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집단 탈북 막기 위한 北 보위부의 유인공작

김동식 목사 납북사건의 진상

  • 글: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3-02-24 1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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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열성적으로 북한을 지원했던 김동식 목사는 북한 주민의 열악한 상황을 목도한 뒤 북한을 상대로 반(反)독재 투쟁에 나섰다.
    • 그는 몽골을 통한 탈북자들의 한국 망명루트를 개척했고, 몽골에 탈북자 난민촌 건설을 입안했다. 북한 보위부는 2000년 1월16일 김목사를 옌지로 유인해 납치했다. 김목사의 납치 전모가 드러났는데도 침묵하는 한국은 과연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인권국가인가.
    지난 1월16일로 김동식(金東植·지금 생존해 있으면 57) 목사가 행방불명된 지 만 3년이 되었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에서 고아원 겸 선교센터로 ‘사랑의 집’을 운영했던 김목사는 2000년 1월16일 12시30분쯤 옌지시 예림불고기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 일단의 젊은이들에게 납치된 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2000년 10월23일 통일부는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김목사가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 자료에서 통일부는 1970년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한국인은 김목사를 포함해 217명이고(해외에서 납치된 사람 포함), 김목사는 1995년 발생한 안승운 목사 납치사건 이후 두 번째로 북한으로 납치된 목사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북한으로 납치된 한국인이 486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김목사가 어떻게 납치되었고, 김목사의 송환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사실은 김목사의 송환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인 바 없다).

    이춘길, 김목사 납치조 명단 공개

    북한은 김목사를 어떻게 납치해 갔을까. 지난 1월호 ‘신동아’에는 북한 보위부(국정원에 대응하는 북한의 비밀 정보수사기관) 소속 공작원 이춘길(33)씨의 수기 ‘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가 실렸다. 중국 내 탈북자들을 체포,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이씨는 이 수기에서 ‘김목사는 탈북자들에게 종교의식을 심어준 후 북한에 성경을 들어가게 한 혐의가 있다’며 북한에서 온 공작원 세 명과 조선족 협조자 여섯 명 등 도합 아홉 명이 김목사를 납치하는 데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목사를 납치하는 데 사용된 차량은 회색의 중국제 산타나 승용차로 ‘吉 H 423-23’이라는 번호판을 달고 있다고까지 밝혔다. 수기를 통해 김목사의 납치 경위를 밝힌 이씨는 지난 1월22일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해 귀순의사를 밝히고 현재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이씨는 한국으로 귀순해 들어오기 전, 보위부의 지시를 받으며 중국에서 활동해온 북한 공작조와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한국군 기무사에 대응하는 군 비밀 정보수사기관)의 지시를 받으며 중국에서 활동해온 공작원들의 명단을 보내왔다(사진 참조). 이씨는 이 명단에서 김목사의 납치에 관여한 북한 보위부 공작원 세 명과 조선족 여섯 명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

    이씨가 김목사 납치에 관여했다고 밝힌 북한 보위부 공작원 세 사람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③번의 지광철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지만 이씨는 북한인으로 정리했다).



    이어 이씨는 김목사를 납치하는 데 도움을 준 여섯 명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혔다.



    이씨는 김목사가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이들이 예림불고기집 앞에 세워놓았던 차에 태워져 바로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고 설명했다. 북한 보위부는 왜 김목사를 납치해간 것일까.

    집단 탈북 막기 위한 北 보위부의 유인공작

    이춘길씨가 2000년 1월16일 김동식 목사 납치에 가담했다고 밝힌 북한 보위부 공작조와 협조자 명단

    ‘사람’그 자체로서의 김목사는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경남 출신인 그는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나와 장로교 학생신앙단체인 SFC(Student For Christ) 경남지방위원장을 지냈다. 그후 목회활동을 하며 결혼해 1남1녀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1986년 부인과 함께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부인은 사망하고 그는 오른쪽 대퇴부를 크게 다쳐 인공뼈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지팡이에 의존해 걸음을 옮기는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이 된 후 김목사는 장애인 같은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는 데 헌신했다고 한다. 이 시기 김목사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2남2녀를 입양해 그의 자녀는 3남3녀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입양한 아들 중의 한 명이 2000년 1월 옌지의 사랑의 집에서 머물다 김목사의 실종을 신고했던 김아론군이다. 얼마 후 김목사는 전도사로 활동해온 정영화(전도사로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은 주양선)씨와 재혼했다.

