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문학’으로 도약하고 있는 일본 소설.
- 혼혈의 감성, 문화적 귀속성이 희박한 인공 언어로 보편의 정서를 끌어안는다. 재일한국인 문학의 성과도 두드러지는데…. 일본문학에서 ‘일본어 문학’으로, 그에 대한 짧은 보고서.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일본소설의 번역 붐이 일었는데 역시 ‘하루키 신드롬’의 여파로 보아도 무방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이어 최근에는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시마다 마사히코 등이 국내 독자들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이들 역시 하루키와 더불어 오늘날 일본문학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들이다.
현대 일본문학은 국내 독서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둘이나 배출한 것도 세계문학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작가들의 활동도 두드러져,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소설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현대 일본문학의 현황을 이해하기 위해 두 노벨상 수상 작가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는 패전 이후 1980년까지 일본 현대문학의 두 흐름을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스톡홀름의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오에 겐자부로는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으로 수상 연설을 했다. 이 이색적인 제목은 26년 전 같은 자리에 섰던 선배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 연설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패러디한 것이다.
선배 작가에 대해 자못 ‘불손’하게 비춰질 수도 있는 제목의 연설에서 오에는, 어조는 비록 신중했지만 가와바타를 단호히 비판했다. 비판의 핵심은 일본적 미학의 특수성에 안주하며 신비주의의 닫힌 세계에 칩거하는 가와바타의 문학이 일본과 일본인을 더욱 ‘애매’한 존재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에 대한 과도한 나르시시즘이 아시아에서 ‘침략자’의 역할로 이어졌다고 말함으로써 근대일본사에 대한 자기반성을 곁들였다. 그는 천황이 노벨상 수상자에게 하사하는 문화훈장을 사절함으로써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
일본적 서정 對 세계적 보편성
가와바타와 오에는 사뭇 대조적인 작가다. 가와바타가 전통적 서정성과 자연관에 의존하면서 일관되게 ‘일본적’ 서정을 일궈왔다면, 오에는 되도록 일본어가 강요하는 문화적 귀속성을 배제하고 지구적 규모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 보편성을 지향했다.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은 세계(=서양)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수한 세계를 그려서 주목을 끈, 다시 말해 서양인들의 이국취미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점에서는, 가와바타에 못지않게 서양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읽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오에의 수상은 일본문학이 세계적 동질성의 기반 위에서 평가받았다는 의미이며, 일본문학이 비로소 세계문학 속에서 진정한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아울러, 가와바타에 대한 오에의 비판은 이질적인 것에서 신비하고 진기(珍奇)한 것을 찾고자 하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 혹은 관음증적인 동양취미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다.
전통적인 자기고백의 문학인 사소설에서부터 오에 겐자부로처럼 보편적 소설 문법을 지향하는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후반까지 일본 현대문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현대문학의 큰 줄기를 다음 세 집단으로 분류해 설명한 바 있다. 제1그룹은 ‘세계문학으로부터 고립된 문학’으로 앞서 언급한 가와바타와 다니자키, 미시마가 여기에 포함된다. 제2그룹은 ‘세계문학으로부터 배워 세계문학을 향해 되돌려주고자 하는 문학’으로 오오카 쇼헤이, 아베 고보, 오에 겐자부로가 여기에 속한다. 제3그룹은 ‘세계가 하위(대중)문화로 공고하게 얽혀 있는 시대의 전형적인 문학’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 등이 해당한다.
