유증은 탈락자 구제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시험의 생명인 신뢰도와 공정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잇따르게 돼 막대한 행정비용이 들게 된다.
40회 1차시험에 불합격 했다가 뒤늦은 문제 오류 발견으로 지난해 구제된 태모씨(31) 등 171명은 1월 “잘못된 문제 출제로 피해를 보았다”며 정부를 상대로 1인당 2000만원씩 모두 34억2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법조계는 40회 시험에서 추가합격한 527명이 모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다면 정부의 부담은 최소 50억원 이상이라고 추산했다.
사법시험, 신뢰의 위기
이처럼 사법시험, 특히 법학 과목에서 출제 시비가 잇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행정자치부 김주섭(金周燮)인사국장은 시험문제가 함정출제로 흐를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다수설과 소수설이 끝없이 경쟁하는 법학의 특성을 이유로 꼽는다. “사시는 5개의 보기 중 가장 옳은 것을 고르는 시험이다. 응시자가 많아 변별력을 높이려다 보니 문제를 이중 삼중으로 꼬게 된다. 매년 커트라인이 80점선에서 5점 정도가 올랐다 내렸다 할 정도로 높고 커트라인 근처에 수백 수천명이 몰려 있어 1,2문제 차이로 당락이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연히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될 수밖에 없다. 정답 1개를 뺀 나머지 4개를 완전히 틀린 보기로 채운다면 답을 고르기가 쉬워 고득점자가 많이 나올 것 아닌가.
또 법에 관한 학설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다수설이 소수설이 되고 또 소수설이 다수설이 되는 것이다. 5개의 보기중 가장 옳은 것이 있게 마련이지만 나머지도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 학설에 따라 10∼20% 정도는 맞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시험의 몇몇 문제는 하느님도 정답을 모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행정자치부가 정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98년 행정자치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신모씨(37)가 재판과정에 겪은 해프닝 하나. 신씨는 40회 사시 1차시험 민법 17번 문제의 정답이 4번이라고 주장했다. 정답에 대한 소견을 밝힌 교수중 일부는 신씨의 주장에 동의했고 몇몇 교수들은 3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행정자치부는 1번을 정답으로 채점했다고 밝혔다.
한편 행정자치부의 또다른 관계자는 “97년부터 사법시험 1차 4회 응시제한 제도가 실시돼 그 여파로 98년부터 수험생들의 출제 잘못 시비가 급증했다”고 분석한다. 올해 처음으로 사법시험 1차를 4번 보면 4년간 응시조차 못하는 ‘4진 아웃제’의 당사자가 나오게 된다. 올해 1차시험이 4번째인 수험생은 이번에 떨어지면 4년동안 시험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출제 오류 소송이 급증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예전에도 소송이 제기되지 않았을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의 오류는 있어 왔다는 얘기다.
사법시험 출제 시스템을 아는 사람들은 정답시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완전히 맞거나 틀린 것이 없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 법인만큼 여러 출제자가 다양한 시각에서 시간을 가지고 문제를 선정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선 문제은행에 ‘문제’가 많다. 대학교수나 전문가가 행정자치부 문제은행에 1문제를 넣고 받는 돈은 7000∼8000원. 이에 비해 사설 고시학원은 모의고사 1문제당 3만원 이상을 지불하고 있다.
또 문제은행에서 시험문제 40문항을 골라 검증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9~10시간에 불과하며 그 대가로 받는 돈은 10만∼2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교수들이 학회나 기업체 세미나에 참석해 1시간 남짓 발표하고 받는 거마비가 50만원 안팎인 현실을 감안하면 어이없는 액수다. 행정자치부측은 “최고 엘리트들이 경쟁하는 시험에 출제위원으로 선정된 것을 명예로 생각해야지 돈보고 출제하려 해서야 되겠느냐”고 주장한다.