    김목사는 비록 장애인이 되었지만 뭔가 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하는 열혈남이었다. 반면 정영화씨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신앙생활에만 몰두해온 조용한 여성이었다. 이 시기 김목사는 재래시장에서 작은 수레를 밀며 행상을 하는 장애인들을 비닐하우스에 모아놓고 돌보고 있었다. 장애의 몸으로 장애인을 돌보는 김목사를, 내성적이지만 신앙심이 강한 정영화씨가 열심히 도왔다. 정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까지 들고 가 김목사를 도왔다.

    이러한 신앙심 때문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김목사는 중국 선교를 염두에 두고 서울에 온 중국 선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것이 인연이 돼 김목사는 중국의 초청을 받아 중국의 장애인을 돕는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90년 한국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 회장 자격으로 처음 중국을 방문했던 김목사는 이듬해에는 한국에서 교회 헌금을 통해 소 85마리를 구입해 중국 농촌의 장애인들에게 기증했다. 1994년에는 휠체어를 구입해 중국의 장애인들에게 기증했고, 중국의 여성 장애인인 장혜덕(여)씨의 책을 한국에서 팔아주기도 하며 중국 장애인을 돕는 데 열성을 다했다.

    이렇게 중국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 문제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북한 선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목사의 가족은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가 사별한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남매는 신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 공부하다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이것저것 따지는 습성이 있지만 미국 교회는 관대한 측면이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고 하는 헌금도 한국 교회보다는 미국 교회에서 훨씬 더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중국과 북한 선교를 보다 원활히 하려면 미국 교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김목사 부부는 첫 번째 부인이 낳은 자녀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영주권을 얻었다.

    이후 김목사 부부는 미국과 한국 교회를 오가며 마련한 돈으로 중국에 들어가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목사가 본격적으로 북한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95년이었다. 김목사는 한국과 미국 교회에서 마련한 옷을 전달하며 북한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북한인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애틀랜타 올림픽서 북 선수단 지원

    1996년 마침 김목사가 거주하던 미국 애틀랜타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다. 북한은 한인근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24명의 선수단을 포함해 60여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김목사는 애틀랜타 올림픽을 북한에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당시 선수촌에 입주한 24명의 북한 선수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임원은 호텔에 숙박해야 할 처지였는데, ‘주머니가 얇아’ 고민이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안 김목사는 한인(韓人)교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북한 선수단 지원 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29일간 집 한 채를 빌려 북한 임원의 숙소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빨래까지 해주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그의 부인이 앞장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훗날 북한 체육성 부상(副相)이 된 장웅(張雄·65) 등 북한 체육계의 요인들은 진심으로 김목사 부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목사 부부의 북한 선수단 지원은 7월26일 열린 여자 유도 48㎏급 결승전에서 모란봉고등중학교 5학년이던 만 16세의 계순희 선수가 그때까지 84연승을 질주하며 세계 최강을 자랑해온 일본의 다무라 료코를 꺾고 북한 선수단에 처음으로 금메달을 안겨줌으로써 더욱 뜻깊어졌다. 이날 유도 경기장에서 한국 선수는 메달을 따지 못했는데, 한국 선수를 응원하러 나왔던 한국 응원단은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계선수를 응원했다. 계선수의 우승이 더욱 극적으로 부각됐음은 물론이다.

    7월31일에는 레슬링 자유형 48㎏급 결승에서 김일 선수가 두 번째로 북한 선수단에 금메달을 안기며 바르셀로나 대회에 이어 올림픽 2연패를 이루었다. 북한 선수단은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에 김목사의 도움을 더욱 고마워했다. 다무라 료코에게 승리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른 계선수는 김목사를 찾아와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며 “이 메달은 김목사님이 따신 것입니다”라며 크게 감사했다.

    이후 북한과 더 한층 가까워진 김목사는 북한에서 제작한 달력을 가져와 미국의 한인 사회에 판매해주었고, 한인교회에서 양말을 모아 북한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 북한의 절박한 식량 사정을 덜어주기 위해 북한에 국수공장을 짓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국수공장 사업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중국에서 마련한 밀가루를 갖고 직접 북한에 들어가 전달하였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 김목사는 이런 식으로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고 지원하였다.