일본의 두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와 오에 겐자부로
“대중문화 감각으로 단련된 새로운 문화 세대가, 이제까지 일본의 문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쌓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창출할 것”이라던 오에의 ‘불길한 예언’이 적중이라도 하듯, 가식적 교양주의를 거부하고 대중문화와 편견 없는 교감 속에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감수성을 선보인 20~30대의 작가들이 대거 출현했다. 이른바 ‘신세대 작가’였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이들이 1976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으며 등장한 무라카미 류와 1979년에 ‘군조(群像)’신인상으로 데뷔한 무라카미 하루키다. 무라카미 류는 데뷔작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물질적 상상력’과 ‘몰(沒)주체’의 감각을 작품 전체에 내세워 섹스와 마약으로 뒤범벅된 현실을 거칠고 원색적인 언어 공간에 담아냄으로써 이단(異端)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이 두 사람의 문학적 색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자세나 사회·문화적 현실 인식에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첫째, 소설의 성공과 ‘재미’에 관한 기존 작가들의 금욕적(혹은 위선적) 태도와 일선을 긋는다. 즉, 약간 고급스런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것을 독자와의 이상적인 관계 설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더는 작가가 ‘구도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두에서 가공의 인물인 미국 소설가 데렉 하트필드의 입을 빌려 “기분이 좋은 게 뭐가 나빠?”라고 한 말은 분명 기존 문단의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균질화한 개성 혹은 자본주의적 인간
둘째, 기존의 리얼리즘 문체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문학형식을 도입한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의 데뷔작은 해체주의적 상상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전차를 타면 맨 처음 승객 수를 세고, 계단 수를 모두 세고, 틈만 나면 맥박을 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사이에 나는 삼백 오십 팔 번 강의에 출석했고, 쉰 네 번 섹스를 했으며, 담배를 육천 구백 이십 일 개피 피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애써 작위적이고자 하는 지향 속에서 추출된 인공적 리얼리티, 숫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기성의 소설문법에 대한 식상을 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평론가 가와무라 사부로는 이 소설을 두고 “생활의 리듬을 멀리하고 단지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말만을 적어놓은, 말의 콜라주와 같은 소설”이라 평했다.
셋째,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균적 소비문화를 누린 이른바 ‘풍족세대’ ‘개성세대’를 독자층으로 상정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빈곤’이 결여되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는 대학생들도 이성과 데이트할 때면 품격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복장에 대해 세련된 감각을 지녔으며, 관련 기술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고유명사도 곧잘 눈에 띈다. 같은 무렵 다나카 야스오는 소설 전체가 상품(정확하게는 이른바 명품) ‘카탈로그 잡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 ‘어쩐지 크리스탈’(1980)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속해’ 있기를 거부한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광고회사 경영자, 레스토랑 주인, 모델, 컴퓨터 프로그래머, 대학생…. 한결같이 소속의 중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업이다. 이야말로 균질한 소비문화를 향유하며 간섭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개성세대’가 꿈꾸는 세계인 것이다.
넷째, 소설에 대중문화, 혹은 대중문화적 감각을 과감히 접목시킨다. 1960년대 이후의 미국 팝 뮤직과 재즈, 할리우드와 유럽의 영화는 이들의 소설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문화적 기호들이다.
왼쪽부터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신세대 작가들의 문학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대중문화와 자본주의다. 영화나 재즈, 로큰롤, 만화, 애니메이션은 독서 대중에게 문화적 동질감을 환기시키는 문화적코드다. 그리고 이러한 ‘기분과 취향’의 공유는 동시대 감각을 불러일으켜 작가가 독자에게 한층 더 친숙한 존재로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일본문학을 주도한 신세대 작가들의 대중적 성공은 고도산업사회에서 나날이 위세를 떨쳐가는 대중문화에 대해 작가의 청교도적인 고독으로 대항하려는 자기 기만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 대신 생생한 동시대 감각과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다양한 삶의 양식을 ‘풍속’이라는 코드로 연계시킨 데서 비롯됐다.
그들을 키운 건 8할이 미국 대중문화
또 하나의 주제어는 자본주의다. 앞에서 거명한 작가들은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 1970년대의 안정 성장기에 성장했고, 이른바 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독자를 상대로 소설을 써오고 있다. 급속한 도시화와 자본주의의 성숙에 따른 풍족함을 누림과 동시에 압도적인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작가들이, 한층 개성적이며 세련된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에는 자본주의의 과실이 안겨주는 감미로운 충만감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중문화와 자본주의는 이들 작가와 독자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의 끈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일본문학과 미국문화와의 관계에 대해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미국 대중문화와 미국식 소비문화는 일본 현대작가들의 감수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문화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40여 년 전부터다.