수당 뿐만이 아니다. 고려대 법과대의 한 교수는 “출제시간이 모자라 늘 쫓기듯 문제를 고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출제위원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제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과대의 또다른 교수는 “출제교수를 학교·지역별로 배당하는 방식은 자질이 모자라는 교수를 위촉할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한다. 구조적으로 행정자치부 문제은행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수사회에는 ‘문제 오류를 지적하는 소송과 판결이 더 많아져야 출제 수당도 많아지고, 따라서 문제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는 뼈있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2월20일 시행한 사법시험 1차시험 출제 및 채점과정은 종전과는 크게 달랐다.
오류 가능성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문제 선정위원이 출제한 문제를 재검토위원이 검토하고 이를 출제위원이 재심사했다. 재검토위원은 선정위원이 문제은행에서 문제를 선정하면 직접 문제를 풀어 정답시비를 없애고 선택과목간 난이도를 조절한다. 재검토위원은 과목당 2명이며 문제 선정위원과는 별도의 인력풀에서 뽑았다. 최종 선정된 문제는 합숙소에 들여놓은 컴퓨터에서 타이핑 작업을 마무리한뒤 경찰병력의 삼엄한 경비속에 한 민간 인쇄업소에서 인쇄를 마쳤다. 종전에는 국가고시 편집실에서 자체 인쇄시설을 활용했으나 인쇄 질을 높이기 위해 외부에 맡긴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수험생들이 시험을 본 뒤 문제지를 가져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시험 문제지는 시험이 끝나면 모두 회수해 제지공장에 맡겨 고시과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학품을 넣어 아예 녹여 없애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에 사법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문제지를 가져가 정답을 알아본 뒤 출제위원과 전문가 등 5명으로 구성된 ‘정답심사위원단’이 발표한 정답 가안을 보고 2주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정답심사위원단은 이의제기 내용을 검토한 뒤 3월말경 최종 정답을 결정해 발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정답으로 채점을 거쳐 5월6일 1차시험 합격자가 발표된다. 주관식인 사법시험 2차시험 문제와 정답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했다.
출제시스템의 변화에 대해 법조계와 수험생들은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문제가 공개됨에 따라 이제 수험생들은 시험을 치른뒤 서울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문제를 짜맞추고 정답을 만드느라 몸살을 앓을 필요도 없게 됐다. 또 출제와 재검토, 그리고 문제공개 및 이의수렴절차 등 3단계의 검증절차로 시험의 객관성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게 됐다.
행자부의 생색내기(?)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다. 우선 문제 선정위원 외에 재검토위원 정답심사 위원 등을 위촉해야 하는데 문제 선정위원을 위촉하기에도 부족한 인력풀에서 매년 어떻게 겹치지 않게 위원들을 선발하느냐는게 문제다. 특히 문제선정이나 재검토위원으로 선정되면 10일 넘게 감금상태와 다름없는 합숙을 해야 하는데 턱없이 낮은 수당에 선뜻 위원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지 공개에도 어려움은 많다. 출제했던 문제가 다시 나올 수 있는 문제은행 시스템을 고수하는 한 원칙적으로 문제와 정답은 공개할 수가 없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 행정자치부의 호소를 받아들여 “사법시험 1차 시험문제와 정답은 정보공개법상의 미공개 대상에 해당돼 공개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서도 문제의 유형은 공개해도 문제 자체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게 행정자치부측의 설명이다. 행정자치부측은 법원의 판결까지 뒤집어가며 공개키로 한 이유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업무나 예산부담은 엄청나게 늘게 된다. 한번 공개한 문제는 다시 쓸 수 없다. 문제은행식 출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시험문제와 정답을 공개하려면 계속 새로운 문제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사시 관리 책임이 조만간 법무부로 넘어갈 것을 예상하고 행정자치부가 무책임하게 생색내기를 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현재 행정자치부는 내년부터는 사법시험을 법무부로 이관해 치른다는 계산이고 법무부는 ‘노하우’가 없다며 3,4년 유예기간을 달라는 주장이다. 특히 올해는 사법시험 1차를 4번 보면 4년간 응시할 수 없는 4진 아웃제의 당사자가 처음 나온다. 따라서 행정자치부가 부실 출제에 따른 소송 사태를 일단 막고보자는 미봉책을 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폐지되는 사법연수원