    당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북한인을 접촉하면 사후에라도 이를 신고해야 했다. 김목사는 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북한인 접촉 신고를 했고 안기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안기부는 김목사에 대한 조사에서 북한 내부 첩보를 캐내려 했으나 김목사는 이러한 조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꽃제비 위한 사랑의 집

    옌지 등지에서 거지 행각을 하며 떠도는 북한 어린이를 ‘꽃제비’라고 한다. 김목사는 1998년 8월쯤 A봉사단원들과 함께 옌지와 투먼(圖們)·훈춘(渾春) 등을 돌아다니며 꽃제비를 돕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꽃제비들에게 가장 혹독한 것은 영하 20도나 되는 겨울 날씨다. 추위가 닥치면 꽃제비들의 생활은 물론, 생존하기조차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A봉사단은 한국에 돌아와 곧바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 돈으로 옌지에 5층짜리 건물을 임대해 그해 12월 꽃제비를 수용하는 ‘사랑의 집’이란 고아원을 개설했다. 김목사는 옌지 일대를 떠도는 30여 명의 꽃제비를 받아들였다. 꽃제비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친 아이들이다.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하다. 반대로 지적인 훈련은 매우 부족해 예절은 기대하기 힘들다. 장애인 선교를 통해 이러한 아이들은 절대적인 권위로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김목사는 꽃제비들에게 그를 ‘아버지’로 부르게 하며 그들의 마음을 잡아나갔다.

    꽃제비 중에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김목사는 꽃제비 부모들을 위한 아파트를 따로 구해 그곳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때문에 김목사 주변에는 점점 장성한 탈북자들이 찾아와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98년 12월부터 납치된 2000년 1월 사이의 1년 1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김목사는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데 전력하게 되었다.

    이같은 생활을 통해 김목사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즉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과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의 독재 정권을 분리해서 보게 된 것이다. 그가 박애심(博愛心)과 인내심을 갖고 도와야 할 대상은 식량난과 독재에 눌려 신음하는 북한 주민이지 김정일 정권이 아니었다. 김목사는 북한 주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보다 과감한 북한 선교에 들어갔다.

    식량난 때문에 탈북한 사람들 중에는 식량이나 돈이 마련되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김목사는 이러한 사람들을 접촉해 기독교를 알린 후 이들로 하여금 성경을 갖고 북한에 들어가게 하였다. 구약과 신약이 함께 있는 성경은 너무 두껍기 때문에 각 복음서별로 분책을 해서 갖고 들어가 북한에 전파시키게 하는 ‘쪽 복음’을 한 것이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탈북자 중에는 북한의 국경수비대에게 검거되는 사람도 있다. 쪽 복음에 참여한 탈북자들이 검거되면서 북한 보위부는 김목사가 북한에 성경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이춘길씨 증언). 그때부터 보위부는 김목사가 베풀어준 과거의 은혜에 대한 기억은 접고 김목사를 적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9년 여름 김목사는 직장암이 발견돼 9월29일 한림대학 성심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은 악성 종양이 발견된 직장을 잘라내고 대신 인공항문을 집어넣어 대장과 인공항문을 연결시키는 장 절제 및 인공항문 문합(吻合:장기를 서로 접합시키는 것) 수술이었다.

    수술은 상당히 잘 되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정기적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인공항문의 필터도 갈아주어야 한다. 특히 필터는 제때에 갈아주지 않으면 체내에 독소(毒素)가 퍼져 몸을 약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무렵 김목사는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의 김상철(金尙哲) 변호사가 벌인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라’는 서명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조선족은 물론이고 탈북자들에게서도 서명을 받아 김변호사측에 전달했다. 바닥이 좁은 옌지에서 김목사가 벌인 서명운동은 북한 보위부에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독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북한 주민을 구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 김목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김변호사는 국내외 1천180여만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2001년 이를 UNHCR(유엔고등판무관실)과 UN본부에 전달했다).

    그해 11월 김목사는 훨씬 더 담대한 활동에 들어갔다. 탈북자를 몽골로 빼돌려 난민 판정을 받은 후 한국으로 데려간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탈북자들이 난민 판정을 받으면 김정일 정권은 주민을 괴롭히는 독재정권이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공인(公認)된다. 김정일로서는 상당한 망신과 함께 고립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몽골은 과연 탈북자를 난민으로 판정해줄 것인가.

    김목사는 몽골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데는 중국과 몽골이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라는 점도 한 몫을 했다. 몽골의 면적은 156만㎢인데 몽골 남쪽의 중국 영토에는 110만㎢의 ‘내몽고 자치구’가 있다.

    내몽고 자치구는 만리장성 이북이라 몽골의 영토로 인식되던 곳인데 차츰 한족의 이주가 늘어나 청나라 때인 1664년부터는 내몽고로 불리면서 중국의 영토로 굳어졌다(지금 내몽고 자치구에는 한족이 90% 정도 거주한다).