‘60년대가 되어서 아메리카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그것도 과거 ‘기브 미 추잉 검’의 세대가 아메리카를 올려다본 것과는 달리, 더욱 친근한 캐주얼한 양식으로서의 아메리카를 느꼈다. 제니스 조플린의 아메리카, 짐 모리슨의 아메리카, ‘이지 라이더’의 아메리카, ‘내일을 향해 쏴라’의 아메리카, 커트 보네거트의 아메리카……그것은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가로서의 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아메리카였다.’(가와무라 사부로 ‘60년대의 상징으로서의 아메리카’ 중에서)
현대 일본문학 안에 미국이 들어오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미국의 대중문화다. 1960년대에 성장기를 보내며 미국 대중문화를 흡수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적인 것과의 가장 완벽한 형태의 동거를 실현한 작가다. 할리우드 영화광에다가 3000장이 넘는 재즈 음반 수집가이며, 고교시절부터 펄프 픽션 수백권을 독파한 그에게 미국이란 존재는 ‘생활의 리얼리티’가 말끔히 탈색된, 완벽한 픽션을 보장해주는 ‘기호’들로 가득 찬 세계다.
‘나는 실체로서의 아메리카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중략)…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의 시간성 안에서 인식하는 아메리카, 또는 상상하는 아메리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작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는 미국이다. 그 유리창은 로큰롤이고, 소설이며, 영화이고, 어떤 경우에는 순수한 정보-정보라는 이유만으로 성립하는 정보-이다.’(무라가미 하루키 ‘기호로서의 미국’ 중에서)
대개 미국산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적 사고로 구축된 문학세계는 당연히 ‘일본적’ 감성과는 동떨어진, 무국적의 색깔을 띨 수밖에 없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하루키 등의 소설이 여러 국경을 넘어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제공해준다. 일본의 다국적 기업 소니(SONY)의 세계적 유통망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확립되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국적성은 이미 전세계에 뻗어 있는 미국의 대중문화, 소비문화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미국적 대중문화는 영어 이외에 또 하나의 세계 공용어인 셈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지난 10년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열광한 것을 두고 일본문화에 대한 전긍정(全肯定)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다.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 혹은 다른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일본적’인 것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젊은 독자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열광하는 것은 둘 사이를 이어주는 공통의 끈이 있기 때문이며, 그 끈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진화의 결과다. 때마침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한국사회가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자본주의의 적자(嫡子)임을 숨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문화에 몸을 내맡기는 세대가 문화 소비집단의 중심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울러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유통구조 속에 함께 놓인 일본의 작가들과 한국의 젊은 독자층 사이에는, 문화적 동질감 혹은 동시대 감각을 공통 기반으로 삼는 문화적 연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10여 년 전에 시작된 하루키 신드롬을 이러한 시각에서 해명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일한국인 문학의 도약
해방 직후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김달수, 김석범, 이회성, 김학영, 이양지 등이 면면히 이어오던 재일한국인 문학은 어디까지나 일본문학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도는 4~5년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 재일한국인 문학의 답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주장하는 젊은 신인작가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재일한국인 문학은 일본문학의 제도권에 일정한 영역을 구축할 정도가 된 것이다.