행정자치부가 현실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뜻 출제시스템 개선안을 내놓은 것은 현재 진행중인 고시제도 개편작업과도 무관치 않다. 사법시험의 경우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법조인 양성방안이 포함된 사법개혁안 최종안을 지난해말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종안에 따르면 사법시험이 정원제에서 자격제로 바뀌고 응시 대상도 대학에서 법학과목을 이수한 사람으로 제한하게 된다. 또 사법연수원을 폐지하는 대신 학문과 실무연수를 병행하는 독립법인인 한국사법대학원(가칭)을 설립해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최종안을 토대로 구체적인 사법개혁안을 만들어 시행하려면 앞으로 5년 이상은 기다려야 하지만 벌써부터 개혁안을 두고 논란이 많다. 우선 절대점수제로 정원을 철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없이 변호사를 양산해 과당경쟁을 초래한다”는 반대의견과 “더 많이 뽑아 고시공부의 낭비를 줄이고 법률서비스를 널리 제공해야 한다”는 찬성론으로 나뉘고 있다. 또 법학과목 이수자에게만 응시자격을 준다는 개편안에 대해서도 찬반론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즉 반대하는 쪽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며 의학 과학기술 등 전문분야의 법조인 양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장기간의 고시공부로 ‘고시낭인’을 양상하는 비뚤어진 현실을 바로잡는 효율적인 대책이라고 맞서고 있다.
선발후 교육기관이 사법연수원에서 한국사법대학원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고시에 합격하고서도 학생신분으로 돈을 내고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고 또 선발후 교육기간을 대학원 2년, 연수 1년으로 늘리는 것은 너무 길다는 지적도 많다. 이와 같은 사법개혁안 가운데 정부가 어떠한 방안을 채택할지는 미지수지만 장기적으로 사법시험 정원제는 철폐되는 쪽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는 지난해 12월 현행 사법시험이 정원제를 택하고 있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참여연대는 사법시험 준비생과 변호사 등 70여명으로 청구인단을 구성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위헌심판 청구서에서 “현행 사시는 정원제를 통해 합격자수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정원제를 없애는 대신 로스쿨 졸업자 등을 대상으로 기본 자질을 검증하는 시험을 실시해 더 많은 법조인을 길러냄으로써 국민에게 값싸고 질 좋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한편 중앙인사위원회(위원장 김광웅·金光雄)도 2003년 시행을 목표로 행정 외무 기술 등 국가고시제도 개편작업을 하고 있다. 정부가 고시제도를 개편하게 된 이유는 현행 국가고시제도로는 전문성과 창의성이 중시되는 공직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고시제도 개편안
이에 따라 고려대 정부학연구소는 지난해말 중앙인사위의 의뢰를 받아 4가지 고시제도 개편안이 담긴 최종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제1안은 현행 고시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되 운영상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즉 고시전담기관을 설립하고 1,2차 시험문제를 개선하며 3차 면접시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제2안은 현행 객관식 1차시험을 폐지하고 공직적격성검사(PSAT, Public Service Aptitude Test)를 실시하며 2차시험은 현재의 2차시험 과목을 4과목 정도로 축소 조정하고 마지막으로 집중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제3안은 2안과 마찬가지로 1차로 PSAT를 치르고 2차는 전문지식을 평가한 뒤 인턴과정을 거쳐 최종선발자를 뽑는다. 2안과 가장 큰 차이점은 최종 선발자의 일정 비율을 총장 추천자로 뽑는다는 것이다. 제2안과 3안 모두 토익이나 토플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인 사람에게만 1차 시험 응시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제4안은 고급공무원 양성을 위한 국가 공인의 2년제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 이 학교 졸업생들에게만 고시 응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정부는 제2안을 채택한 뒤 차츰 3안으로 개선하거나 2안과 3안을 통합한 형태의 새로운 개편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채택 가능성이 높은 2안과 3안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 우선 2안과 3안 모두 문법 위주의 현행 1차 영어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토익이나 토플 등의 성적으로 대체했다. 영어는 최소자격요건이어서 영어성적이 일정수준 이상이 되는 사람에게만 응시기회를 준다. 정부는 토플의 경우 580점, 토익은 820점을 커트라인으로 잡고 있다. 한편 100점만점인 텝스도 아직까지는 토플이나 토익처럼 문제은행이 충실하지 않아 성적을 인정해주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고시제도를 시행하는 2003년 상황이 개선되면 성적을 인정할 방침이다.