    몽골에 탈북자 난민촌 건설 입안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의 거듭된 이주로 내몽고를 내주었다는 생각이 있어 중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목사 팀은 이같은 몽골인의 반중(反中)감정을 이용해 탈북자를 난민으로 판정받도록 해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목사는 믿을 만한 사람을 중심으로 11명의 탈북자를 골랐다. 그리고 11월12일 이들을 출발시켜 중-몽 국경에 도착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몽골에 들어가 이들이 국경선을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도로가 있는 중-몽 국경지대에는 철조망과 고압선 등으로 5중의 담이 쳐 있고 군데군데 초소가 있다. 그러나 도로로부터 10여km 이상 벗어난 곳에는 철책 하나만 있고 초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김목사는 이러한 곳에서 국경선을 넘도록 탈북자들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국경선을 넘기로 한 날 수은주가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며 매섭게 눈발이 날렸다.

    집단 탈북 막기 위한 北 보위부의 유인공작

    몽골의 한 지역에는 과거 소련군이 숙소로 쓰다 버린 빈 아파트촌이 있다. 김동식 목사는 이곳을 탈북자 난민 수용소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김목사와 함께 활동한 지인들이 이 아파트촌을 방문했다.

    날이 추워지자 이들은 약속한 지점까지 가지 않고 국경선을 넘다가, 전원 몽골의 국경수비대에 검거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목사는 추위에 떨며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으나 이들이 오지 않자 몽골의 국경 도시로 철수했다. 이 도시에서 김목사 팀은 11명의 탈북자 전원이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사실을 알았다.

    김목사는 국경수비대측으로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붙잡힌 탈북자들은 전부 다 중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지금도 두 명의 탈북자가 붙잡혀 있는데 오늘 새벽 또 11명의 탈북자가 붙잡혔다. 이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으로 되돌려진 탈북자들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될 것이고, 북한으로 돌아가면 죽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갈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몽골로의 탈출은 아니한 것만도 못한 결과가 되고 만다. 마음이 급해진 김목사는 몽골정부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선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목사가 여러 기관에 간곡히 요청하자 몽골의 실력자 사이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와주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11월25일 몽골 정부는 용단을 내렸다. 이들을 난민으로 판정해주지는 않았지만 한국대사관에 인도해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 혜택은 먼저 국경수비대에 잡혀 있던 두 명의 탈북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마침내 13명의 탈북자들은 한국대사관에서 마련해준 대한민국의 신분증을 갖고 11월30일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 사건은 몽골을 통한 집단 망명이 성공한 첫 번째 사례였지만 이들의 탈북성공은 한국 언론에 짤막히 보도되었다. 비록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북한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탈북이 성공한 후 김목사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몽골을 비롯한 제3국에 탈북자 난민촌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몽골에 탈북자 난민촌을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이도 김목사 가족이었다. 몽골의 한 평원지대에 과거 소련군이 거주하던 아파트 시설이 있다. 이 아파트는 문짝이나 창틀이 뜯겨나간 채 덩그러니 서 있는 상태이지만 수도를 비롯한 기본 시설은 갖춰져 있다.

    김목사측은 한적한 곳에 있는 이 시설을 발견한 후 이곳을 탈북자 난민촌으로 만드는 문제를 거론했다. 이것이 탈북자를 돕는 여러 NGO에 알려지면서 몽골에 탈북자 난민촌을 세울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1999년 11월30일 한국에 도착한 11명의 탈북자 중에는 조봉일씨(50) 부자(父子)가 있었다. 조씨는 북한 호위총국(경호실과 유사한 조직)의 후방부(물자를 조달하는 부대)에서 중좌로 복무하다 탈북한 사람이다. 중좌 시절 조씨는 상급자인 김영선 상좌의 명령을 받아 중국과 밀무역을 했는데 이것이 보위부에 적발돼 보위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게 되자 잠시 보위부의 조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98년 5월1일 북한을 탈출했다.

    탈북자 동정남의 전화

    조씨는 잠시 중국에 피해 있다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9월8일 보위부 공작원의 유인책에 휘말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기에 이르렀다. 송환되면 죽을 게 뻔했다. 북한으로 송환되기 위해 단동(丹東)의 감옥소에 있던 10월19일 그는 극적으로 감옥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숨어다녔다. 매서운 추위 속에 돈까지 떨어져 거의 거지가 된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1999년 5월 옌지에 들어와 한국인 전도사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청진에 두고 온 아들(조철진)을 상봉하게 되었다. 조씨는 잠시만 피해 있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탈북 의도를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철진군은 아버지가 탈북한 것을 알고 1998년 6월 아버지를 찾아보겠다며 탈북했다. 나이가 어렸던 철진군은 꽃제비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김목사를 만나 사랑의 집에서 김윤국이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다 아들까지 만나게 된 조씨는 김목사에게 한국으로 가겠다고 강청해 아들과 함께 11명의 탈출조에 가담하게 되었다.