1997년 유미리(柳美里)가 ‘가족시네마’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이후, 재일한국인 문학은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화제의 영화 ‘달은 어디에서 뜨는가’의 원작자이자 소설 ‘피와 뼈’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한 양석일. 양석일과 마찬가지로 오사카 한국인 집단거주지역 이카이노 출신이면서 2000년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현월(본명 현봉호). 같은 해인 2000년, 123회 나오키 상 수상작 ‘GO’로 일약 주목을 받은 가네시로 가즈키 등의 활약은 재일한국인 문학이 더는 변방 타자의 목소리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전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두 가지 점에서 기존 재일한국인 문학과 대비된다. 첫째, 차별에 대한 저항과 민족적 각성을 축으로 하는 기존 재일한국인 문학의 규범을 거부하고 ‘재일(在日)하는’ 개체로서의 개성을 자유분방하게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존 작가들이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금욕적이며 구도자적 자세, 때로 투사적인 기개로 창작에 임했다면, 이들은 문학의 엔터테인먼트 기능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대중의 지지를 통한 상업적 성공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최근 재일한국인 문학 ‘활황’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재일한국인 문학 내부에서 변화를 거치면서 재일한국인 문학에 대한 정의(“재일한국인이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그들의 고뇌와 저항을 일본어로 표현한 문학” 가와무라 미나토)는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재일’이라는 불행하고도 고단한 삶의 조건을 문학적 성채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처한 특수한 처지를 가족의 해체나 개인의 고독과 같은 보편적 주제로 녹여냄으로써 작품세계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재일한국인 문학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상은 유미리다. 유미리는 일본 독서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기작가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에 소설을 동시 연재하고 있으며, ‘가족시네마’ ‘풀 하우스’ ‘타일’ 등이 국내에 번역돼 재일한국인 작가 중 가장 많은 국내 독자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유미리는 아쿠타가와 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글쓰기는 민족이나 언어공동체는 물론이고, 자신이 소속된 가정이나 학교와 같은 집단 또는 사회에 위화감을 느끼며, 스스로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고통스런 자각에서 비롯된다. 유미리 소설에 특권적으로 등장하는 ‘불화’의 주제는 그의 유랑의식에 바탕한다. 자기/중심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타자/변방의 위치에서 존재의 근거를 모색하는 이방인의 감성이야말로 그의 ‘타자의 문학’의 근간을 이룬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미리, 양석일, 가네시로 가즈키, 형월
그러나 이 소설에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부조리한 삶의 현실이 소거된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재일교포 3세 고교생과 일본인 소녀와의 사랑이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물림해온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타자인식에 대한 고발도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고교생은, 한국인의 피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비하를 강요하는 외부환경에 실망과 좌절을 겪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국적이나 피를 떠나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존재에 대한 확고한 애정과 자신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국적이나 혈통만을 이유로 한 개인을 근거 없이 차별하는 일본 사회의 후진성을 고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단호하고 당당하지만, 거기에 ‘재일’이라는 체험에 기댄 한풀이식 원념(怨念)은 섞여 있지 않다. 또한 그의 소설은 그 제목만큼이나 새롭고 파격적이다.
그의 경쾌한 문체와 대중문화적 감각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그의 소설에는 여러 장르의 대중문화 기호가 범람한다. 작가 자신 역시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1000개 이상, CD를 5000장이나 소장하고 있는 ‘오타쿠’다.
“킴 베이싱어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비틀스 중에서 목을 자른다면 역시 링고 스타를 잘라야 하나?”
“슈퍼맨은 섹스 때 피스톤 운동도 역시 슈퍼급일까?” 이런 시시껄렁한 화제로 흥분하고 웃었다.
(이상 가네시로 가즈키 ‘GO’ 중에서)
이들에게 대중문화는 국적과 혈통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대안이다.
“애당초 국적 같은 거, 아파트 임대계약서나 다름없는 거야. 그 아파트가 싫어지면 해약을 하고 나가면 돼.”(‘GO’ 중에서)
국적을 ‘임대계약서’ 정도로 치부하는 작가의 현실 인식에는 다소 순진한 구석이 엿보이나 그 지향만은 진취적이고 풋풋하다. 이회성이나 이양지의 시대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인식이다. ‘재일 팝 소설의 걸작’ ‘유쾌한 청춘소설’이라는 세평과 함께 등장한 가네시로 가즈키는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음에도 스스로 ‘코리안 재퍼니즈’라고 부른다. 이러한 복수(複數)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그의 고집은 민족이나 국적을 절대시하는 국민국가 논리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 들린다.