영어성적이 일정수준 이상인 사람들은 1차시험을 치르게 된다. 2안의 경우 단순 암기위주의 현행 1차시험 대신 PSAT라는 기본 소양평가를 실시한다. 또 헌법 행정학 경제학 등의 관련 전문지식도 평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전문지식을 활용한 종합적 사고력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매년 시험의 난이도가 달라질 경우를 감안해 PSAT 성적의 유효기간은 1년으로 했다.
다음은 2차시험. 필수과목 위주로 현행 2차 시험 과목을 축소 조정해 실시한다. 일반행정의 경우 행정법 행정학 정치경제학 조사방법론 등으로 간단해진다. 2차 시험에서 최종합격자의 130%를 선발해 마지막으로 3차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면접시험은 3일동안 계속된다. 첫째날은 개인면접을 통해 전문지식을 평가하고 이틀째는 집단면접(group presentation)으로 5,6명의 수험생이 한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 개개인의 문제해결능력 보고능력 정보화능력 관리능력 리더십 등을 평가받게 된다. 마지막날은 외국어 회화시험을 치른다.
마지막 면접시험까지 통과한 사람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당해부처에서 실무수습을 거친 후 정식 발령을 받게된다.
제3안도 1,2차 시험은 거의 비슷하다. 1차로 PSAT와 같은 기초평가를 하고 2차로 정책방법 정책분야 행정관리 등 영역별로 전문지식을 평가한다. 제2안과 다른점은 인턴과정을 둔다는 것이다. 2차시험에서 최종 합격자의 2,3배를 뽑아 8개월 이상 인턴수료후 당해부처에서 최종 선발되는 사람만 시보로 임용해 실무수습을 받게 한다. 제3안의 또다른 특징은 선발 과정을 공개채용과 총장추천으로 이원화한다는 것이다. 총장추천제를 도입하는 이유는 대학교육을 정상화하고 지방대학 출신 수험생들에게 공직 참여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공채의 경우 1,2차시험을 치른 뒤 면접은 생략하고 바로 인턴과정을 밟는다. 총장추천을 받은 경우에는 1,2차 시험은 치르지 않고 면접시험에서 전문지식을 구술 평가한 뒤 합격하면 공채대상자와 마찬가지로 인턴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다. 총장 추천을 받으려면 학점이 4.5점 만점중 4점 이상이어야 한다.
고시제도의 바람직한 개선방향
장기적인 방안으로는 행정전문대학원 설립도 고려 대상이다. 즉 국가공인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것이다. 행정대학원 입학 자격은 4년제 대학 졸업자로 하되 대학원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상의 개편안 모두 공직에 적합한 우수한 인재를 충원하는데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현재 채택 가능성이 높은 2안과 3안 모두 2차 시험 과목을 축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 경우 학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현행 고시제도 하에서도 선택과목이 조금씩 조정될 때마다 학계와 학원가가 한바탕 술렁이는 점을 감안하면 고시제도를 개혁하다시피 했을 때 그 반발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특히 면접시험을 강화하거나 인턴제 및 총장 추천제를 도입할 경우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또 인턴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의 처리도 문제다.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졸업생들에 한해 응시 자격을 줄 경우 대학원 입학 시험이 또다른 ‘고시’로 변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현행 고시제도를 약간 수정하는 선에서 유지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행 고시제도에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국가고시의 생명인 공정성 시비는 차단할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선발과정에 정실개입을 차단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험점수를 사후 공개하고 감사를 실시하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해서라도 현행 고시제도를 개편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이번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고시제도 개편안을 마련한 뒤 공청회를 통해 최종안을 확정, 올해안에 현행 고시제도를 개편하고 2년 후인 2003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