    조씨는 옌지에 있을 때부터 청진에 남아 있는 아내와 딸을 걱정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에는 아내와 딸이 틀림없이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이라며 더욱 노심초사했다.

    집단 탈북 막기 위한 北 보위부의 유인공작

    김동식 목사를 옌지로 유인해 북한으로 납치한 혐의가 있는 탈북자 동정남씨.

    조씨가 북한에 있는 아내와 딸을 걱정한다는 것은 사랑의 집 식구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조씨 부자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인 2000년 1월7일 김목사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1월13일 김목사는 옌지에 있는 탈북자 동정남씨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든 김목사는 활기찬 목소리로 “그래 그래 잘 됐네. 내가 모레 갈게”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동정남씨 전화인데, 조봉일씨 부인과 딸이 수용소로 쫓겨가지 않고 청진의 집에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군”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통화내용을 알려주었다. 1월15일 김목사는 항공편을 이용해 옌지로 들어갔다.

    황급히 달아난 흔적

    그런데 김목사에게 전화를 건 동정남씨는 사랑의 집 식구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몽골을 경유한 탈북조에도 끼지 못했다. 사랑의 집에서는 동씨를 같은 탈북자인 염모씨(그후 한국에 들어옴)와 함께 지내게 했는데, 염씨는 “동씨가 북한의 보위부 끄나플과 접촉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랑의 집 식구들은 그간의 생활에서 동씨가 유혹에 약한 성격인 것을 알고, 북한 보위부의 유혹에 걸려들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그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김목사는 동씨의 전화를 받고는 반가워하며 아무 의심없이 옌지로 갔다. 사랑의 집에는 김목사의 입양 아들인 김아론군이 있었다. 옌지 도착 다음날인 16일 오후 12시쯤 김목사는 김군에게 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예림불고기집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목사는 저녁 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김군은 김목사의 도착 사실을 알고 있는 동정남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낮에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동정남은 “아까 만났는데 그후로는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밤 10시가 넘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생각이 든 김아론군은 동료 한 명과 함께 동정남씨 숙소를 찾아갔으나 잠겨 있었다. 열쇠를 구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에는 급히 짐을 싸서 나간 흔적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수상한 생각이 든 김아론군은 다음날 중국 공안(경찰)에게 실종신고를 하고 서울로도 알렸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일에는 한국의 외교통상부에도 김목사 실종을 신고하게 되었다.

    1월16일 이후 옌지에서는 김목사는 물론이고 김목사를 봤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동정남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사랑의 집 식구들은 북한이 동정남씨를 시켜 김목사를 옌지로 오게끔 유인하고 공작원을 매복시켰다가 납치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은 이춘길씨가 수기와 김목사 납치에 가담한 보위부 공작원의 이름을 공개함으로써 상당부분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상한 한국의 침묵

    이후 김목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김목사가 실종된 때로부터 1년 5개월이 지난 2001년 6월 김목사와 가까이 지냈던 A씨는 서울 강남의 팰리스 호텔에서 국정원 신분증을 제시한 한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김목사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바로 사망하셨다. 가족들이 김목사 시신을 인수해 갔는가”라고 물었다. A씨는 전혀 들은 바 없다고 대답했다. 그후 A씨가 김목사 가족에게 확인해본 결과 김목사가 한국에 왔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이상한 생각이 든 A씨는 그후 국정원에 김목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달라고 수 차례 청원했으나 국정원은 곤혹스러운 듯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A씨는 “김목사는 직장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인공항문의 필터를 제때에 갈아주어야 한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북한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 더구나 필터까지 갈지 못했다면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국정원은 김목사의 행적에 대해 뭔가 알면서 숨기는 눈치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목사가 납치된 2000년, 남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독재자 김정일과 신음하는 북한 주민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정상회담에 눈이 팔려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한국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타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벌인 반독재 투쟁과 동티모르인의 자유를 위한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었다. 그와 똑같은 투쟁을 김목사는 북한을 상대로 펼쳤다. 그렇다면 한국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인권(人權)국가답게 김목사의 송환을 북한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서울에 있는 김목사의 가족은 “한국 정부는 왜 납북자 문제에 침묵하는가. 김정일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침묵이라면 한국 정부가 말하는 인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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