그는 나오키 상 수상소감에서 “앞으로 기존 재일문학의 틀을 부수고 궁극적으로는 재일이라는 문자를 지워 일본문학 안에서 창작활동의 길을 걷겠다”고 작가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존재의 무거움’이 선물한 것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가로서 복이 많은 편이에요. 일본의 보통 젊은이들은 내가 누구인가를 되돌아볼 기회가 거의 없어요. 우리에게는 미국 같은 ‘이민국가’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강요되는 셈이어서, 소설가로서 매우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월, 2000년 5월)
자기동일성의 혼란, 혹은 이중 아이덴티티와 같은 문제는 재일한국인들에게 숙명처럼 강요된 고통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작가 현월은 위에서 말하듯, ‘불우’의 근원으로 여기던 ‘재일’의 현실을 일순간에 ‘유복’ 혹은 ‘혜택’의 조건으로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적을 ‘임대계약서’ 정도로 치부하는 ‘GO’의 주인공 역시 이 시대가 마련해준 ‘좋은 위치’의 수혜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느쪽에도 온전히 귀속되지 못하는 것을 원죄처럼 여긴 세대가 있었다. 김학영과 같은 작가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제 유미리나 가네시로와 같이, ‘부초’처럼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을 무상의 특권으로 여기는 무국적파 세대가 등장했다. 즉 과거의 재일한국인 작가들이 ‘재일’을 ‘겪었’다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유목민적 삶의 의지를 당당하게 천명하는 신세대 재일한국인 작가들은 어쩌면 ‘재일’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재일한국인 문학이 소멸한다면, 그것은 재일한국인 문학의 대중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오랫동안 일본과 한국문단에서 재일한국인 문학은 소거된 타자이거나 잊혀진 타자였다. 재일한국인 문학은 재일한국인들의 불우한 역사성과 사회적 조건에 대한 고뇌, 저항의 메시지로 간주됐다. 그러나 일본문학계가 지난 한 세기에 걸쳐 줄곧 매달려온 ‘자기’의 문제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찾게 되었을 때, 유미리로 대표되는 재일한국인 문학은 어느덧 제도화된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껄끄럽지만 신선한 존재감을 지닌 ‘타자’로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일본 전후문학에서 ‘재일한국인 문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민족적 소수자의 ‘특수’한 문학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본어에 의한 일본인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일본문학’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계기를 지니고 있으며, 문학적 소수자에서 소수자의 문학이라고 하는 ‘세계문학’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가와무라 미나코 ‘전후문학을 묻는다’ 중에서)
망명의 사고와 변방(=타자)에 대한 재인식은 현재의 일본문학계를 대변하는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적 소수자들이 일본문단의 제도권으로 활발하게 진입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재일한국인 문학이다.
일본문학에서 ‘일본어 문학’으로
일본 지식사회에서 무국적, 크레올, 디아스포라, 월경(越境)과 같은 단어들이 가장 첨단의 진취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은 이미 10여 년 전의 일이다. 최근 재일한국인 문학이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위에서 가와무라가 말한 바대로 재일한국인 문학에 대한 재인식은 지난 100여 년간 유지해온 문화적 순혈주의의 자폐구조에 대한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1980년 전후부터 시작된 일본문학의 지각변동은 일국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서양 문화권에서 진행된 근대적 가치체계의 붕괴과정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탈근대(postmodern)적인 현상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로코코 거리’의 시마다 마사히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다카하시 겐이치로 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적 달성을 보여준 작가들이다.
탈근대적 지향을 설명하는 단어로 주변, 유목(遊牧), 혼종(=잡종)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들은 1980년대 이후 일본 신세대 작가들이 보여온 문학적 모험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이들은 기존 일본 현대문학의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들의 문학적 근거로 삼았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하위문화를 창작 영역에 편입시킨 것도 혼종의 사고를 통한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일본문학이라고 하는 일국 문학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제까지 자명한 것으로 여겨온 일본문화를 상대화하거나 배제한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 자국문화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외부로 망명을 감행하거나, 아니면 타문화를 불러들여 자국문화와의 접목을 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21세기 문학의 활로를 이종교배의 실천에서 모색하고자 하는 지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다른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쉽다. 그가 의식적으로 문화적 귀속성이 희박한 중성적 언어, 다시 말해 가치중립적인 인공언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누리는 세계적 공시성은 다름 아닌 혼혈의 감성에서 얻어진 성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은 일본문학이 아닌 ‘일본어 문학’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낯설게 함으로써 표현의 확장을 꾀하려는 움직임은 시마다 마사히코, 최근 국내에 소개된 호시노 도모유키와 같은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일국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한 일본 작가들의 다양한 모험을 통해 일본문학은 바야흐르 일본어 문학으로 진화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